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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칠

유학시절 미국생활에 좀 익숙해졌을 때 방학을 이용해서 집칠(house painting)로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처음엔 다른 사람들을 따라다니며 기본적인 것을 배웠다. 좀 알듯 싶을 때 몇 친구를 동료로 해서 집칠업을 개업(?)한 것이다. 먼저 신문에 광고를 낸다. 전화가 걸려오면 그 집에 가서 견적을 낸다. 이 부분이 어려운 부분이다. 집의구조, 벽의 자질, 페인트의 종류 색깔 등을 고려해서 페인트의 양 , 칠하는데 걸리는 기간을 계산해서 값을 말한다. 주인은 몇 사람의 업자에게서 견적을 받고 선택하게 된다. 처음엔 실수 투성이었다. 거의 한 달이 나 걸릴 건물을 삼일에 한다고 했다. 주인이 갸우뚱하면서 우리에게 일을 맡겼다. 하루 해보니 어림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 팽개치고 도망해 버렸다. 칠하는 ..

자리와 일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월요일 아침마다 애국조회라는 것이 있었다. 중고등학교 학생 전원이 운동장에 모여 국기에 경례하고 애국가 부르고 교장선생님 훈시 듣고 하는 주례행사였다. 그 모임에서 어려운 것은 학생들을 정렬시키는 일이었다. 약 2000명되는 학생들을 정렬시키기 위해 체육선생님이 교단에서 구령을 하곤 하였다. 우리학교에는 두 분 체육선생님이 계셨다. 한 분은 일본에서 공부한 멋진 구령을 하는 키가 상대적으로 큰 분이었고 또 한 분은 평범하고 작은 체격의 선생님이었다. 우리는 이 두 분을 각각 큰 체육, 작은 체육으로 불렀다. 이 두 분이 월요일마다 번갈아 학생들의 정렬을 맡아 지도하셨다. 그런데 꽤 늠름한 모습을 한 큰 체육의 멋진 구령에는 학생들이 움직여주질 않았다. “좁은 간격 우로 나란히,”..

꾸중과 칭찬

사람은 칭찬으로 성장하고 꾸중으로 사회적응력을 키운다. 교육하는 사람은 이 두면을 적절히 활용해야 한다. 꾸중은 점잖은 표현이고, 사람은 ‘욕’먹는대 익숙해야 한다. 나는 학교생활에서 비교적 모범생으로 자라면서 뭐 그리 큰 꾸중 듣거나 매를 맞으며 자라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살아오면서 어려운 때를 많이 겪는다. 싫은 소리를 들으면 대충 무시해도 될 경우에도 자존심 상해하고 속이 상해하곤 한다. 아무덕도 득도 안 되는 태도다. 학교의 모범생이 사회의 낙오생이란 말을 흔히들 하곤 한다. 어느 정도 맞는 얘기다. 우선 학교의 모범생이 군대생활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을 보았다. 또 학교에서 교장이 교사를 구둣발로 차던 시대에 모범생이 사회생활을 견디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유학시절에 소위 한국에서 일류 학교만..

고무풍선

어려서 학교 운동회 날에는 여러 경기 중에 고무풍선 불기가 있었다. 누가 제일 크게 부느냐의 시합인데 나는 이 고무풍선 부는 것이 늘 불안 하였다. 우선 흐늘 흐늘 한 입구를 찾아 입으로 바람 넣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리고 공기가 들어가기 시작하여 풍선이 커지기 시작하면 불안해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승을 못할까봐서가 아니라 터지는 소리에 깜짝 놀라게 되는 것이 싫어서였다. 경기에서 뿐아니라 평소에도 풍선을 불때면 마찬가지로 불안하였다. 한데 운 좋게 터뜨리지 않고 크게 불고 나면 자랑스러웠다. 그 풍선의 공기를 빼고 다시 불어도 먼저 불었을 때의 크기가 되기까지는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 지금은 세계적인 지휘자가 되어서 활발히 음악활동을 하는 자랑스런 친구가 있다. 그는..

남 생각

어릴 적 피난길에서의 일이다. 쌀을 지고 기약 없는 피난을 가던 길이라 쌀을 아끼고 아껴 끼니라도 때우고 있었다. 걸어서 가는 피난길이라 갈수록 지쳐 있었고 나는 늘 배가 고팠다. 그 날도 날 이 저물어 어찌어찌 어느 집 문간방을 빌려 하룻밤 묵기도 하고 어머니는 저녁을 지으셨다. 허겁지겁 내 몫을 다 먹고도 성이 안찼다. 어머니는 눌은 밥에 물을 부어 내게 주셨다. 배도 고팠지만 워낙 좋아하는 눌은 밥이라 널름 받아들고 먹으려 했다. 그때 아버지가 “내가 그걸 먹으면 어머니는 무얼 먹겠니?” 하셨다. 부끄럽고 서러웠다. 생각해보니 어머니는 늘 우리와 함께 식사를 하시지 않으셨다. 나는 그때 어머니는 남는 것이 없으면 굶고 계시다는 걸 몰랐다. 대학시절 입주 가정교사를 하던 때였다. 아주 잘 사는 집이었..

정도(程渡)와 수준(水準)

정도는 일반적으로 양(量)의 도수를 나타내는 말이고 수준은 질(質)의 기준을 나타내는 말이다. 정도와 수준을 지킨다면 적어도 법적 도덕적 기준의 평가에는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라비안 나이트 중 알라딘의 램프라는 이야기를 모두 기억한다. 알라딘이 마왕이 갇혀있는 항아리를 건져올린다. 뚜껑을 열자 나타난 마왕은 알라딘을 위협한다. 그는 “언제 언제까지나를 구해주면 무엇이나 다 해 주려고 했으나 그 기간이 지나고 나서는 구해주는 놈은 죽이려 했다.”고 한다. 기다리는 정도가 지나쳐 화가 난 것이다. 기다림에 정도가 있는 것이다. 아이들 버릇없음도 정도 문제다. 할아버지 수염 잡아당기는 정도가 되면 곤란하다. 나는 사람에게 장난끼, 유치한 면,악한 면, 미친 기질 등이 있어야 사람답다고 여기지만 그것도 정도..

도둑과 경찰과 이웃

도둑을 맞아 보지 않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누구나 도둑을 맞아본 경험이 있으면 도둑 맞은 사람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잃어버린 물건들의 시장 가격에 관계없이 주인에게 귀한 것들이어서 그 심정의 참담함은 이루 말 할 수 없다. 신혼 초에 도둑을 맞았다. 결혼을 기념해서 장만한 정장 한 벌씩과 신부의 겨울 외투가 우리의 전 재산이었다. 둘이 다 직장엘 다녔는데 그 날은 아침부터 비가 왔다. 그래 둘이 다 막 입는 헌옷을 걸치고 출근을 했다. 그리고 퇴근 후 돌아와 보니 방문도 장문도 활짝 열리고 텅 비어 있었다. 그 순간 정말 가슴이 텅 비어 버리는 것 같았다. 그때는 밖에 널어둔 빨래나 밖에 둔 미역이나 채소 등을 훔쳐가던 때였다. 우리는 전 재산을 잃은 것이었다. 한 해쯤 전인가 선배 한..

인정의 권리

대학 시절 한 교수님의 예가 생각난다. 그 때만해도 자기 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참 드문 때였다. 한데 한 사람이 차를 샀다. 운전을 해서 출근을 할 때 옆 집에 사는 미국인을 옆에 태워 주었단다. 그랬더니 보는 사람들은 " 저 사람 미국인 운전사로구나"하더란다. 그래 불쾌해서 차 주인은 미국인을 운전사로 고용했단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사람들이 "저 사람 미국 사람 차 얻어 타고 다니는 구나" 하더라나. 사실이야 어쨌거나 남이 보고 판단하는 데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이 남들의 견해가 '인정의 권리(the right od recognitiion)'인데 사람은 누구나 인정의 권리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선배 교수 한 분이 오래 전 두 대학에서 강의를 했단다. 한 대학은 세칭 일류 대학이고 한 대학은..

분별

때와 장소 또 형편에 따라서 할 일과 안 할 일을 분별해서 바르게 하는 것이 지혜의 한 부분이다. 분별 못하는 자들을 가리켜 '똥 오줌도 못 가린다'고 한다. 그런 어리석은 자를 가리켜 평안도에서는 '띠(똥의 평안도 방언)도 모르고 똥 장사 한다'고도 한다. 사람이 어려서는 재롱둥이여야 한다면 젊은 시절에는 혈기 왕성해서 씩씩해야 한다. 노인이 되어서는 노인 행세를 해야 하는 것이다. 노인이 재롱을 떨거나 젊은이 흉내를 내어선 안 된다. 요샌 모두 젋어 보인다면 좋아들 한다. 노인들도 젊어 보인다면 좋아한다. 스케이팅을 좋아하는 친구가 있다. 한 번은 스케이트장엘 갔는데 80은 넘었음직한 노인이 빨간 타이츠를 입고 스케이트를 타더란다. 젊어서 좋아하던 운동인지는 몰라도 보기가 싫더란다. 교수 여럿이 함께..

영어를 배운다는 것

언어란 기본적으로 소리체계요, 통사체계요, 의미체계다. 즉 입으로 하는 말이요, 머리로 아는 문법이요, 감정으로 이해하는 뜻이라는 말이다. 이 기본 원칙은 모국어나 외국어에 관계없이 적용되는 원칙이다. 그러니까 언어란 입으로 하는 말이지만 그 언어가 가진 규칙에 맞게 쓴 글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수단이라고 할 수 있고 또 상대의 생각을 알아 차리는 수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언어 표현자체가 의미를 갖게 되기 때문에 단순한 수단이라고만 할 수 없고 언어를 생각 그 자체라고 볼 수도 있다. 즉, 언어는 그 사람의 사상의 표현이며 나아가 언어가 사람의 사상자체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말을 배운다는 것은 생각을 배우는 것이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한문, 일본어, 영어 등 많은 외국어를 ..

나의 아버지

나의아버지는 사범대학교를 나와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셨다. 어릴 적 생각에도 그림을 참 잘 그리셨다. 교과서는 친 필로 쓰시고 삽화도 직접 그려서 쓰시고 하셨다. 식구들 밥 먹는 모습을 연필로 그리면 어찌나 모습들이 똑같은지 모두들 즐거워하곤 하였다. 크레용으로 그린 사람이나 말은 살아있어 곧 말을 하고 뛰어 나갈듯 하였다. 책을 많이 읽고 글도 많이 쓰셨다고 하는데 전쟁통에 다 잃고 1.4후퇴때 피난지에서 쓰신 시조(時調) 몇 수가 남았을 뿐이다. 아버지는 모태 신앙을 이어 받은 독실한 기독교 신앙인 이어서 기도, 신앙고백의 분위기가 가득한 시조들을 남기신 것 같다. 생전의 아버지를 생각하며 시조들을 여기 싣는다. 맞춤법은 원문대로 두었다. 오늘도 소리없이 가는비가 나립니다 남의집 영창앞에 소리없이 ..

차포(車包) 떼고

우리는 장기를 둘 때 상대에 따라 상을 떼거나 마, 차, 포 등을 떼고 두는 경우가 있다. 상대가 실력이 부족하여 내가 쪽수를 덜 가지고 두겠다는 것이다. 바둑도 상대에 따라 몇 알 먼저 두게 하기도 한다. 오락으로 탁구를 해도 몇 개 접어준다. 이런 경기 방식은 우리나라에나 있는 것일 것이다. 유학시절 대학 수영장에서 수영을 자주 하였다. 사고로 다리 둘 다 무릎위에서 잘린 미국인 학생이 있었다. 이 친구는 다리 성한 친구들과 수영 시합하는 것을 즐겼다. 한데, 뭘 접어주는 게 아니라 그냥 1: 1 경쟁을 하는 거였다. 속도가 썩 빨라 성한 이들은 거의 다 이기곤 하였다. 꼭 한 친구에게 뒤지곤 했는데, 옆에서 보기 안타까울 정도로 아쉬워하며 재 경기를 신청하곤 하였다. 그들에게는 ‘차포 떼고’ 없다...

허튼 생각 허튼 소리

나는 갈보(창녀)를 존경한다. 사람들은 그들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의 본분을 알고 나름대로의 삶의 목표도 분명히 알고 있다. 또 어떤 면에서는 사회전체를 돕는 일도 감당하고 있다. 가령 전쟁중에 그들이 없었다면 많은 다른 여인들이 희생 됐을 터이다. 또 그들로 말미암아 ‘육신이 너무 강한’ 많은 남성들이 위로를 받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나는 유학시절 미국의 한 도시 작은 한인 교회에서 소위 전쟁신부(war birde)들을 많이 만나 봤다. 그들은 한국 전쟁중에 ‘양부인’으로 미군을 만나 결혼해서 미국에 정착한 이들이다. 그들의 전직은 ‘양갈보’지만 참으로 성실한 가정의 주부로 한 남자의 충실한 아내요, 아이들의 성실한 어머니였다. 또 그 교회에서 충성되게 일하는 여신도들이었다. 누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