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446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 두고 가는 마음에게 - 오애순

두고 가는 마음에게- 오애순어려서는 손 붙들고 있어야따신 줄 알았는데이제는 곁에 없어도당신 계신 줄을 압니다.이제는 내게도 아랫목이 있어당신 생각만으로도온 마음이 데워지는걸낮에도 달 떠있는 걸아는 듯이 살겠습니다.그러니 가려거든 너울너울 가세요.50년 만에 훌훌 나를 내려두시고아까운 당신 수고많으셨습니다.아꼬운 당신 폭싹 속았수다.- 드라마 속 시집 (바당꽃, 2025)* 감상 : 오늘은 특별한 시 감상,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시 감상이 아니라 드라마 한 편을 감상해 보려고 합니다. 지난 3월 7일 공개되어 4주간에 걸쳐 전체 16부작이 방영되면서 장안의 뜨거운 화제가 되었던 OTT 넷플릭스 드라마 이야기입니다. 제주도의 바닷가 작은 마을에서 나고 자란 ‘오애순’과 ‘양관식’이라는 두 남녀 주인공,..

광야 - 이육사

광야- 이육사까마득한 날에하늘이 처음 열리고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모든 산맥(山脈)들이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끊임없는 광음(光陰)을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지금 눈 나리고매화(梅花) 향기 홀로 아득하니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다시 천고(千古)의 뒤에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이 광야(曠野)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여라.- 유고 시집 (범조사, 1954)* 감상 : 이육사 시인, 독립운동가, 본명은 이원록(李源祿).1904년 4월 4일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에서 퇴계 이황의 14대 직계 손으로 태어났습니다. 길지 않은 40년 일생동안 17번의 옥고를 치렀고, 44편의 시를 남겼으며, 1927년 장진홍 의사의 ..

바람의 배경 / 내가 원하는 천사 - 허연

바람의 배경- 허연마을에 바람이 심하다는 건, 또 한 명이 죽었다는 소식이다. 밀밭의 밀대들이 물결처럼 일렁거렸다는 뜻이기도 하고, 언덕 위 백 년 넘은 나무 하나가 흔들리는 밀밭을 쳐다봤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 아이 하나가 태어났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김없는 일이기도 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기도 하다. 흙먼지 일으키며 아이들은 하루에도 몇 차례 밀밭 사이를 뛰어다닌다. 아이들도 안다. 바람을 굳이 피하지 않는 법을. 마을은 죽음과 친하고 죽음이 편하다. 죽음의 배경, 그것으로 족한 마을에 오늘도 바람이 분다.- 시집 (문학과지성사, 2012) * 감상 : 허연 시인.1966년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언론학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2009년 추계예술대학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나의 침실로 - 이상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내 맘에는 나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한 자국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맨드라미, 들마꽃..

장닭 / 김승재 / 땅이 책이다 - 윤희상

장닭- 윤희상큰 누님이 결혼한다고 도배하는 날,방안의 장롱을 마당으로 꺼내 놓았다그래서, 마당에서 놀던 장닭과장롱 거울 속의 장닭이 만났다한쪽에서 웃으면, 다른 한쪽에서 웃고한쪽에서 폼을 잡으면, 다른 한쪽에서 폼을 잡고한쪽에서 노래를 하면, 다른 한쪽에서 노래했다그러다가, 갑자기장닭이 장닭에게 덤벼들었다서로 싸웠다놀란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췄다누가 먼저 덤벼들었는지 모른다다행히 장닭은 크게 다치지 않았다거울이 깨졌다사람들은 눈앞의 장닭이거울이 깨지면서거울 속에서 걸어 나온 장닭인지마당에서 놀다가 거울 속으로 걸어 들어간 장닭인지아니면, 또 다른 장닭인지아무도 알지 못했다- 시집 (문학동네, 2014)* 감상 : 윤희상 시인.1961년 12월, 전남 나주시 영산포에서 태어나 광주 동신고를 거쳐, 서울예술..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 시인은 - 이해인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이해인 손 시린 나목(裸木)의 가지 끝에홀로 앉은 바람 같은목숨의 빛깔그대의 빈 하늘 위에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차오르는 빛구름에 숨어서도웃음 잃지 않는누이처럼 부드러운 달빛이 된다.잎새 하나 남지 않은나의 뜨락엔 바람이 차고마음엔 불이 붙는 겨울날빛이 있어혼자서도풍요로워라.맑고 높이 사는 법을빛으로 출렁이는겨울 반달이여.- 이해인 제3 시집(분도출판사, 1983)* 감상 : 이해인 시인, 수녀.본명은 이명숙. 1945년 6월 7일 강원도 양구에서 가톨릭 신자 가정에 1남 3녀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지 3일 만에 받은 유아 세례명은 ‘베르나뎃다’입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이해인 수녀의 아버지는 납북되었고, 가족은 부산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그곳에서 부..

원 - 에드윈 마크햄 / 넓어지는 원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원 - 한 수 위- 에드윈 마크햄- 번역 류시화그는 원을 그려 나를 밖으로 밀어냈다.나에게 온갖 비난을 퍼부으면서.그러나 나에게는사랑과 극복할 수 있는 지혜가 있었다.나는 더 큰 원을 그려 그를 안으로 초대했다.Outwitted- Edwin MarkhamHE DREW a circle that shut me out -Heretic, rebel, a thing to flout.But Love and I had the wit to win:We drew a circle that took him in!- 류시화, 인생학교에서 시 읽기 (더숲, 2018)* 감상 : 류시화 시인. 본명은 안재찬(安在燦). 1957년 1월, 충북 옥천에서 태어났습니다. 옥천 청산초등학교 6학년 재학 중 서울로 전학하였으며, 대광고와 ..

겨울 인수봉 / 씬냉이 꽃 - 김달진

겨울 인수봉- 김달진고요한 겨울 한낮눈 위의 햇살이 눈에 부시고뒷산 언덕에 바람이 일어솔가지에 쌓인 눈이 떨어지자까치가 놀라 날아갔다.며칠 내려 쌓인 허연 눈빛에겨울 황혼은 그 걸음이 느린데저 건너 인수봉 꼭대기에는얼어붙은 듯 떠 있는 구름 한 점.전신주에 앉아 있는까치 한 마리그 하얀 목털에서해질녘 인수봉의 바람을 본다.- 유고 선시집 (민음사, 1990)* 감상 : 김달진 시인. 호는 월하(月下).1907년 2월 4일 경남 창원군 웅동면(현재 창원시 진해구 소사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야은(野隱)으로부터 한학을 배웠으며 항일 민족 기독교 학교로 알려진 계광 보통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서울로 올라온 그는 중앙 고등 보통학교를 다니다 병으로 잠시 학업을 중단, 고향으로 내려왔다가 1923년 다시..

풍장 - 이동순 / 반복 - 신평

풍장- 이동순​눈 펄펄 오는아득한 벌판으로부모 시신을 말에 묶어서채찍으로 말 궁둥이 힘껏 때리면그 말 종일토록 달리다가저절로 말 등의 주검이 굴러떨어지는 곳그곳이 바로 무덤이라네남루한 육신은주린 독수리들 날아와 거두어 가네지친 말이들판 헤매다 돌아오면부모님 살아온 듯말 목을 껴안고 뺨 비비며뜨거운 눈물그제야 펑펑 쏟는다네눈 펄펄 오는 아득한 벌판을물끄러미 내다보는자식들 있네- 시집(문학동네, 2005)* 감상 : 이동순 시인, 문학평론가.1950년 6월 경북 김천(금릉)에서 태어났습니다. 경북대학교 국문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1973년 동아일보 신춘 문예에서 시 ‘마왕의 잠’이 당선되어 등단했습니다. 1989년에는 동아일보 신춘 문예 평론 부문에도 당선되었습니다. 안동간호전문대, 충북대 국문과 교수를 ..

설날 아침에 - 김종길 / 설날 아침 - 김동리 / 설날 아침에 - 김남주

설날 아침에- 김종길매양 추위 속에해는 가고 오는 거지만새해는 그런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쉬고파릇한 미나리 싹이봄날을 꿈꾸듯새해는 참고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오늘 아침따뜻한 한 잔 술과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그것만으로도 푸지고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세상은험난하고 각박하다지만그러나 세상은 살 만한 곳,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좀 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한 해가 가고또 올지라도어린것들 잇몸에 돋아나는고운 이빨을 보듯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고대신문(1961)에 처음 게재, 김종길 시집 (삼애사, 1969)* 감상 : 김종길 시인, 영문학자. 1926년 11월 5일 경북 안동 길안면 지례(임하댐이 완공되면서 수몰되었음)에서 태어났습니다...

퀄트 하는 여자 / 홍매화 - 정귀매

누빔 이불 - 퀼트 하는 여자- 정귀매시간은 멈춰있고 지구는 돌아요지구를 돌리고도 남을 양의 실로여자는 이불을 꿰매지요한 땀 한 땀 광목을 누비며자전과 공전을 되풀이하는여자는 이불 속의 지구밤과 낮을 만들고겨울나무를 수놓아 계절을 짓지만시간을 재생할 수는 없어요여자는 멈춘 시간 속에 살지요여자가 묶어 놓은 매듭은 수백수천이불 속에는 풀어지지 않으려는 여자들이자신의 발을 묶어 두고이쪽 무늬에서 저쪽 무늬로 실타래를 옮겨 가지요때로는 먼 길을 걷기도서너 걸음 만에 돌아오기도 하지만멈춘 시간마다 매듭짓는 걸 잊은 적은 없어요솔기가 풀려 걸음이 가벼워지면다시 돌아와 박음질하고 가는 여자삼백예순날을 걷기만 하지요늘 같은 보폭을 유지하며밑단과 윗단을저승과 이승을 촘촘하게 오르내리는 여자스스로 옭아맨 매듭에 걸려넘어..

그리움 / 낡은 집 - 이용악

그리움- 이용악눈이 오는가 북쪽엔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험한 벼랑을 굽이굽이 돌아간백무선 철길 위에느릿느릿 밤새워 달리는화물차의 검은 지붕에연달린 산과 산 사이에너를 남기고 온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 내리는가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어쩌자고 잠을 깨어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눈이 오는가 북쪽엔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시집 (동지사, 1949), 첫 발표는 (1947년 2월)* 감상 : 이용악(李庸岳). 월북 시인. 1914년 11월 함경북도 경성에서 태어났고, 1928년 부령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 공립농업학교에 입학했으나 4학년 때 중퇴하였습니다. 두만강 인근에서 소금을 밀수하며 생계를 이어갔던 그의 부친은 시인이 어린 시절 객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 히로시마의 코오분(興文) 중학교에 편입하..

겨울나무에게 / 다시 새해의 기도 - 박화목

겨울나무에게 - 새해에 부쳐- 박화목동구 밖 외진 둔덕 겨울나무는황량한 들녘을 바라보며울고 있는가, 오늘의 아픔을쓰다듬을 길 없어 앙상한 가지부르르 떨며하늘 향해 그 어떤 애절한 호소를외치고 있는가, 겨울나무여그토록 얼룩졌던 곤욕의 나날들낙엽들 함께 어디론지 모두 떠나보내고새해 돌아왔으니 기쁜 소식 물고들까치도 날아와 마을 향해 깟 깟 깟지저귐즉 하다마는아직 삼동 내 몰아치는 차운 바람 가시잖고밤하늘의 별들도 꽁꽁 얼어붙는구나하나 오는 새봄의 소망을땅속에 묻어둘 순 없어언젠가는 새엄 돋아 다시금푸른 잎사귀들로 감싸일 것을,그 믿음으로 하여 겨울나무오늘 꿋꿋이 서 있음은......차운 바람 스치는 가지 끝에서기도의 음성을 듣네둔덕의 겨울나무여!- 시집 (창조문예사, 2003)* 감상 : 박화목 시인, 아동..

새해의 기도 - 이성선 / 새해 아침의 비나리 - 이현주

새해의 기도- 이성선새해엔 서두르지 않게 하소서.가장 맑은 눈동자로당신 가슴에서 물을 긷게 하소서.기도하는 나무가 되어새로운 몸짓의 새가 되어높이 비상하며영원을 노래하는 악기가 되게 하소서.새해엔, 아아가장 고독한 길을 가게 하소서.당신이 별 사이로 흐르는혜성으로 찬란히 뜨는 시간나는 그 하늘 아래아름다운 글을 쓰며당신에게 바치는 시집을 준비하는나날이게 하소서.- 이성선 시전집(시와시학사, 2005)* 감상 : 이성선 시인.1941년 1월 2일 강월도 고성군 토성면 성대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속초에서 초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1년 고려대학교 농과대학에 진학했으며 졸업 후 수원 농촌진흥청에 입사하여 작물 시험반에서 콩을 연구했습니다.1970년 에 ‘시인의 병풍’ 등 시 4편을 발표하면서 등단하였으며 19..

겨울 숲에서 - 안도현 / 눈보라 치는 겨울 숲에서 - 박노해

겨울 숲에서- 안도현참나무 자작나무 마른 잎사귀를 밟으며첫눈이 내립니다첫눈이 내리는 날은왠지 그대가 올 것 같아나는 겨울 숲에 한 그루 나무로 서서그대를 기다립니다그대를 알고부터나는 기다리는 일이 즐거워졌습니다이 계절에서 저 계절을 기다리는헐벗은 나무들도 모두그래서 사랑에 빠진 것이겠지요눈이 쌓일수록가지고 있던 많은 것을송두리째 버리는 숲을 보며그대를 사랑하는 동안내 마음속 헛된 욕심이며보잘것없는 지식들을내 삶의 골짜기에 퍼붓기 시작하는저 숫눈발 속에다하나 남김없이 묻어야 함을 압니다비록 가난하지만따뜻한 아궁이가 있는 사람들의 마을로내가 돌아가야 할길도 지워지고기다림으로 부르르 몸 떠는빈 겨울나무들의 숲으로그대 올 때는천지사방 가슴 벅찬폭설로 오십시오그때까지 내 할 일은머리끝까지 눈을눈사람 되어 서 있는..

사마천 / 견딜 수 없는 것 - 박경리

사마천(司馬遷)- 박경리 그대는사랑의 기억도 없을 것이다긴 낮 긴 밤을멀미같이 시간을 앓았을 것이다천형(天刑) 때문에홀로 앉아 글을 썼던 사람육체를 거세 당하고인생을 거세 당하고엉덩이 하나 놓을 자리 의지하며그대는진실을 기록하려 했는가- 시집 (솔 출판사, 1994)* 감상 : 박경리. 시인, 소설가.1926년 10월 28일(음력)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박금이’입니다. 아버지의 방랑벽 때문에 어릴 적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야 했습니다. 1946년 진주여고를 졸업한 해 중매로 일본 유학까지 갔다온 김행도와 결혼, 1남 1녀를 얻었고 인천으로 올라와 잠시 초등학교 학생을 가르치기도 하고 헌책방을 운영하기도 했지만 그만두고 현재 세종대학교의 전신인 서울 가정보육사범학교 가정과에 입학했습니다. 졸업 ..

동두천 1 / 그대는 어디서 무슨 病 깊이 들어 - 김명인

동두천 1 - 김명인 기차가 멎고 눈이 내렸다 그래 어둠 속에서번쩍이는 신호등불이 켜지자 기차는 서둘러 다시 떠나고내 급한 생각으로는 대체로 우리들도 어디론가가고 있는 중이리라 혹은 떨어져 남게 되더라도저렇게 내리면서 녹는 춘삼월 눈에 파묻혀 흐려지면서 우리가 내리는 눈일 동안만 온갖 깨끗한 생각 끝에역두(驛頭)의 저탄 더미에 떨어져몸을 버리게 되더라도배고픈 고향의 잊힌 이름들로 새삼스럽게서럽지는 않으리라 그만그만했던 아이들도미군을 따라 바다를 건너서는더는 소식조차 모르는 이 바닥에서 더러운 그리움이여 무엇이우리가 녹은 눈물이 된 뒤에도 등을 밀어캄캄한 어둠 속으로 흘러가게 하느냐바라보면 저다지 웅크린 집들조차 여기서는공중에 뜬 신기루 같은 것을발밑에서는 메마른 풀들이 서걱여 모래 소리를 낸다 그리고 덜..

제야(除夜) / 산다는 것 / 눈 - 배한조

제야(除夜) - 배한조 한밤에눈이 소복이 내렸다.그동안 있었던 모든 일이눈 속에 묻히고 세상은하얀 화선지다. 화선지 밑에는 그려진 밑그림이보일락말락 흐려지고 있다.연말 동참 모임도, 향우회 송년회도, 퇴직자 모임도, 종친회의 연말 송년회까지, 그리고오늘은 올해 마지막 새벽 수영도 끝났다. 누군가에게 준 아픔은 없었는지갚아야 할 마음의 빚은 없는지유엔난민기구에 자동이체했던기부금마저 끊고 나니 편치 않은 마음이 도사린그믐날의 밤은 깊어 가고 있다. 오늘이 지나면 또 오늘이 오고올해가 지나면 또 올해가 온다는 걸 알지만매번 그랬던 것처럼 수없이 맞는 이 마지막 밤,그려졌던 희미한 밑그림은이 마지막 밤에도 또변함없이 아쉬움으로 가득하다. 저 하얀 화선지 위에또 무엇을 그려야 할까?아니, 무엇이 그려질까? - 시..

11월의 나무 /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11월의 나무 - 황지우 11월의 나무는, 난감한 사람이머리를 득득 긁는 모습을 하고 있다아, 이 생이 마구 가렵다주민등록번호란을 쓰다가 고개를 든내가 나이에 당황하고 있을 때,환등기에서 나온 것 같은, 이상하게 밝은 햇살이일정 시대 관공서 건물 옆에서이승 쪽으로 측광(測光)을 강하게 때리고 있다11월의 나무는 그 그림자 위에가려운 자기 생을 털고 있다나이를 생각하면병원을 나와서도 병명(病名)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처럼내가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11월의 나무는그렇게 자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나는 등 뒤에서 누군가, 더 늦기 전에준비하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 시집 (문학과지성사, 1998) * 감상 :황지우(黃芝雨) 시인, 극작가.1952년 1월 25일 전라남도 해남군 북일면 신..

논개 / 봄비 - 변영로

논개 - 변영로(卞榮魯) 거룩한 분노는종교보다도 깊고불붙는 정(情)열은사랑보다도 강하다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그 물결 위에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그 마음 흘러라. 아릿답든 그 아미(娥眉)높게 흔들리우며그 석류(石榴) 속 같은 입술`죽음'을 입 맞추었네―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그 물결 위에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江)물은기리―푸르리니그대의 꽃다운 혼어이 아니 붉으랴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그 물결 위에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그 `마음' 흘러라! - 발표 (1923년 4월호)- 시집 (1924) * 감상 : 변영로(卞榮魯).시인, 수필가, 영문학자. 호(號)는 수주(樹州). 1898년 6월 7일 경기도 부천 하오정면 고리울동 강살골(현재는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고강동)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