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397

순간은 막 열린 영원 / 피고 지는 일 - 허향숙

순간은 막 열린 영원 - 허향숙 오지 않은 시간 속무수한 첫들이 머언 기억 속한 톨의 씨로 있음을 본다 순간은 첫의 꽃이자영원의 꽃이다 - 시집 (천년의 시작, 2024) * 감상 : 허향숙 시인.1965년 충남 당진에서 태어났습니다. 2018년 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백강문학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현재 시낭송과 스피치를 가르치고 있으며 시 낭송가와 MC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시집으로 (천년의 시작, 2021), (천년의 시작, 2024) 등과 전자 소시집 가 있습니다. 허향숙 시인의 시는 ‘아침에 읽는 한 편의 시’에서 그동안 두세 차례 소개했던 적이 있습니다. 특히 3년 전, 그녀의 첫 시집에 실린 시 두 편을 소개하면서, 딸을 먼저 저세상으로 보낸 어..

언제 한번 / 멀고 먼 절반 - 황형철

언제 한번 - 황형철 언제 한번 밥이나 먹자고 언제 한번 바람이나 쐬러 가자고 사는 게 답답하니 무심히 꺼낸 것 같지만 실은 깊숙한 데서 나온 진정을 알아서 꼭 빈발은 아니어서 나는 언제 한번을 사랑하지 허기 채울 밥도 한번 먼 여행도 한번 언제 한번이 열 번 백 번이 되어 우리는 열 배 백 배 멀리 갈 수 있지 언제 한번은 구두계약이기도 해서 법적인 효력을 지니고 가슴에 빨갛게 찍은 지장이고 김치찌개가 맛있는 단골집 이모와 함께 들었던 흰수염고래도 그날 밤 물병자리도 분명히 알고 있어 언제 한번은 먼 후일의 사소함 같지만 시간이 무한히 펼쳐져 있어서 지워진 길을 내고 하늘도 열어서 포도알처럼 파랗게 구르는 말 언제 한번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지 - 시집 (시인의 일요일, 2024.1) * 감상 : 황형..

토끼풀꽃 / 복숭아밭 - 남대희

토끼풀꽃 - 남대희 어제저녁 친정 간다고 나간 아내가아침 산책길 잔디밭 모퉁이에 앉아 있다재주도 없는 내게 시집와서 행여나꽃밭에라도 앉아 볼까 했을 텐데평생을 잡풀 속에서 하얗게 늙었다그래도 아들딸 낳고 양지바른 곳에자리 하나 장만했으니 행복이란다내겐 둘도 없는 행운인데 - 시집 (도서 출판 움, 2023) * 감상 : 남대희 시인.경남 밀양에서 태어났고 2011년 월간 로 등단하였으며, 시집으로 (도서 출판 움, 2015), (도서출판 움, 2023) 등이 있습니다. 2024년 1월, 신춘문예 디카시 부문에서 당선되었습니다. 오늘 감상하는 시는 전철을 타기 위해서 연신내역 플랫폼에 들어서면 ‘클로버꽃’이라는 제목으로 만날 수 있는 시입니다. 처음 이 시를 읽고는 그저..

봄비 / 동백꽃 - 이수복

봄비 - 이수복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푸르른 보리밭 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그러질 고운 꽃밭 속 처녀 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과 같이 땅에선 아지랑이 타오르것다. - (1955.6) - 시집 (현대문학, 1968) * 감상 : 이수복 시인. 1924년 4월 16일, 전라남도 함평군 함평면 장교리 산음마을에서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목포 문태중학교를 졸업하고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전신전화국을 다니면서 독학으로 1946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예과부에 들어가 수료하였고, 국문학과에 들어갔으나 3학년이 되기 전인 1950년 돌연 낙향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김영삼 대통령과는 문리과대학..

연두의 회유 / 초록을 말하다 - 조용미

연두의 회유 - 조용미 당신과 함께 연두를 편애하고 해석하고 평정하고 회유하고 연민하는 봄이다 물에 비친 왕버들 새순의 연둣빛과 가지를 드리운 새초록의 찰나 당신은 연두의 반란이라 하고 나는 연두의 찬란이라 했다 당신은 연두의 유혹이라 하고 나는 연두의 확장이라 했다 당신은 연두의 경제라 하고 나는 연두의 해법이라 했다 여러 봄을 통과하며 내가 천천히 쓰다듬었던 서러운 빛들은 옅어지고 깊어지고 어른어른 흩어졌는데 내가 아는 연두의 습관 연두의 경계 연두의 찬란을 목도한 순간, 연두는 물이라는 목책을 둘렀다 저수지는 연두의 결계지였구나 당신과 함께 초록을 논하는 이생이 당신과 나의 전생이 아닌지도 모른다 - (2018년 5월호) - 시집 (문학과지성사, 2020) * 감상 : 조용미 시인. 1962년 11..

화학 선생님 / 그건 세 글자다 - 정양

화학 선생님 - 정양 중간고사 화학시험은 문항 50개가 전부 ○X 문제였다 선생님은 답안지를 들고 와서 수업시간에 번호순으로 채점결과를 발표하셨다 기다리지도 않은 내 차례가 됐을 때 “아니 이 녀석은 전부 X를 쳤네, 이 세상에는 옳은 일보다 그른 일이 많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제대로 채점하면 60점인데 기분 좋아서 100점” 그러시고는 다음 차례 점수를 매기셨다 모두들 선생님의 장난말인 줄로만 여겼는데 며칠 뒤에 나온 내 성적표에는 화학과목이 정말로 100점으로 적혔다 백발성성한 지금도 그 점수를 믿지 않지만 이 세상에는 세월이 흐를수록 그른 일들이 옳은 일보다 많아지는 것도 나는 아직 믿지 않을 수가 없다 - 시집 (모악, 2016) * 감상 : 정양 시인. 1942년 1월 17일, 전북 김제읍 신..

걸어보지 못한 길 - 로버트 프로스트

걸어보지 못한 길 - 로버트 프로스트(정현종 역) 단풍 든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더군요. 몸이 하나니 두 길을 다 가 볼 수는 없어 나는 서운한 마음으로 한참 서서 잣나무 숲속으로 접어든 한쪽 길을 끝 간 데까지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또 하나의 길을 택했습니다. 먼저 길과 똑같이 아름답고, 아마 더 나은 듯도 했지요. 풀이 더 무성하고 사람을 부르는 듯했으니까요. 사람이 밟은 흔적은 먼저 길과 비슷하기는 했지만, 서리 내린 낙엽 위에는 아무 발자국도 없고 두 길은 그날 아침 똑같이 놓여 있었습니다. 아, 먼저 길은 다른 날 걸어보리라! 생각했지요. 인생길이 한번 가면 어떤지 알고 있으니 다시 보기 어려우리라 여기면서도.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 나는 한숨 지으며 이야기하겠지요. "두 갈래 길이 숲속으..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 꽃 -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는 3월(三月)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靜脈)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靜脈)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3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 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 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1969) 시집 (지식산업사, 1983) 시집 (답게, 2000) * 감상 : 김춘수 시인. 1922년 11월, 경상남도 통영에서 태어났으며 2004년 11월 82세의 나이로 별세하였습니다. 1935년 통영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 공립제일고등 보통학교(현재..

산을 오르다가 / 독백 - 이재무

산을 오르다가 - 이재무 한 무더기 꽃마리 보았네 바람이 불 때마다 산을 흔들고 있었네 지상에 피어난 푸른 별들 꺾고 싶었지만 뿌리째 정원으로 옮겨 오고 싶었지만 애써 욕망을 누르고 비웠네 태어나 자란 곳에서 살다가 죽는 것은 그들의 권리라네 사랑은 소유하지 않는 것 존재를 지켜 주는 것 찾아가 바라보는 것 언제든 보고 싶을 때 산을 오르면 한 무더기 꽃마리가 있다네 - 시집 (천년의 시작, 2024) * 감상 : 이재무 시인. 1958년 충남 부여에서 출생했습니다. 한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동국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했고 1983년 , , 등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시집으로 (청사, 1987), (문학과지성사, 1990), (실천문학사, 1992), (창작과비평..

벼랑의 나무 - 안상학 / 벼랑의 나무들 - 도종환

벼랑의 나무 - 안상학 숱한 봄 꽃잎 떨궈 깊이도 쟀다 하 많은 가을 마른 잎 날려 가는 곳도 알았다 머리도 풀어 헤쳤고 그 어느 손도 다 뿌리쳤으니 사뿐 뛰어내리기만 하면 된다 이제 신발만 벗으면 홀가분할 것이다 -시집 (실천문학사, 2014년 6월) * 감상 : 안상학 시인. 1962년 6월,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습니다. 1988년 신춘문예에서 시 ‘1987년 11월의 新川’이 당선되어 등단하였습니다. 첫 시집으로 (한길사, 1991)를 냈고, (실천문학, 1999), (천년의시작, 2003), (애지, 2008), (실천문학, 2014), (2020), 그리고 한영대역 시선집 (아시아, 2018)과 동시집 (창비, 2018), 인물 평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4), 서화집 (실천문학사, 20..

빈등貧燈에게 - 정공채 / 한 잔 술 - 공초 오상순

빈등(貧燈)에게 - 정공채 누가 한 잔 술에 눈물 난다고 했지 어두운 귀로(歸路)에 발걸음이 무거운 사람 산번지(山番地) 높은 달동네 외등. 몇 번씩이고 숨차고 몇 갈래이고 모퉁이 길을 돌아 오르는 사설(辭說)도 다 지워진 바람의 언저리 길 외등 또 하나 고맙네. 몹시 추운 겨울 밤중에도 떨면서 불 켜고 혼자 저립(佇立)한 이 외등. 아, 고맙고 고맙네 한 잔 술에도 눈물 난다 하였거늘...... - 육필 시선집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2) * 감상 : 정공채 시인. 호는 성촌(星村). 1934년 12월, 경남 하동군 고전면 성평리에서 태어났고 2008년 4월 30일 폐암으로 향년 74세의 일기로 타계하였습니다. 진주 농고를 거쳐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1957년에 졸업하였으며, 1957년 에 시..

돌아가셨다는 말 - 황유원

돌아가셨다는 말 - 황유원 참 좋다 주위를 둘러보면 돌아갈 곳 없는 사람들 천지이지만 돌아갈 곳 아무 데도 없어도 집도 절도 없어도 돌아가고 나면 돌아가셨습니다, 라고 한다는거 누구나 결국 돌아가고 누구나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거 어디로 돌아갔는진 모르겠지만 흔히들 하는 말처럼 그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 버렸는지도 모르겠지만 생각해 보면 지난 몇 년 사이에만 해도 정말 다들 돌아가셨다는 거 말은 가끔 씨가 되고 돌아가시다, 라는 말이 있어 우리 모두 돌아갈 곳 생긴다는 거 참 좋다 늦은 밤 장례식장 갔다 돌아와도 도무지 돌아온 것 같지 않은 기분인 그런 날 돌아가셨습니다, 라는 말의 씨에서 싹이 돋아나 흙을 뚫고 청청하게 솟아오르는 상상에 젖다보면 어느새 세상모르고 다들 잠들어 있다는 거 - 시집 (..

겨울 산책 - 주응규

겨울 산책 - 주응규 머리맡의 얼어버린 자리끼같이 천지간이 정적에 잠겼다가 쩡쩡 갈라지는 겨울 속을 걷는다 뭇발길에 비켜선 먼 산자락 절벽에 뿌리내린 노송은 잔솔가지에 백화(白花)를 난만히 피운 채 의연한 기백이 푸르르다 고드름같이 하얗게 날이 선 창백한 햇살을 흠빨며 근근이 목숨 줄을 부지하는 무수한 생명이 실살스레 봄을 피우기에 분주하다 자연의 맥박이 쉼 없이 고동쳐 분홍 꿈을 시나브로 투영하는 삶은 한겨울 날의 산책 같다 - 시집 (시음사, 2021) * 감상 : 주응규 시인. 호는 허천(虛天). 경북 울진 태생으로 2011년 을 통해 시와 수필로 등단,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시집으로 (시음, 2013), (아토즈에듀, 2014), (시음, 2015), (시음, 2021) 등이 있으며, 수필..

늪의 내간체를 얻다 / 서랍을 가지게 되었다 - 송재학

늪의 내간체(內簡體)를 얻다 - 송재학 너가 인편으로 붓틴 보자(褓子)에는 늪의 새녘만 챙긴 것이 아니다 새털 ᄆᆞᄃᆞᆸ을 플자 믈 우에 누웠던 항라(亢羅) 하ᄂᆞᆯ도 한 웅큼, 되새 떼들이 방금 ᄇᆞᆲ고간 발자곡도 구석에 꼭두서니로 염색되어 잇다 수면의 믈거울을 걷어낸 보자(褓子) 솝은 흰 낟달이 아니라도 문자향이더라 ᄇᆞ람을 떠내자 수생의 초록이 눈엽처럼 하늘거렸네 보자(褓子)와 매ᄃᆞᆸ은 초록동색이라지만 초록은 순순히 결을 허락해 머구리밥 ᄉᆞ이 너 과두체 내간(內簡)을 챙겼지 도근도근 매ᄃᆞᆸ도 안감도 대되 운문보(雲紋褓) 몇 점 구ᄅᆞᆷ에 마ᄋᆞᆷ 적었구나 ᄒᆞᆫ 소솜에 유금(游禽)이 적신 믈방올들 내 손등에 미끄러지길래 부르르 소름 돋았다 그만ᄒᆞᆫ 고요의 눈띠를 보니 너 담담한 줄 짐작하겠다..

김포행 막차 /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 박철

김포행 막차 - 박철 그대를 골목 끝 어둠 속으로 보내고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의롭지 못한 만큼을 걷다가 기쁘지 아니한 시간만큼을 울다가 슬프지 아니한 시간만큼을 취하여 흔들거리며 가는 김포행 막차에는 손님이 없습니다 멀리 비행장 수은등만이 벌판 바람을 몰고와 이렇게 얘기합니다 먼 훗날 아직도 그대 진정 사람이 그리웁거든 어둠 속 벌판을 달리는 김포행 막차의 운전수 양반 흔들리는 뒷모습을 생각하라고. - 시집 (창비, 1989) * 감상 : 박철 시인. 1960년 1월, 서울 강서구 개화동(당시에는 김포)에서 태어났습니다. 성남고와 단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1987년 에 ‘김포’외 14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또 1997년 에 단편 ‘조국에 드리는 탑’이 추천되면서 소..

그대 앞에 봄이 있다 - 김종해

유럽의 코페르니쿠스 기상변동 서비스와 미국 해양기상청이 12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174년 지구 기상관측사상 2023년이 가장 더웠던 해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 기상관측 기관은 올해는 작년보다 더 더울 것이라는 일년 예상을 발표했다고 하네요. 원인은 엘리뇨 현상. 난 더운 게 싫은데, 걱정이 되네요. 이번 주 한 주간의 일기예보를 보니 19일 금요일 쯤에 전국적으로 눈이나 비가 한 차례 내리고, 비가 온 뒤에는 극한의 겨울 한파가 또 한 차례 몰려와 다음 주 중반까지 계속될 것이라 합니다. 그러나 밤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운 것처럼 추운 겨울이지만 얼음 아래에선 이미 봄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집 바로 뒤, 북한산 산책길 옆에 서 있는 시입니다. 이곳으로 이사 온 후 배드민턴 운동을 하지 않는 날..

강물이 될 때까지 - 신대철

강물이 될 때까지 - 신대철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에 흐린 강물이 흐른다면 흐린 강물이 되어 건너야 하리 디딤돌을 놓고 건너려거든 뒤를 돌아보지 말 일이다 디딤돌은 온데간데없고 바라볼수록 강폭은 넓어진다 우리가 우리의 땅을 벗어날 수 없고 흐린 강물이 될 수 없다면 우리가 만난 사람은 사람이 아니고 사람이 아니고 디딤돌이다 - 시집 (문학과 지성사, 1977) * 감상 : 신대철 시인. 1945년 충남 홍성에서 출생하였고 청양에서 성장했습니다. 공주사대부고와 연세대 국문과, 동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 국민대 교수로 30년을 재직하다가 지난 2010년 정년퇴직하였으며 현재 명예교수로 있습니다. 1968년 ‘강설의 아침에서 해빙의 저녁까지’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그는 이후 왕성한 시작 활동을 벌이면서..

마지막 첫눈 / 겨울 소년 - 정호승

마지막 첫눈 - 정호승 마지막 첫눈을 기다린다 플라타너스 한 그루 옷을 벗고 서 있는 커피전문점 흐린 창가에 앉아 모든 기다림을 기다리지 않기로 하고 마지막 첫눈이 오기를 기다린다 첫눈은 내리지 않는다 이제 기다린다고 해서 첫눈은 내리지 않는다 내가 첫눈이 되어 내려야 한다 첫눈으로 내려야 할 가난한 사람들이 배고파 걸어가는 저 거리에 내가 첫눈이 되어 펑펑 쏟아져야 한다 오늘도 서울역에서 혼자 걸었다 돌아오는 길에 명동성당에 종소리가 들렸다 땅에는 저녁별들이 눈물이 되어 굴러다니고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을 버릴 수 없어 나는 오늘도 그의 제자가 될 수 없었다 별들이 첫눈으로 내린다 가장 빛날 때가 가장 침묵할 때이던 별들이 드디어 마지막 첫눈으로 내린다 커피전문점 어두운 창가에 앉아 다시 찾아올 성자를 ..

겁 / 1월 1일 - 이영광

겁 - 이영광 먼 곳에 슬픈 일 있어 힘없는 원주 토지문화관의 저녁이다 속 채우러 왔다, 슬리퍼 끌고 해장국이 나오길 기다리며 신문을 뒤적이다 누군가의 소식을 읽고, 아? 이 사람 아직 살아 있었구나! 놀라고 다행스러워하는 마음이 된다 허기가 힘을 내는 것이 우습다가 문득 또, 누군가 내 소식을 우연히 듣고 아? 그 사람 아직 살아 있었구나, 놀라길 바라는 실없는 마음이 돼본다 다행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그만한 용기는 없다 허기는 아무래도 쓸쓸한 힘, 뭘 바라지 못하는 순간이 좋다 밥보다도 더 자주 먹는 이 겁에 의해, 오늘도 무사하지 않았느냐고 무사한 사람, 무사한 사람, 중얼거렸다 겁도 없이 중얼거렸다 - 시집 (문학과지성, 2018) * 감상 : 이영광 시인. 1965년 경북 의성군 단촌면 병방리, ..

늙음 / 특이 체질 - 최영철

늙음 - 최영철 늘 그럼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 늘 그럼그럼 어깨를 토닥여 주는 것 늘 그렁 눈에 밟히는 것 늘 그렁 눈가에 맺힌 이슬 같은 것 늘 그걸 넘지 않으려 조심하는 것 늘 그걸 넘지 않아도 마음이 흡족한 것 늘 거기 지워진 금을 다시 그려 넣는 것 늘 거기 가버린 것들 손꼽아 기다리는 것 늘 그만큼 가득한 것 늘 그만큼 궁금하여 멀리 내다보는 것 늘 그럼그럼 늘 그렁그렁 - 시집 (문학과지성사, 2010) * 감상 : 최영철 시인. 1956년 경상남도 창녕군 남지읍에서 태어났고 부산에서 성장하였습니다. 이십 대 초반부터 또래들과 시 동인지를 낼 정도로 열심 있는 문학청년이었던 최 시인은 그때 지금의 아내를 만났습니다. 1984년 무크 [지평], [현실시각]에 시를 발표했고 1986년 한국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