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462

사람꽃 / 어머니의 그물 - 고형렬

사람꽃- 고형렬복숭아 꽃 빛이 너무 아름답기로서니사람꽃 아이만큼은 아름답지 않다네모란꽃이 그토록 아름답다고는 해도사람꽃 처녀만큼은 아름답지가 못하네모두 할아버지들이 되어서 바라보게,저 사람꽃만큼 아름다운 것이 있는가뭇 나비가 아무리 아름답다고 하여도잉어가 아름답다고 암만 쳐다보아도아무런들 사람만큼은 되지 않는다네사람만큼은 갖고 싶어지진 않는다네- 시집 (창비, 1998)* 감상 : 고형렬 시인.1954년 11월 8일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났으며, 시인의 말을 빌면 소년 시절 스스로 가출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선친의 고향인 해남 할머니 집에 보내졌다가 5학년 때 다시 강원도 고성으로 돌아왔습니다. 십대 후반에 방황하며 대구, 제주, 진도, 구례 등지를 떠돌아 다녔습니다. 그런데 이 무렵 어린 고형렬..

뭔가를 그곳에 두고 왔다 / 백 년 - 이병률

뭔가를 그곳에 두고 왔다- 이병률언젠가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어딘가 먼 곳으로 여행을 갔다가 너무나도 소중하게 생각한 걸그만, 두고 온 거다.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건데과연 나는 찾으러 갈 성격인가, 아닌가 하는 생각.여러 번 생각해 봤는데,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됐느냐하면그게 한낱 물건이면 비행기 값도 계산해야 되고, 또 시간적인 것도계산에 넣어야 되고....결국은 물건일 경우,가지 않을 것 같단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하지만 사람인 경우, 사람 문제인 경우엔 조금 다를 거란 생각,아니, 조금이 아니라 많이 다를 거란 생각.소중한 누군가를 그곳에 두고 왔다든가내가 좋아하는 누군가가 그곳에 남아 있다면언제건 다시 그곳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물론 그 사람을 데려올 수 있을지 그건 장담 못하겠지만사..

나 하나 꽃 피어 / 출생기 / 엄마의 속곳 끈 - 조동화

나 하나 꽃 피어- 조동화나 하나 꽃 피어풀밭이 달라지겠느냐고말하지 말아라너도 꽃피고 나도 꽃 피면결국 풀밭이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나 하나 물들어산이 달라지겠느냐고 말하지 말아라나도 물들고 너도 물들면결국은 온 산이활활 타오르는 것 아니겠느냐.- 시집 (이두, 1995)- 시집 (초록숲, 2013)(재수록)* 감상 : 조동화 시인, 목회자.1949년 8월 20일 경북 구미시 무을면 오가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영남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78년 중앙일보 신춘 문예 시조 부문에서 ‘낙화암’이 당선되었고, 1983년 조선일보 신춘 문예 동시 부문에서 동시 ‘첨성대’, 그리고 1991년 부산일보 신춘 문예에서 시 ‘낙동강’이 각각 당선되었습니다. 시집으로 (현현각, 1984), (신원문화사, 19..

꼬리표 / 나뭇가지의 질문법 - 박남희

꼬리표- 박남희내 양복의 안쪽에는 꼬리표가 붙어있다신미영이라는 아내의 이름이 나를한나절 넘게 따라다녔다아내가 세탁소에 맡겼던 양복에 꼬리표가 붙은 줄도 모르고나는 아름다운 스타킹을 따라서 계단을 오르기도 하고가슴골이 훤히 보이는, 덜컹거리는 브래지어 옆 좌석에 앉아서책을 읽기도 했다아마도 아내는 내 은밀한 심장 박동소리를 들으며시장을 가고 밥을 짓고 빨래를 했을 것이다나는 꼬리표를 발견하고 곧 떼어버렸지만그 후 그 꼬리표는유성처럼 환하게 불을 밝히며 나를 따라다녔다제 몸을 산화해서 만든 유성의 꼬리표언젠가는 없어 질 제 몸을 꼬리표로 만들기 위해온 몸을 허공에 불사르는 별똥별이 보였다나는 한 때, 별똥별 같은 시인이 되리라 마음 먹었지만그동안 내 몸을 산화한 불같은 시를 한 편도 쓰지 못했다그래도 나는 ..

고래의 도시 / 오래 미워한 자를 위한 문상 - 손택수

고래의 도시- 손택수북한산 향로봉 길에 만난 흰 바위 하나 백경이라 이름해둔 뒤부터다지축에서 구파발을 지날 때면 지하철 창밖으로 절로 눈이 간다어미 고래는 등에 새끼를 업고수면 가까이 떠올라 숨을 쉬게 한다지죽은 새끼를 등에 업고숨이라도 쉬어보라 떠미는 어미 고래를뉴스에서 본 뒤로 가슴 통증이 왔다주말마다 산등성이가 떠밀어주는 힘으로 겨우 숨을 쉬던 시절차를 장만했으니 어디서든 낚시를 해보자트렁크에 싣고 다니던 낚싯대미늘에 내가 꿰여 퍼덕이던 날들도 가고꼭지를 비틀면 쏴 수돗물 소리를 파도 소리로 바꿔주던화장실 수도꼭지 위의 고래 문양에 울컥이던 날들도 가고도심 한복판에서 고래를 만났으니짜디짠 그 세월도 영 헛되지만은 않았다 할 것인가가끔은 커다란 머리를 들어 올리는 흰 바위가초록 물결 너머로 자신을 쏘..

밤꽃이 필 때 / 접목 - 복효근

밤꽃이 필 때- 복효근앞집 장닭은 시도 때도 없이 울어서날이 밝았겠거니 하고 일어나면새벽 세 시도 되고네 시가 되기도 했지요유정란 먹겠다고 기르는 그 닭을그러나 나는 모가지 비틀어소주 안줏감으로나 했으면 좋겠다고 했지만요밤꽃내 진동하는 6월 어느 날엔가는동네가 떠나가도록유난히도 울어 쌓는 웬수 같은 그놈 때문에웬일이랴 깨어서우리 내외뒤척이다 궁시렁대다 그만갑자기 뜨거워졌겠지요가끔은 아닌 밤에 꼬끼오닭이 울어도 좋겠다고생각하는데밤꽃내는 왜 스멀스멀온 동네에 기어댕기던지요- 시집 (실천문학사, 2013)* 감상 : 복효근 시인.1962년 남원에서 태어나 전주 혜성고와 전북대 사범대 국어교육과를 나와 평생 국어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교육 현장에서 시를 썼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유머 넘치는 시..

고요에 바치네 / 다정에 바치네 - 김경미

고요에 바치네- 김경미내가 어리석을 때 어리석은 세상 불러들인다는 것이제 알겠습니다누추하지 않으려 자꾸 꽃 본다 꽃 본다 우겼었습니다그대라는 쇠동전의 요철 닳아없어진 지 오래건만라일락 지는 소리들 반원의 무덤이던 아침부터대웅전 앞마당 지나는 승려들 가사 먹빛 다 잦아들던 저녁, 한여름의 생선 리어카와 봄의 깨진 형광등과부러진 검정 우산 젖어 종일 접히지 않던 검은 눈동자까지다 내가 불러들인 세상임을그 세상의 가장 큰 안간힘,물 흔들지 않고아침 낮과 저녁 발 씻는 일임을이제야 알겠습니다- 시집 (창비, 2008)- 계간 (2006 봄호)* 감상 : 김경미 시인.1959년 6월 24일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한양대학교 사학과와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비망록’..

유월이 오면 - 도종환

유월이 오면- 도종환아무도 오지 않는 산속에바람과 뻐꾸기만 웁니다바람과 뻐꾸기 소리로 감자꽃만 피어납니다이곳에 오면 수만 마디의 말들은 모두 사라지고사랑한다는 오직 그 한마디만깃발처럼 나를 흔듭니다세상에 서로 헤어져 사는 많은 이들이 있지만정녕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이별이 아니라 그리움입니다남북 산천을 따라 밀 이삭 마늘 잎새를 말리며흔들릴 때마다 하나씩 되살아나는바람의 그리움입니다당신을 두고 나 혼자 누리는 기쁨과 즐거움은모두 쓸데없는 일입니다떠오르는 아침 햇살도 혼자 보고 있으면사위는 저녁노을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내 사는 동안 온갖 다 이룩된다 해도그것은 반쪼가리일 뿐입니다살아가며 내가 받는 웃음과 느꺼움도가슴 반쪽은 늘 비워둔 반평생의 것일 뿐입니다그 반쪽은 늘 당신의 몫입니다빗줄기를 보내 감..

개가 짖는 이유 / 견주, 라는 말 - 김선우

개가 짖는 이유- 김선우내가 나의 말입니다내가 나의 언어란 말입니다나는 말과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모르시겠어요?왜 말을 하지 않느냐고 자꾸....왜 말 못 하는 짐승이라고 자꾸....내 표정이내 행동이내 몸이말이란 말입니다말과 몸이 분리된 지 오래인당신 종족이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계간 (2019년 겨울호)- 시집 (창비, 2021)* 감상 : 김선우. 시인, 소설가.1970년 강원도 강릉 당두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1996년 겨울호에 ‘대관령 옛길’ 등 10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하였습니다. 시집으로 (창비, 2000), (창비, 2003), (문학과지성사, 2007), (창비, 2012), (문학과지성, 2016), (단비, 2018), (창비, 20..

정읍별사 2 - 박정만

정읍별사井邑別詞 2- 박정만민들레 작은 꽃씨 하나가만리 허공 밖을 헤매이다가어디메 묵정墨井밭에 떨어져서눈부시게 눈부시게 피어나거든그게 바로 너인가고 여길지니내 가슴 한편에 봄 꿈 함께 꾸듯 그렇게 누워 있다가 바람 자고 운우雲雨 잘 내리거든찬란한 사랑의 꽃말 마구퍼뜨려놓고, 퍼뜨려놓고, 퍼뜨려놓고,날아가라, 적막한 사월의 뜰,인생의 싹수 노오랗게 사라진 대지 끝으로. 간혹 부질없는 목숨이 금단추같이 피어 길섶에 주저앉아 울음 울거든그것이 또한 싹수 노오란 나인 것을.인생은 저마다 외로운 섬과 같은 것, 안개 속에 가뭇없이 사라져서끝끝내 보이지 않는다 해도.흘러가는 곳 아무도 알지 못한다 해도 점점점...... 사라진다 해도......- 박정만 시집 (5象, 1986)* 감상 : 박정만 시인.1946년 8..

어머니 날 낳으시고 / 어머니의 그륵 - 정일근

어머니 날 낳으시고- 정일근오줌 마려워 잠 깼는데 아버지 어머니 열심히 사랑 나누고 계신다. 나는 큰 죄 지은 것처럼 가슴이 뛰고 쿵쾅쿵쾅 피가 끓어 벽으로 돌아누워 쿨쿨 잠든 척한다. 태어나 나의 첫 거짓말은 깊이 잠든 것처럼 들숨 날숨 고른 숨소리 유지하는 것, 하지만 오줌 마려워 빳빳해진 일곱 살 미운 내 고추 감출 수가 없다. 어머니 내가 잠 깬 것 처음부터 알고 계신다. 사랑이 끝나고 밤꽃 내음 나는 어머니 내 고추 꺼내 요강에 오줌 누인다. 나는 귀찮은 듯 잠투정을 부린다. 태어나 나의 첫 연기는 잠자다 깨어난 것처럼 잠투정 부리는 것, 하지만 어머니 다 아신다. 어머니 몸에서 내 몸 만들어졌으니 어머니 부엌살림처럼 내 몸 낱낱이 다 알고 계신다.- 시집 (문학의전당 2010)* 감상 : 정일..

하늘 냄새 - 박희준

하늘 냄새- 박희준사람이하늘처럼맑아 보일 때가 있다.그때 나는그 사람에게서하늘 냄새를 맡는다.- 시집 (신어림, 1995)* 감상 : 박희준.서라벌 예술대학에서 소설을 전공하였으며, 현재는 번역에 종사하며 건강 치유 명상법 개발에 힘쓰고 있습니다. 기(氣) 분야, 건강 분야, 명상과 정신세계 등에 관한 저술과 번역 작업에 전념해 왔으며, 국제 레이키마스터 명단에 올라 있는 국내 유일의 레이키 마스터로 를 설립, 초대 회장을 역임하였습니다.저서로는 (대원정사, 1986), (대원사, 1992), (대원사, 1992), (대원사, 1992), (을지서적, 1993), (신어림, 1994), (해돋이, 1994), (우리출판사, 1994), (신어림, 1995), (서원, 1995), (하남출판사, 1996)..

떠도는 자의 노래 / 낙타 - 신경림

떠도는 자의 노래- 신경림외진 별정우체국에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다어느 삭막한 간이역에 누군가를 버리고 온 것 같다그래서 나는 문득 일어나 기차를 타고 가서는눈이 펑펑 쏟아지는 좁은 골목을 서성이고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린 저잣거리도 기웃댄다놓고 온 것을 찾겠다고​아니, 이미 이 세상에 오기 전 저세상 끝에무엇인가를 나는 놓고 왔는지도 모른다쓸쓸한 나룻가에 누군가를 버리고 왔는지도 모른다저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 모른다​- 시집 (창비, 2002)* 감상 : 신경림 시인.1936년 4월 6일, 충북 충주 노은면 연하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충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습니다. 동국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1956년 에 ‘갈대’, ‘낮달’..

봄의 제전 祭典 / 모란이 피네 - 송찬호

봄의 제전 祭典- 송찬호마침내 겨울은 힘을 잃었다여자는 겨울의 머리에서왕관이 굴러떨어지는 것을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지켜보았다이제 길고 지리한 겨울과의 싸움은 지나갔다북벽으로 이어진 낭하를 지나어두운 커튼이 드리워진 차가운 방에얼음 침대에겨울은 유폐되었다여자는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왕관은 숲속에 버려졌다겨울은 벌써 잊혔다오직 신생만을 얻기 바랐던재투성이 여자는봄이 오는 숲과 들판을 지나다시 아궁이 앞으로 돌아왔다이제 이 부엌과 정원에서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오직 그것만이 분명한 사실이었다- 시집 (문학과지성사, 2016)* 감상 : 송찬호 시인.1959년 8월 5일, 충북 보은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중학교, 대전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후 경북대학교 독어교육과를 졸업했습니다. 어려서부터 ..

가지에 가지가 걸릴 때 / 봄의 화단에서 - 정끝별

가지에 가지가 걸릴 때- 정끝별쭉쭉 뻗은 봄솔숲 발치에 앉아 솔나무 꼭대기를 올려다보자니 저 높은 허공에 부러진 가지가 땅으로 채 무너지지 못하고 살아 있는 가지에 걸려 있다 부러진 가지의 풍장을 보고 싶었을까 부러진 가지와 함께 무너지고 싶었을까 부러진 가지를 붙잡고 있는 저 살아 있는 가지는 부러진 가지가 비바람에 삭아 주저앉을 때까지 부러진 가지가 내맡기는 죽음의 무게를 지탱해야 한다 살아 있는 가지 어깨가 처져 있다 살아 있는 가지들은 서로에게 걸리지 않는데 살아 있다는 것은 제멋대로 뻗어도 다른 가지의 길을 막지 않는데 한줄기에서 난 차마 무너지지 못한 마음과 차마 보내지 못한 마음이 얼마 동안은 그렇게 엉켜 있으리라 서로가 덫인 채 서로에게 걸려 있으리라엉킨 두 마음이 송진처럼 짙다- 시집 (..

벚꽃 그늘에 앉아 보렴 / 언제 삶이 위기 아닌 적 있었던가 - 이기철

벚꽃 그늘에 앉아보렴- 이기철벚꽃 그늘 아래 잠시 생애를 벗어놓아 보렴입던 옷 신던 신발 벗어놓고누구의 아비 누구의 남편도 벗어놓고햇살처럼 쨍쨍한 맨몸으로 앉아 보렴직업도 이름도 벗어놓고본적도 주소도 벗어놓고구름처럼 하이얗게 벚꽃 그늘에 앉아 보렴그러면 늘 무겁고 불편한 오늘과저당 잡힌 내일이새의 날개처럼 가벼워지는 것을알게 될 것이다.벚꽃 그늘 아래 한 며칠두근거리는 생애를 벗어놓아 보렴그리움도 서러움도 벗어놓고사랑도 미움도 벗어놓고바람처럼 잘 씻긴 알몸으로 앉아 보렴더 걸어야 닿는 집도더 부서져야 완성되는 하루도동전처럼 초조한 생각도늘 가볍기만 한 적금통장도 벗어놓고벚꽃 그늘처럼 청청하게 앉아 보렴그러면 용서할 것도 용서받을 것도 없는우리 삶벌떼 잉잉거리는 벚꽃처럼넉넉하고 싱싱해짐을 알 것이다그대, ..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 두고 가는 마음에게 - 오애순

두고 가는 마음에게- 오애순어려서는 손 붙들고 있어야따신 줄 알았는데이제는 곁에 없어도당신 계신 줄을 압니다.이제는 내게도 아랫목이 있어당신 생각만으로도온 마음이 데워지는걸낮에도 달 떠있는 걸아는 듯이 살겠습니다.그러니 가려거든 너울너울 가세요.50년 만에 훌훌 나를 내려두시고아까운 당신 수고많으셨습니다.아꼬운 당신 폭싹 속았수다.- 드라마 속 시집 (바당꽃, 2025)* 감상 : 오늘은 특별한 시 감상,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시 감상이 아니라 드라마 한 편을 감상해 보려고 합니다. 지난 3월 7일 공개되어 4주간에 걸쳐 전체 16부작이 방영되면서 장안의 뜨거운 화제가 되었던 OTT 넷플릭스 드라마 이야기입니다. 제주도의 바닷가 작은 마을에서 나고 자란 ‘오애순’과 ‘양관식’이라는 두 남녀 주인공,..

광야 - 이육사

광야- 이육사까마득한 날에하늘이 처음 열리고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모든 산맥(山脈)들이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끊임없는 광음(光陰)을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지금 눈 나리고매화(梅花) 향기 홀로 아득하니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다시 천고(千古)의 뒤에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이 광야(曠野)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여라.- 유고 시집 (범조사, 1954)* 감상 : 이육사 시인, 독립운동가, 본명은 이원록(李源祿).1904년 4월 4일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에서 퇴계 이황의 14대 직계 손으로 태어났습니다. 길지 않은 40년 일생동안 17번의 옥고를 치렀고, 44편의 시를 남겼으며, 1927년 장진홍 의사의 ..

바람의 배경 / 내가 원하는 천사 - 허연

바람의 배경- 허연마을에 바람이 심하다는 건, 또 한 명이 죽었다는 소식이다. 밀밭의 밀대들이 물결처럼 일렁거렸다는 뜻이기도 하고, 언덕 위 백 년 넘은 나무 하나가 흔들리는 밀밭을 쳐다봤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 아이 하나가 태어났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김없는 일이기도 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기도 하다. 흙먼지 일으키며 아이들은 하루에도 몇 차례 밀밭 사이를 뛰어다닌다. 아이들도 안다. 바람을 굳이 피하지 않는 법을. 마을은 죽음과 친하고 죽음이 편하다. 죽음의 배경, 그것으로 족한 마을에 오늘도 바람이 분다.- 시집 (문학과지성사, 2012) * 감상 : 허연 시인.1966년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언론학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2009년 추계예술대학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나의 침실로 - 이상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내 맘에는 나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한 자국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맨드라미, 들마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