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나의 침실로 - 이상화

석전碩田,제임스 2025. 3. 12. 06:00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나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국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 잡지 <개벽 70호>(1926. 6)

* 감상 : 이상화 시인.

1901년 4월 5일, 대구시 중구 서문로(경상북도 대구부 중구역 서문로 12번지)에서 아버지 이시우와 어머니 김신자 사이의 4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대구 대륜 중고등학교의 전신인 우현학교(교남학교)를 설립 운영한 대구에서는 명문가 부잣집이었습니다. 이상화는 8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의 큰아버지인 이일우에 의해 양육되었습니다. 경성 중앙학교(현 서울 중앙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1918년 봄 중퇴하였으며 1919년 대구에서 3.1 만세운동 거사를 모의하다가 적발되어 피신하기도 했습니다.

의 동향 친구인 소설가 현진건의 소개로 1922년 <백조> 창간호에 ‘말세의 희탄(欷嘆)’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그해 파리 유학을 목적으로 일본 동경의 프랑스 어학원에서 2년간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였는데, 이때 국내 잡지사에 시뿐 아니라 평론, 소설 번역, 컬럼과 다양한 글들을 발표하였습니다. 1925년 8월, 카프(KAPF :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1933년 교남학교(대륜고) 교사로 근무하며 조선어와 영어, 작문을 가르치기도 했으며 1937년 교남학교의 교가를 작사했습니다.

1940년 말 교남학교 교사직을 그만두고 계산동 84번지에 집을 마련하여 그곳에서 주로 생활하며 독서와 연구에 몰두하였는데, 춘향전을 영어로 번역하고, 한국 문학사와 불란서시정석 등을 한글로 번역하는 것을 시도하였으나 완성하지는 못했습니다. 1943년 봄, 위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가 4월 25일 대구 자택에서 43세의 젊은 나이로 타계하였습니다. 계산동에 있는 그의 고택 마루에는 시인의 네 형제를 일컫는 ‘용봉인학(龍鳳麟鶴)이란 액자가 걸려 있는데, 첫째 형 이상정은 용(龍)으로 독립군 대장, 둘째 봉(鳳)은 이상화 시인, 셋째 인(麟,기린) 이상백은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 넷째 학(鶴) 이상오는 정통 수렵가이자 바둑 유단자였습니다.

전에 출간된 시집은 없으며 사후인 1951년, 백기만이 청구출판사에서 펴낸 <상화와 고월>에 시 16편이 실렸고, 이기철 편 <이상화 전집>(문장사, 1982)과 김학동 편 <이상화 전집>(새문사, 1987), 대구 문인협회 편 <이상화 전집>(그루, 1998) 등 세 권의 전집에 그의 시 60여 편이 실려 전해오고 있습니다. 대표작은 오늘 감상하는 <빼앗길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나의 침실로>입니다. 그는 자신의 본명인 ‘상화(相和)’ 대신에 호(號)로 ‘상화(尙火)’나 ‘상화(想華)’를 주로 사용했는데, 자신의 유일한 시 원고는 압수당하고 누가 출판하겠다고 가져가서는 분실되고, 자신은 도망자 신세가 되고 체포당하고 고문당하고, 조국을 잃은 슬픔과 비애 때문에 그의 마음은 항상 울분에 차 있었으니 이름에서도 '항상 불같았음‘을 나타내고 싶었던 듯합니다.

등학교 재학 시절,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하노라. 차(此)로써 세계만방(世界萬邦)에 고(告)하야 인류평등(人類平等)의 대의(大義)를 극명(克明)하며 차(此)로써 자손만대(子孫萬代)에 고(誥)하야 민족자존(民族自存)의 정권(政權)을 영유(永有)케 하노라.”로 시작하는 ‘기미 독립선언문’을 줄줄이 외웠던 기억이 납니다. 마지막 공약삼장(公約三章)까지 리듬을 살려 암송하고 나면 이내 이 선언문과 함께 반드시 암송해야 했던 시가 바로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몸은 오는가’였습니다. 그래서인지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그저 입에서 흥얼거려질 정도로 생각나는 시이기도 합니다.

1926년 <개벽(開闢)>에 발표된 이 시는 시인의 반일 민족의식이 잘 드러나면서 조국의 땅을 아름다운 여성으로 비유하며 애틋하게 그 슬픔을 토로한 시로 유명합니다. 비록 나라는 빼앗겼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민족혼을 불러일으킬 봄마저 빼앗길 수 없다는 처절한 몸부림, 그리고 민족의 비애와 일제에 대한 강력한 저항 의식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습니다.

앗긴 들에도 봄은 오고, 그 오는 봄은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다는 강한 부정이 ‘무기력한 설움과 절망감’과 교차 되어 더 애절하게 느껴져 옵니다. 시인은 우리의 땅 위에 바야흐로 천지 만물을 들썩이게 하는 봄의 '신령'과 봄의 '풋내', 그리고 봄의 '푸른 웃음'이 충만하다는 것을 노래하면서 그 푸른 웃음은 결코 빼앗기지 않으리라 절규하고 있습니다. 현실의 봄은 암울함 그 자체이지만, 지금 ‘온몸에 햇살을 받고’ 꿈틀거리는 이 땅, 이 들 위에 솟구쳐 오르는 ‘신령과 풋내’가 충만합니다. 이 두 대비되는 두 봄 사이를, 시인은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고 노래했는데, 그 시적 은유가 참으로 처절하게 다가옵니다.

문호 괴테가 이탈리아 로마에서 거리를 걸어가면서 목격했던 장면입니다. 한 무리의 눈먼 걸인들 옆을 지나가는데, 그 걸인들 대부분은 행인들로부터 거의 적선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유독 한 걸인만이 행인들로부터 꾸준히 적선을 받고 있는 것이 괴테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유가 뭘까. 괴테가 그 걸인에게 다가가 보니, 그는 다음과 같은 글이 씌여진 플래카드를 몸에 걸고 있었습니다.

“봄이 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에피소드는 꽤 많이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비슷비슷한 이야기들이 다양한 버전으로 전해지고 있고 또 다양한 적용으로 풀이되기도 합니다. 대문호 괴테가 진짜 겪은 일인지 아닌지 그것도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문장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봄’이라는 계절의 상징성과 그것에 대비되는 현실에서의 암울함을 너무도 극명하게 잘 대비시켰기 때문이 아닐까.

찬가지로, 이상화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너무도 비감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새 생명과 소생, 그리고 부활과 소망으로 상징되는 봄이 왔건만, 정작 나의 조국은 나라 잃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기에, 그 극명한 대비를 시적 은유로 삼아 노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의 첫 연에서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고 포효하듯 내뱉은 감탄 의문에 화답하는 마지막 연,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로 한탄하는 현실 인식은, 절망적 탄식임과 동시에 치열한 저항 정신을 드러내는 은유적 장치임에 틀림없습니다.

인이 타계하고 5년 후인 1948년, 대구 달성 공원에는 해방 후 우리나라 최초의 시비(詩碑)인 ‘상화시비(尙火詩碑)’가 세워졌는데 시비에는 그의 대표작 ‘나의 침실로’ 일부가 새겨져 있습니다. 초창기 그가 백조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서정성 짙고 탐미적 경향의 시를 쓸 때 썼던 시 ‘나의 침실로’를 감상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나의 침실로

- 이상화

「마돈나」 지금은 밤도 모든 목거지에 다니노라 피곤(疲困)하여 돌아가려는도다.
아, 너도 먼동이 트기 전으로 수밀도(水蜜桃)의 네 가슴에 이슬이 맺도록 달려오너라.

「마돈나」 오려무나. 네 집에서 눈으로 유전(遺傳)하던 진주(眞珠)는 다 두고 몸만 오너라.
빨리 가자. 우리는 밝음이 오면 어딘지도 모르게 숨는 두 별이어라.

「마돈나」 구석지고도 어둔 마음의 거리에서 나는 두려워 떨며 기다리노라.
아, 어느덧 첫닭이 울고– 뭇개가 짖도다. 나의 아씨여. 너도 듣느냐.

「마돈나」 지난밤이 새도록 내 손수 닦아 둔 침실(寢室)로 가자. 침실(寢室)로!
낡은 달은 빠지려는데, 내 귀가 듣는 발자국 - 오, 너의 것이냐?

「마돈나」 짧은 심지를 더우잡고, 눈물도 없이 하소연하는 내 맘의 촛(燭)불을 봐라.
양(羊)털 같은 바람결에도 질식(窒息)이 되어 얕푸른 연기로 꺼지려는도다.

「마돈나」 오너라 가자. 앞산 그리메가 도깨비처럼 발도 없이 이곳 가까이 오도다.
아, 행여나 누가 볼는지- 가슴이 뛰누나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

「마돈나」 날이 새련다 빨리 오려무나. 사원(寺院)의 쇠북이 우리를 비웃기 전에
네 손이 내 목을 안아라. 우리도 이 밤과 같이 오랜 나라로 가고 말자.

「마돈나」 뉘우침과 두려움의 외나무다리 건너 있는 내 침실(寢室) 열 이도 없느니!
아, 바람이 불도다. 그와 같이 가볍게 오려무나 나의 아씨여, 네가 오느냐?

「마돈나」 가엾어라. 나는 미치고 말았는가. 없는 소리를 내 귀가 들음은 -
내 몸에 파란 피- 가슴의 샘이 말라 버린 듯 마음과 목이 타려는도다.

「마돈나」 언젠들 안 갈 수 있으랴. 갈 테면 우리가 가자. 끄을려 가지 말고!
너는 내 말을 믿는「마리아」- 내 침실(寢室)이 부활(復活)의 동굴(洞窟)임을 네야 알련만 …….

「마돈나」 밤이 주는 꿈, 우리가 얽는 꿈. 사람이 안고 뒹구는 목숨의 꿈이 다르지 않으니.
아, 어린애 가슴처럼 세월(歲月)모르는 나의 침실(寢室)로 가자. 아름답고 오랜 거기로.

「마돈나」 별들의 웃음도 흐려지려 하고, 어둔 밤 물결도 잦아지려는도다.
아, 안개가 사라지기 전으로 네가 와야지,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

 

* 마돈나 : 이 시에서의 ‘마돈나’는 성모 마리아일 수도 있고, 화자가 사랑하는 젊은 여성 또는 조국을 상징할 수도 있다. 여기서 ‘마돈나’의 공통된 의미는 ‘구원의 여성’으로 표상된 점이다.
* 수밀도(水蜜桃) : 수분이 가득 들어찬 복숭아
* 목거지 : ‘모꼬지’의 사투리. 여러 사람이 놀거나 잔치 등에 모이는 일
* 더우잡고 : ‘더위잡고’의 사투리. 높은 데에 오르려고 무엇을 끌어 잡고
* 그리매 : 그림자
* 부활 : 다시 살아남. 여기서는 새로운 희망의 잉태를 뜻함
* 궁구는 : ‘뒹구는’의 사투리


- 잡지 <백조 3호>(1923.9)

나브로 봄이 우리 곁에 다가와 있지만 꽁꽁 얼어붙은 현실은 우리를 더욱 춥고 암울하게 합니다. 시인이 살았던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는 듯합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