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 이해인
손 시린 나목(裸木)의 가지 끝에
홀로 앉은 바람 같은
목숨의 빛깔
그대의 빈 하늘 위에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차오르는 빛
구름에 숨어서도
웃음 잃지 않는
누이처럼 부드러운 달빛이 된다.
잎새 하나 남지 않은
나의 뜨락엔 바람이 차고
마음엔 불이 붙는 겨울날
빛이 있어
혼자서도
풍요로워라.
맑고 높이 사는 법을
빛으로 출렁이는
겨울 반달이여.
- 이해인 제3 시집<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분도출판사, 1983)
* 감상 : 이해인 시인, 수녀.
본명은 이명숙. 1945년 6월 7일 강원도 양구에서 가톨릭 신자 가정에 1남 3녀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지 3일 만에 받은 유아 세례명은 ‘베르나뎃다’입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이해인 수녀의 아버지는 납북되었고, 가족은 부산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그곳에서 부산 성남초등학교를 다니다 서울이 수복되면서 서울 창경초등학교로 전학했습니다. 이 당시 그녀보다 열세 살이 많은 언니 이인숙 수녀가 갈멜 수녀원에 들어갔는데 후에 그녀가 수녀가 되는 데 영향을 주었습니다.
서울 풍문여중을 졸업하고 김천 성의여자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고등학교 재학 중 전국 고등학생 백일장에서 ‘산맥’이라는 시로 장원을 하기도 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64년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토 수도회에 입회했고, 이때 받은 서원명은 ‘클라우디아’입니다.
1970년 월간 <소년>에 시 ‘하늘’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이때부터 ‘해인(海仁)’이라는 필명을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76년 종신 수도자로 사는 것을 서원하였으며,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에서 경리과 보조로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필리핀에 있는 성 루이스 대학교에서 영문학과 종교학을 공부하였고 귀국한 후에는 서강대학교 대학원에서 종교학을 전공했습니다. 1992년부터 수녀회 총 비서직을 맡았으며 비서직이 끝난 1997년부터 ‘해인 글방’을 열고 문서 선교를 시작하였습니다. 1998년부터 2002년까지 부산 가톨릭 대학교에서 겸임교수로 강의하였으며, 현재는 부산 성 베네딕토 수녀원에서 기도하고 시를 쓰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2007년 작고한 시인의 어머니는 수도자만큼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는데, 4남매 중 두 명의 딸이 수녀가 되었습니다. 오빠 이인구는 서울예대 광고 창작과 교수로 재직하였는데 항공사, 화장품, 맥주, 음료수 광고 등 많은 대표작을 남긴 유명 광고인이기도 했습니다. 또 여동생 이경숙은 서울 길음동 성당에서 가난한 이웃을 돕는 모임인 ‘빈첸시오회’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시집으로 <민들레 영토>(카톨릭출판, 1976), <내 영혼에 불을 놓아>(분도출판, 1979),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분도출판사, 1983), <시간의 얼굴>(분도출판, 1989), <엄마와 분꽃>(분도출판, 1992), <사계절의 기도>(분도출판, 1993), <다시 바다에서>(박우사, 1998), <외딴 마을의 빈 집이 되고 싶다>(열림원, 1999), <다른 옷은 입을 수가 없네>(열림원, 1999), <꽃 마음 별 마음>(샘터사, 1999), <작은 위로>(열림원, 2002), <작은 기쁨>(열림원, 2007), <엄마>(샘터, 2008), <희망은 깨어있네>(마음산책, 2010), <작은 기도>(열림원, 2011), <필 때도 질 때도 동백꽃처럼>(마음산책, 2014), <꽃잎 한 장처럼>(샘터, 2022), <인생의 열 가지 생각>(마음산책, 2023), <이해인의 햇빛 일기>(2023)등이 있습니다. <새싹문학상>(1981), <여성동아 대상>(1985), <부산 여성문학상>(1998), <천상병 문학상>(2006), <한국 카톨릭문학상>(2023)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며칠 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 묵상을 끝내고 운동을 위해 체육관으로 이동,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차에서 내려서는데, 남서쪽 파란 새벽하늘 위에 떠 있는 '반달'이 너무나 매혹적으로 보였습니다. 순간, 나도 모르게 떠오른 시어가 바로 이해인 시인의 시 제목이었습니다.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운동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서재 책꽂이에서 “1985년 3월 23일” 시집을 구입한 날짜가 선명하게 적혀있는 오래된 시집을 찾았습니다. 대학원을 졸업하던 해, 아직도 앞길이 정해지지 않아 불안이 가득했던 젊은 시절이었지만 돈을 들여 시집을 살 여유는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마도 시인은 겨울 하늘에 뜬 반달을 보며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던 듯합니다. 뿐만 아니라 겨울바람을 맞으며 그 달빛을 온몸으로 홀로 받고 있는 ‘손 시린 겨울나무’도 마치 자신의 모습처럼 느껴진 듯합니다. 그러나 손 시린 나목(裸木)이요, 또 바람이 찬 빈 하늘에 떠 있는 ‘반달’일지라도, 마음엔 ‘불이 붙는’ 뜨거움이 있고 ‘빛이 있어 / 혼자서도 풍요’롭다고 노래하는 시인의 경건한 마음이 그대로 전달되어 옵니다.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 차오르는 빛'으로 출렁이며 차올라, 빛으로 충만하게 둥실 밤하늘에 뜰 자기 자신을 의미하는 시적 은유가 참 좋습니다. 비록 지금은 ‘나목(裸木)’과도 같고, 또 덜 채워진 ‘반달’로 떠 있지만, 세속적인 욕망이 아닌 신앙적인 구도자의 자세로 ‘빛으로 출렁이는’ 모습으로 떠오를 것을 소망하는 시적 화자의 마음을 나타내는 몇몇 시어(詩語)들이, 이 시를 지탱하며 튼튼하게 받쳐주고 있습니다. ‘구름 속에서도 / 웃음 잃지 않는’, ‘마음엔 불이 붙는’, ‘빛이 있어 / 혼자서도 / 풍요로워라’, ‘맑고 높이 사는 법을 / 빛으로 출렁이는’ 등과 같은 표현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이해인 시인의 삶을 보면, 시는 시인에게 구도(求道)의 도구(道具)요 자기 성찰을 위한 수단임에 분명합니다. 같은 시집에 실려 있는, 시를 쓰면서 수도자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 시인 자신을 적격하게 묘사한 듯한 시 한 편을 더 읽어 보겠습니다.
시인은
- 이해인
어디서나 門 열고
단 하나의 말을
찾아나선 이여
눈 내리는 빈 숲의 겨울나무처럼
봄을 기다리며 깨어있는 이여
마음 붙일 언어의 집이 없어
때로는 엉뚱한 곳에
둥지를 트는 새여
즐거운 날에도
약간의 몸살기로
마음 앓는 이여
잠을 자면서도
다는 잠들지 않고
시의 팔을 베는
오늘도 고달픈 순례자여
- 이해인 제3 시집<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분도출판사, 1983)
마치 앞으로 자기가 살아내야 할 삶이 어떠할지 예견이라도 한 듯, ‘눈 내리는 빈 숲의 겨울나무처럼 / 봄을 기다리며 깨어있는’ ‘고달픈 순례자’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잠을 자면서도 / 다는 잠들지 않고 / 시의 팔을 베는’, ‘즐거운 날에도 / 약간의 몸살기로/ 마음 앓는’ ‘시인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예견한 노래이기도 하고, 또 그렇게 살겠노라 스스로 다짐하는 절절한 헌신의 노래이기도 합니다.
시인은 2008년 직장암 진단을 받고 지금 힘겹게 투병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시집과 산문집 등을 쉬지 않고 냈습니다. 수도자의 삶을 시작한 지 60주년이 된 지난해 2024년, 시인이 인생의 황금 들녘에서 생각들을 정리하며 쓴 수필, 칼럼 그리고 신작 시 열 편 등이 담긴 수필집 <소중한 보물들>(김영사, 2024)을 또 냈습니다. 시인은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담담하게 고백했습니다.
“타고르는 ‘기탄잘리’에서 시인을 절대자가 새로운 노래를 불어넣는 ‘갈대피리’에 비유했어요. 저의 역할도 그 피리와 같습니다. 저는 지난 60년간 수녀원에만 틀어박혀 있었지만 제 시가 날아가 선교와 복음의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신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 수녀가 환속하지 않고 아직도 ‘민들레의 영토’를 가꾸고 있다는 사실에 보람을 느낀답니다.”
모쪼록 이해인 시인이 ‘어디서나 문 열고 / 단 하나의 말을 / 찾아나’서는 ‘구름 속에서도 / 웃음 잃지 않는 / 누이처럼 부드러운 달빛이’ 되어 우리 곁에 오래오래 머물러 주길 이 시간 두 손 모읍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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