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닭
- 윤희상
큰 누님이 결혼한다고 도배하는 날,
방안의 장롱을 마당으로 꺼내 놓았다
그래서, 마당에서 놀던 장닭과
장롱 거울 속의 장닭이 만났다
한쪽에서 웃으면, 다른 한쪽에서 웃고
한쪽에서 폼을 잡으면, 다른 한쪽에서 폼을 잡고
한쪽에서 노래를 하면, 다른 한쪽에서 노래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장닭이 장닭에게 덤벼들었다
서로 싸웠다
놀란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췄다
누가 먼저 덤벼들었는지 모른다
다행히 장닭은 크게 다치지 않았다
거울이 깨졌다
사람들은 눈앞의 장닭이
거울이 깨지면서
거울 속에서 걸어 나온 장닭인지
마당에서 놀다가 거울 속으로 걸어 들어간 장닭인지
아니면, 또 다른 장닭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 시집 <이미, 서로 알고 있었던 것처럼>(문학동네, 2014)
* 감상 : 윤희상 시인.
1961년 12월, 전남 나주시 영산포에서 태어나 광주 동신고를 거쳐,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습니다. 1989년 <세계의문학>에 시 ‘무거운 새의 발자국’ 외 2편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시집으로 <고인돌과 함께 놀았다>(문학동네, 2000), <소를 웃긴 꽃>(문학동네, 2007), <이미, 서로 알고 있었던 것처럼>(문학동네, 2014), <머물고 싶다 아니, 사라지고 싶다>(강, 2021) 등이 있습니다.
윤희상 시인의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에 유학을 갔다가 현지에서 일본인 아내를 만나 결혼했고 해방이 되면서 귀국해 전남 나주에 정착했습니다. 시인이 그의 시 ‘일본 여자가 사는 집’에서 본인이 혼혈아라는 사실을 밝혔듯이 초등학교 고학년 때까지 받아쓰기를 잘하지 못해 무척 고생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엔 글쓰기에 재능을 보여 1989년 시인으로 등단하였고 그의 시 ‘소를 웃긴 꽃’은 2013년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오늘 감상하는 시는 닭을 마당에 그냥 풀어놓고 키웠던 옛날 시골 출신이 아니면 언뜻 이해하기 쉽지 않은 장면입니다. 큰 누님의 결혼 날짜를 받아 놓고, 신행(新行)을 위해 찾아올 사위가 묵을 방을 꾸미기 위해서 대대적인 도배 작업을 하는 모습도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낯선 풍경일 것입니다. 더구나 잠시 방을 비우기 위해서 내놓은 오래된 장롱 문짝에 달린 커다란 전신 거울에 비친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비춰보는 장닭의 모습은 더더욱 우스꽝스럽고, 어쩌면 해학적인 장면이기도 합니다.
이 시를 읽으면서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허상’을 보고 웃기도 하고 품도 잡고 또 싸우기도 하는 어리석은 장닭의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은 아닐까, 그리고 그런 우리를 꾸짖는 시인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고 말하면, 제가 너무 멀리 나가버린 것일까요. ‘눈앞의 장닭이 / 거울이 깨지면서 / 거울 속에서 걸어 나온 장닭인지 / 마당에서 놀다가 거울 속으로 걸어 들어간 장닭인지’ 자기 자신도 잘 모르면서 거울을 깰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는 우리들 말입니다. 일체(一切)의 감정을 배제하고 그저 팩트만 담담하게 진술한 문장의 조합으로 된 시인데, 읽고 나면 무엇인가 묵직한 느낌이 스치는 것도 희한합니다.
문학평론가 황현산은 윤희상 시인의 이런 시를 “진정으로 아는 자들은 어둠이 대신해서 말하게 하는 자들이다. 윤희상은 쉽사리 발언하지 않는다. 다만 시 곳곳에 여백을 남겨두고 그 ‘텅 빔’으로 하여금 많은 것을 대신 이야기하게 한다. 그의 시는 자칫 난해해지기 쉬운 부분에서 한번 쉬어가며, 좀 더 깊은 눈으로 세상을 보려고 애쓴다. 시인은 굳건한 언어로 세상을 장악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배우는 사람’이다.”라고 평한 적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윤희상의 시는 어렵지 않습니다. 어려운 말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읽기 편합니다. 읽기 편한 만큼 짧은 시도 많습니다. 물론 산문시에 해당하는 긴 장문의 시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일상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시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무심코 따라가다 보면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서 숨겨져 있는 깨달음의 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같은 시집에 실려 있는, 시 한 편을 더 읽어 보겠습니다.
김승재
- 윤희상
김승재는 나의 친구이다. 서울 장충초등학교 6학년 2반 담임 선생님이다. 2008년 4월 10일, 집에서 잠을 자다가 갑자기 죽었다. 오매, 우리 집 대들보가 무너져부렀네. 고향에서 오신 어머니가 영안실에서 밤이 새도록 통곡했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내가 죽은 친구의 핸드폰을 가지고 있었다. 어린 제자로부터 문자메시지가 왔다. 죽은 친구를 강진의 양지바른 곳에 묻었다. 내가 다른 사람들 몰래, 죽은 친구에게 읽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 유림이에요.
좋은 나라 가셔서
행복하게 사시고
다음 생에는 꼭 오래 사세요.
- 시집 <이미, 서로 알고 있었던 것처럼>(문학동네, 2014)
시라기 보다는 마치 수필 같은 느낌이 드는 담담한 글입니다. 그저 남말 하듯이 툭툭 던지는 화법이 섬뜩할 정도로 차분합니다. 그렇지만 이 시를 다 읽고 나면 ‘김승재’라는 이름을 가진 시인의 친구가 어떤 삶을 살다가 이생을 이별했는지,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너무도 쉽게, 그러나 그들 각자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중앙대 교수인 류신 문학평론가는 “윤희상은 천상 시인이다. 그는 한겨울 깜깜한 호수의 심연에서 외롭고 소외된 사람들의 말을 품어 안는다. 그의 시의 심장이 따뜻한 연유이다. 윤희상은 숙련된 시인이다. 그는 불필요한 언어를 베어내고 꼭 필요한 언어도 다듬고 또 다듬는다. 그의 시의 용모가 단정한 까닭이다. 윤희상은 체념의 기술을 체득한 시인이다. 그는 오토바이를 타고 사막의 오지를 달리며 인간 존재의 필연적 제한성을 자각한다. 그의 시의 품성이 겸손한 소이연이다. 동시에 윤희상은 이런 시인이기 이전에 현실의 땅에 굳건히 발을 딛고 오늘을 살아가는 성실한 시민이다. 그는 다사다난한 삶의 궤적이 생생하게 인쇄된 세상이라는 거대한 책을 또박또박 읽는다. 그의 시의 마음가짐이 정직한 이유이다.”라고 시인을 평했습니다.
얼마 전 코로나 팬데믹으로 전 세계인이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시인이 상재(上梓)한 시집에 실린 시 한 편을 읽으면서 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땅이 책이다
- 윤희상
책을 읽지 못하면서 사는 것이 안타깝다는
농부에게 내가 말했다
별말씀을요
괜찮아요
땅이 책이잖아요
- 시집 <머물고 싶다 아니, 사라지고 싶다>(강, 2021)
평론가의 말대로, 여기서 ‘현실의 땅에 굳건히 발을 딛고 오늘을 살아가는 성실한 시민으로서 다사다난한 삶의 궤적이 생생하게 인쇄된 세상이라는 거대한 책을 또박또박 읽어 낼 줄 아는 시인’으로 인해 비록 책을 읽을 줄 모르는 농부도 땅을 읽는 훌륭한 독서가로 거듭 태어나 근사한 시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 땅의 시인들이 해내야 할 삶의 사명일 것입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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