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436

퀄트 하는 여자 / 홍매화 - 정귀매

누빔 이불 - 퀼트 하는 여자- 정귀매시간은 멈춰있고 지구는 돌아요지구를 돌리고도 남을 양의 실로여자는 이불을 꿰매지요한 땀 한 땀 광목을 누비며자전과 공전을 되풀이하는여자는 이불 속의 지구밤과 낮을 만들고겨울나무를 수놓아 계절을 짓지만시간을 재생할 수는 없어요여자는 멈춘 시간 속에 살지요여자가 묶어 놓은 매듭은 수백수천이불 속에는 풀어지지 않으려는 여자들이자신의 발을 묶어 두고이쪽 무늬에서 저쪽 무늬로 실타래를 옮겨 가지요때로는 먼 길을 걷기도서너 걸음 만에 돌아오기도 하지만멈춘 시간마다 매듭짓는 걸 잊은 적은 없어요솔기가 풀려 걸음이 가벼워지면다시 돌아와 박음질하고 가는 여자삼백예순날을 걷기만 하지요늘 같은 보폭을 유지하며밑단과 윗단을저승과 이승을 촘촘하게 오르내리는 여자스스로 옭아맨 매듭에 걸려넘어..

그리움 / 낡은 집 - 이용악

그리움- 이용악눈이 오는가 북쪽엔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험한 벼랑을 굽이굽이 돌아간백무선 철길 위에느릿느릿 밤새워 달리는화물차의 검은 지붕에연달린 산과 산 사이에너를 남기고 온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 내리는가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어쩌자고 잠을 깨어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눈이 오는가 북쪽엔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시집 (동지사, 1949), 첫 발표는 (1947년 2월)* 감상 : 이용악(李庸岳). 월북 시인. 1914년 11월 함경북도 경성에서 태어났고, 1928년 부령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 공립농업학교에 입학했으나 4학년 때 중퇴하였습니다. 두만강 인근에서 소금을 밀수하며 생계를 이어갔던 그의 부친은 시인이 어린 시절 객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 히로시마의 코오분(興文) 중학교에 편입하..

겨울나무에게 / 다시 새해의 기도 - 박화목

겨울나무에게 - 새해에 부쳐- 박화목동구 밖 외진 둔덕 겨울나무는황량한 들녘을 바라보며울고 있는가, 오늘의 아픔을쓰다듬을 길 없어 앙상한 가지부르르 떨며하늘 향해 그 어떤 애절한 호소를외치고 있는가, 겨울나무여그토록 얼룩졌던 곤욕의 나날들낙엽들 함께 어디론지 모두 떠나보내고새해 돌아왔으니 기쁜 소식 물고들까치도 날아와 마을 향해 깟 깟 깟지저귐즉 하다마는아직 삼동 내 몰아치는 차운 바람 가시잖고밤하늘의 별들도 꽁꽁 얼어붙는구나하나 오는 새봄의 소망을땅속에 묻어둘 순 없어언젠가는 새엄 돋아 다시금푸른 잎사귀들로 감싸일 것을,그 믿음으로 하여 겨울나무오늘 꿋꿋이 서 있음은......차운 바람 스치는 가지 끝에서기도의 음성을 듣네둔덕의 겨울나무여!- 시집 (창조문예사, 2003)* 감상 : 박화목 시인, 아동..

새해의 기도 - 이성선 / 새해 아침의 비나리 - 이현주

새해의 기도- 이성선새해엔 서두르지 않게 하소서.가장 맑은 눈동자로당신 가슴에서 물을 긷게 하소서.기도하는 나무가 되어새로운 몸짓의 새가 되어높이 비상하며영원을 노래하는 악기가 되게 하소서.새해엔, 아아가장 고독한 길을 가게 하소서.당신이 별 사이로 흐르는혜성으로 찬란히 뜨는 시간나는 그 하늘 아래아름다운 글을 쓰며당신에게 바치는 시집을 준비하는나날이게 하소서.- 이성선 시전집(시와시학사, 2005)* 감상 : 이성선 시인.1941년 1월 2일 강월도 고성군 토성면 성대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속초에서 초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1년 고려대학교 농과대학에 진학했으며 졸업 후 수원 농촌진흥청에 입사하여 작물 시험반에서 콩을 연구했습니다.1970년 에 ‘시인의 병풍’ 등 시 4편을 발표하면서 등단하였으며 19..

겨울 숲에서 - 안도현 / 눈보라 치는 겨울 숲에서 - 박노해

겨울 숲에서- 안도현참나무 자작나무 마른 잎사귀를 밟으며첫눈이 내립니다첫눈이 내리는 날은왠지 그대가 올 것 같아나는 겨울 숲에 한 그루 나무로 서서그대를 기다립니다그대를 알고부터나는 기다리는 일이 즐거워졌습니다이 계절에서 저 계절을 기다리는헐벗은 나무들도 모두그래서 사랑에 빠진 것이겠지요눈이 쌓일수록가지고 있던 많은 것을송두리째 버리는 숲을 보며그대를 사랑하는 동안내 마음속 헛된 욕심이며보잘것없는 지식들을내 삶의 골짜기에 퍼붓기 시작하는저 숫눈발 속에다하나 남김없이 묻어야 함을 압니다비록 가난하지만따뜻한 아궁이가 있는 사람들의 마을로내가 돌아가야 할길도 지워지고기다림으로 부르르 몸 떠는빈 겨울나무들의 숲으로그대 올 때는천지사방 가슴 벅찬폭설로 오십시오그때까지 내 할 일은머리끝까지 눈을눈사람 되어 서 있는..

사마천 / 견딜 수 없는 것 - 박경리

사마천(司馬遷)- 박경리 그대는사랑의 기억도 없을 것이다긴 낮 긴 밤을멀미같이 시간을 앓았을 것이다천형(天刑) 때문에홀로 앉아 글을 썼던 사람육체를 거세 당하고인생을 거세 당하고엉덩이 하나 놓을 자리 의지하며그대는진실을 기록하려 했는가- 시집 (솔 출판사, 1994)* 감상 : 박경리. 시인, 소설가.1926년 10월 28일(음력)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박금이’입니다. 아버지의 방랑벽 때문에 어릴 적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야 했습니다. 1946년 진주여고를 졸업한 해 중매로 일본 유학까지 갔다온 김행도와 결혼, 1남 1녀를 얻었고 인천으로 올라와 잠시 초등학교 학생을 가르치기도 하고 헌책방을 운영하기도 했지만 그만두고 현재 세종대학교의 전신인 서울 가정보육사범학교 가정과에 입학했습니다. 졸업 ..

동두천 1 / 그대는 어디서 무슨 病 깊이 들어 - 김명인

동두천 1 - 김명인 기차가 멎고 눈이 내렸다 그래 어둠 속에서번쩍이는 신호등불이 켜지자 기차는 서둘러 다시 떠나고내 급한 생각으로는 대체로 우리들도 어디론가가고 있는 중이리라 혹은 떨어져 남게 되더라도저렇게 내리면서 녹는 춘삼월 눈에 파묻혀 흐려지면서 우리가 내리는 눈일 동안만 온갖 깨끗한 생각 끝에역두(驛頭)의 저탄 더미에 떨어져몸을 버리게 되더라도배고픈 고향의 잊힌 이름들로 새삼스럽게서럽지는 않으리라 그만그만했던 아이들도미군을 따라 바다를 건너서는더는 소식조차 모르는 이 바닥에서 더러운 그리움이여 무엇이우리가 녹은 눈물이 된 뒤에도 등을 밀어캄캄한 어둠 속으로 흘러가게 하느냐바라보면 저다지 웅크린 집들조차 여기서는공중에 뜬 신기루 같은 것을발밑에서는 메마른 풀들이 서걱여 모래 소리를 낸다 그리고 덜..

제야(除夜) / 산다는 것 / 눈 - 배한조

제야(除夜) - 배한조 한밤에눈이 소복이 내렸다.그동안 있었던 모든 일이눈 속에 묻히고 세상은하얀 화선지다. 화선지 밑에는 그려진 밑그림이보일락말락 흐려지고 있다.연말 동참 모임도, 향우회 송년회도, 퇴직자 모임도, 종친회의 연말 송년회까지, 그리고오늘은 올해 마지막 새벽 수영도 끝났다. 누군가에게 준 아픔은 없었는지갚아야 할 마음의 빚은 없는지유엔난민기구에 자동이체했던기부금마저 끊고 나니 편치 않은 마음이 도사린그믐날의 밤은 깊어 가고 있다. 오늘이 지나면 또 오늘이 오고올해가 지나면 또 올해가 온다는 걸 알지만매번 그랬던 것처럼 수없이 맞는 이 마지막 밤,그려졌던 희미한 밑그림은이 마지막 밤에도 또변함없이 아쉬움으로 가득하다. 저 하얀 화선지 위에또 무엇을 그려야 할까?아니, 무엇이 그려질까? - 시..

11월의 나무 /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11월의 나무 - 황지우 11월의 나무는, 난감한 사람이머리를 득득 긁는 모습을 하고 있다아, 이 생이 마구 가렵다주민등록번호란을 쓰다가 고개를 든내가 나이에 당황하고 있을 때,환등기에서 나온 것 같은, 이상하게 밝은 햇살이일정 시대 관공서 건물 옆에서이승 쪽으로 측광(測光)을 강하게 때리고 있다11월의 나무는 그 그림자 위에가려운 자기 생을 털고 있다나이를 생각하면병원을 나와서도 병명(病名)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처럼내가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11월의 나무는그렇게 자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나는 등 뒤에서 누군가, 더 늦기 전에준비하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 시집 (문학과지성사, 1998) * 감상 :황지우(黃芝雨) 시인, 극작가.1952년 1월 25일 전라남도 해남군 북일면 신..

논개 / 봄비 - 변영로

논개 - 변영로(卞榮魯) 거룩한 분노는종교보다도 깊고불붙는 정(情)열은사랑보다도 강하다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그 물결 위에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그 마음 흘러라. 아릿답든 그 아미(娥眉)높게 흔들리우며그 석류(石榴) 속 같은 입술`죽음'을 입 맞추었네―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그 물결 위에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江)물은기리―푸르리니그대의 꽃다운 혼어이 아니 붉으랴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그 물결 위에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그 `마음' 흘러라! - 발표 (1923년 4월호)- 시집 (1924) * 감상 : 변영로(卞榮魯).시인, 수필가, 영문학자. 호(號)는 수주(樹州). 1898년 6월 7일 경기도 부천 하오정면 고리울동 강살골(현재는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고강동)에서 ..

쓸쓸한 시절 / 봄은 고양이로다 - 이장희

쓸쓸한 시절  - 이장희 어느덧 가을은 깊어들이든 뫼이든 숲이든 모다 파리해 있다 언덕 우에 오뚝히 서서개가 짖는다 날카롭게 짖는다 비 – ㄴ 들에마른 잎 태우는 연기 가늘게 가늘게 떠오른다 그대여우리들 머리 숙이고 고요히 생각할 그때가 왔다 - 합동 시집 (청구 출판사, 1951, 백기만 編著),  * 감상 : 이장희(李章熙).시인. 번역 문학가. 1900년 11월 9일 경상북도 대구에서 태어났고 1929년 11월 3일, 스물아홉 살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처음 태어났을 때 그의 이름은 ‘양희’였으나 20세가 되던 해인 1920년 4월 개명하여 호적에는 이장희(李樟熙)로 등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작품을 쓰기 시작하면서 ‘장희(章熙)로 썼는데 이것이 그의 필명(筆名)이 되고 말았습니다. 본관은 ..

문 열어라 / 영혼의 눈 - 허형만

문 열어라 - 허형만 산 설고 물설고낯도 선 땅에아버지 모셔드리고떠나온 날 밤 문 열어라 잠결에 후다닥 뛰쳐나가잠긴 문 열어제치니찬바람 온몸을 때려꼬박 뜬눈으로 날을 샌 후 문 열어라 아버님 목소리 들릴 때마다세상을 향한눈의 문을 열게 되었고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고 그러나 나도 모르게그 문 다시 닫혀졌는지어제 밤에도 문 열어라 - 시집 (문학과 지성사, 1999) * 감상 : 허형만 시인.1945년 10월 26일(음) 전라남도 순천에서 태어났습니다. 순천고등학교, 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성신여자대학교에서 국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72년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하면서 이 주최하는 현상 문예에 시 ‘제대병’이 당선되었으며, 이듬해 1973년 에 시 ‘예맞이’로 신인상에 입상되면서 작품 활..

무식한 놈 - 안도현 / 쑥부쟁이 사랑 - 정일근 / 구절초 꽃 - 김용택

​무식한 놈 - 안도현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하지 못하는 너하고 이 들길 여태 걸어 왔다니  나여, 나는 지금부터 너하고 절교다! - 시집 (창비, 1997) * 감상 : 가을이 깊어 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요즘 산책길에서 만날 수 있는 구절초와 쑥부쟁이, 그리고 개미취 등 우리가 흔히 ‘들국화’라고 뭉뚱그려 부르는 꽃을 노래한 시를 감상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들국화’라는 꽃은 사실 없습니다. 가을이 깊어 가는 이맘때쯤 산과 들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꽃이 ‘들국화’인데, 이 꽃은 국화과에 속하는 다년생 식물로 다양한 품종과 색깔, 모양 등 각기 다른 특성과 고유의 이름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들에서 피는 국화’라는 의미로 ‘들국화’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그중 가장 흔하게 만..

가을의 연가(戀歌) / 강강술래 - 이동주

가을의 연가(戀歌) - 이동주 가을은,막연한 고향에편지를 띄운다. 미웠던 사람까지도비둘기를 날려준다. 가을은,그림자는 하나지만동행들이 많다. 낙엽이 스산한 길 위에더운 꽃잎이 놓여 있고, 어둠 속하나, 둘 불을 밝힌다. 이제는알알이 구슬인 추억들... 이승에 있는 너와 나를안개로 가렸지만 손을 흔들어미소로 안녕! 가을에 속이 떨림은인정에 주려서다.진실로,바람이 차면 이웃을 청한다.(대한일보, 1965.10.26.) - 시선집 (현대문학, 2010) * 감상 : 이동주 시인. 호는 심호(心湖).1920년 2월 28일 전남 해남군 현산면 읍호리에서 1남 2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부친의 방탕한 생활, 가문의 몰락, 그리고 외가인 공주로 보내져 그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며 어머니의 희생과 비극적인 가족의..

홀로 울게 하소서 / 그래도 봄을 믿어 봐 - 김형영

홀로 울게 하소서 - 김형영 저승길이 벌써 지난 듯하여날마다 사는 게 부끄러운데어디를 가나융숭한 대접만 받으니이대로 죽으면하늘나라 못 가겠기에유명해지려고잊혀지지 않으려고외로움을 이기려고이리저리 어울리다가눈곱만큼도하늘엔 쌓은 것 없어이제는 사는 것보다죽기가 더 두려웁기에오늘은내 한 생의 문 걸어 잠그고맨바닥에 엎드리오니홀로 울게 하소서 - 시집 (열림원, 2000) * 감상 : 김형영 시인.1944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으며 지난 2021년 2월 15일 숙환으로 별세, 향년 77세.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서 소설가 김동리, 시인 서정주, 박목월, 김수영으로부터 시를 사사(師事)하였습니다. 1966년 신인상을, 그리고 1967년 문공부 신인 예술상을 수상하면서 문단에 나왔습니다. 강은교, 박건한, 석지..

호객 / 흐르는 강물처럼 / 글싹 - 박철

호객 - 박철 서삼릉 보리밥집은 이름난 식당사촌과 점심을 먹고 서삼릉 길을 걸었다서삼릉 곁에 종마장 시민에게 개방했다는데 인적은 전혀 없고입구 관리인이 여기도 걷기 좋습니다~ 하고허공에 소리를 지른다 그 소리가 산자락에 아득하고 여간 무안하여무인도 같은 종마장 안으로 들어섰다 세상 덧없이 조용한 가을날울타리 너머 늙은 종마들의 생각은 알 수가 없고새로 도배한 하늘 아래 자다 깨듯 가끔 말 꼬리를 흔드는데내 생각도 일체 따라 걸었다 - 시집 (문학동네, 2024) * 감상 : 박철 시인.1960년 1월, 서울 강서구 개화동(당시에는 김포)에서 태어났습니다. 성남고와 단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1987년 에 ‘김포’외 14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또 1997년 에 단편 ‘조국에..

나무 - 성범영 / 해거리 - 박노해

나무 - 성범영 나무는오늘도 내일도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있구나. 나무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잎을 내고 떨구고 하며일을 잘도 알아서 하는구나. 나무는보여 달라고 하지 않아도꼭 제때에 꽃을 피우고열매를 우리에게 돌려주는구나. 나무는오늘도 내일도변함없이 무럭무럭잘도 자라주는구나. - 에세이집 (생각하는 정원, 2014)  * 감상 : 성범영.1937년 1월, 경기도 용인군 수지에서 태어났습니다. 현재 제주도 한경면에서 잘 가꿔진 분재 정원, ‘생각하는 정원’을 만들어 나무를 가꾸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87세 할아버지지만 아직도 에너지 넘치고 생각하는 힘이 ‘청년의 그것보다 더 젊은’ 청년 같은 분이십니다. 지난해 가을 배를 타고 마라도를 가기로 한 날, 하필 비바람으로 풍랑주의보가 발효되면서 발이 묶여 예약해 ..

가을이 왔다 우리 사랑을 하자 - 용혜원

가을이 왔다 우리 사랑을 하자  - 용혜원 가을이 왔다우리 사랑을 하자 모든 잎사귀들이 물드는 이 계절에우리도 사랑이라는 물감에물들어보자곧 겨울이 올 텐데우리 따뜻한 사랑을 하자 모두들 떠나고 싶다고외치는 것은고독하다는 증거이다 이 가을에고독을 깨뜨리기보다고독을 누리고 고독을 즐기고 싶다 가을이 왔다우리 사랑을 하자모든 들판에 익어가는 곡식들과열매들도 거둘 때가 되었다 살아오는 동안 표현하지못했던 마음을이 순간만큼은 마음껏 나타내 보자 모든 것들이 떠나가고모든 것들이 잊혀지는데우리 가을이 머무는 동안에언제나 가슴속에 간직해도 좋을멋진 사랑을 하자 이 가을에 - 시집 (책만드는집, 2008) * 감상 : 용혜원 시인.1952년 2월12일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성결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1992년 황금찬..

한점 해봐, 언니 - 김언희

한점 해봐, 언니  — 김언희  한점 해봐, 언니, 고등어회는 여기가 아니고는 못 먹어, 산 놈도 썩거든, 퍼덩퍼덩 살아 있어도 썩는 게 고등어야, 언니, 살이 깊어 그래, 사람도 그렇더라, 언니,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어도 썩는 게 사람이더라, 나도 내 살 썩는 냄새에 미쳐, 언니, 이불 속 내 가랑이 냄새에 미쳐, 마스크 속 내 입 냄새에 아주 미쳐, 언니, 그 냄샐 잊으려고 남의 살에 살을 섞어도 봤어, 이 살 저 살 냄새만 맡아도 살 것 같던 살이 냄새만 맡아도 돌 것 같은 살이 되는 건 금세 금방이더라, 온 김에 맛이나 한번 봐, 봐, 지금 딱 한철이야, 언니, 지금 아님 평생 먹기 힘들어, 왜 그러고 섰어, 언니, 여태 설탕만 먹고 살았어? - 시집 〈보고 싶은 오빠〉(창비, 2016) *..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 연제진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 연제진 가식은 허세를 낳고 번민을 키운다간절해야 명약을 찾을 수 있다 약점을 숨긴다고 완벽할 수는 없는 법용기는 머뭇거리는 것이 질색이다 사람들은 사실 남의 단점을 잘 모른다아니 모른척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약점을 감추기보다 드러내는 편이 숫제 낫다털어놓고 나면 단점이 곧 결점은 아닐 수 있다 빈틈이 있는 곳이라야 햇빛이 찾아 든다드러내고 빛을 받는 순간 치유가 된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어’고백한 후에 들을 수 있는 정겨운 말이다 간 데 없는 그루박던 두려움이제 홀가분한 기분이 들 것이다 망설임이 없는 그대를 위하여나마스테* * 당신에게 고개를 숙인다 즉, 당신을 가능케 한 모든 것을 경배한다는 뜻의 인도 인사말  - 시집 (가온, 2020) * 감상 : 연제진 시인. 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