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장
- 이동순
눈 펄펄 오는
아득한 벌판으로
부모 시신을 말에 묶어서
채찍으로 말 궁둥이 힘껏 때리면
그 말 종일토록 달리다가
저절로 말 등의 주검이 굴러떨어지는 곳
그곳이 바로 무덤이라네
남루한 육신은
주린 독수리들 날아와 거두어 가네
지친 말이
들판 헤매다 돌아오면
부모님 살아온 듯
말 목을 껴안고 뺨 비비며
뜨거운 눈물
그제야 펑펑 쏟는다네
눈 펄펄 오는 아득한 벌판을
물끄러미 내다보는
자식들 있네
- 시집<마음의 사막>(문학동네, 2005)
* 감상 : 이동순 시인, 문학평론가.
1950년 6월 경북 김천(금릉)에서 태어났습니다. 경북대학교 국문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1973년 동아일보 신춘 문예에서 시 ‘마왕의 잠’이 당선되어 등단했습니다. 1989년에는 동아일보 신춘 문예 평론 부문에도 당선되었습니다. 안동간호전문대, 충북대 국문과 교수를 거쳐 영남대학교 교수를 마지막으로 정년퇴임 하였습니다. 대구 MBC 라디오에서 <이동순의 재미있는 가요 이야기> 프로그램의 MC로 활동했으며(2003~2008), 미국 워싱턴 소재 자유 아시아방송(RFA)의 <남북이 같이 듣는 노래> 프로에 매주 고정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의 대중가요에 관심이 많아 퇴임 후 계명문화대 특임교수와 이 대학 평생교육원의 한국 대중음악 힐링센터장을 맡고 있기도 합니다.
시집으로는 <개밥풀>(창비, 1980), <물의 노래>(실천문학사, 1983), <지금 그리운 사람은>(창작사, 1986) <맨드라미의 하늘, 시선집>(문학사상사, 1988), <철조망 조국>(창비, 1991), <그 바보들은 더욱 바보가 되어간다>(문학과지성사, 1992), <봄의 설법>(창비, 1995), <꿈에 오신 그대>(문학동네, 1995), <가시연꽃>(창비, 1999), <기차는 달린다>(만인사, 2001), <아름다운 순간>(문학사상사, 2002), <그대가 별이라면>(시선사, 2004), <미스 사이공>(랜덤하우스코리아, 2005), <마음의 사막>(문학동네, 2005), <발견의 기쁨>(시학, 2009), <묵호>(시학, 2011), <멍게 먹는 법>(애지, 2016), <마을 올레>(모악, 2017), <강제이주열차>(창비, 2019), <좀비에 관한 연구>(천년의 시작, 2019), <독도의 푸른 밤>(실천문학사, 2020), <신종족>(시와에세이, 2021), <고요의 이유>(애지, 2022), <생각만 해도 신나는 꿈>(시선사, 2022) 등 무려 20 여권에 이릅니다. 이 밖에도 평론집, 에세이집 등 다수를 발간하였습니다. 제1회 김삿갓 문학상(2001), 시와시학상(2003), 경북문화상(2004), 정지용문학상(2010)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특히 그는 1980년대 백석 시인에 푹 빠져 흩어져 있던 그의 작품들을 모아 분단 이후 최초로 백석의 시전집 <백석 시전집>(창비, 1987)을 발간해 시인을 민족 문학사에 복원시키고 백석 연구의 길을 연 장본인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를 소개할 때 ‘시인’이라고 했지만 사실 그에게는 시인이라는 직함 이외에 문학평론가, 가요 해설사, 교수, 방송 진행자 등 여러 다른 직함들이 있습니다. 모두 그의 재능을 따라서 자연스럽게 생긴 직함이지만 그가 평생 매달린 것은 시(詩)였습니다. 신춘 문예 등단도 시였고, 1988년 취득한 박사학위도 <일제 시대 저항 시가의 정신사적 연구>라는 제목의 시 분야 논문이었습니다. 2018년 2월, 이동순 시인(아들)과 안도현 시인(딸)은 사돈의 연을 맺었으니 가히 집안도 시인의 가문이 되었다고나 할까요.
이동순 시인은 2005년 두 권의 기행 시집을 상재(上梓)했습니다. 베트남을 여행하면서 노래했던 시들은 <미스 사이공>이라는 이름의 시집으로, 고비 사막과 타클라마칸을 여행하며 읊었던 노래는 <마음의 사막>이라는 시집에 담겨졌습니다.
오늘 감상하는 시는 사막을 기행하면서 목격했던 그들의 장례 풍습인 ‘풍장(風葬)’을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삶과 빗대어 노래한 시입니다. 풍장은 우리에겐 낯선 장례 풍속임에 틀림없습니다. 아무도 없는 황량한 광야 가운데 주검을 내다 버린다는 건 우리네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들의 풍장 풍속을 일체(一切)의 선입견이나 주관적인 묘사를 배제하고 너무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매장(埋葬)이나 화장(火葬), 수목장(壽木葬)이나 또 다른 형태의 장례와 비교하여 절대로 뒤지지 않는 이별과 슬픔, 그리고 그것을 이겨내는 극복의 과정이 그리움으로 고스란히 승화되는 풍장의 모습을 그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부모 시신을 말에 묶어서 / 채찍으로 말 궁둥이 힘껏 때리면 / 그 말 종일토록 달리다가 / 저절로 말 등의 주검이 굴러떨어지는 곳 / 그곳이 바로 무덤이라네 / 남루한 육신은 / 주린 독수리들 날아와 거두어 가네 / 지친 말이 / 들판 헤매다 돌아오면 / 부모님 살아온 듯 / 말 목을 껴안고 뺨 비비며 / 뜨거운 눈물 / 그제야 펑펑 쏟는다네’
‘뜨거운 눈물 / 그제야 펑펑 쏟는다네’라는 표현에 다다르면 시인이 그동안 꾹꾹 참으며 담담하게만 그려낸 ‘슬픔과 그리움’이 시를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그만 북받쳐 사무치게 만듭니다. 그리고 시는 ‘눈 펄펄 오는 아득한 벌판’을 앞과 뒤에 수미상관(首眉相關)으로 배치함으로써 그 가운데서 진행되는 풍장이라는 신비스러운 장례식 자체가 한 편의 시(詩)요, 덧없는 우리네 삶의 모습이라는 것을 은유적으로 잘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를 하얀 눈이 쌓인 아득한 벌판과 같은 생의 여정 한가운데서 그 삶을 지켜내야 하는 후손들의 모습을 이런 멋진 표현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물끄러미 내다보는 / 자식들 있네’
아버지는 2002년 1월 29일, 그리고 어머니는 그로부터 4년 후인 2006년 12월 3일, 시인이 노래했던 것처럼 추운 계절 겨울에 먼 길을 떠났습니다. 지난주 설날 다음 날인 정월 초이틀, 강화 큰 누님 집에서 후손들이 둘러앉아 아버지 어머니를 기억하며 함께 추모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날 우리가 둘러앉아 있는 모습이 찍힌 사진을 보면서 ‘물끄러미 (눈 펄펄 오는 아득한 벌판) 내다보는 / 자식들 있네’라는 시어가 딱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떠나셨던 그 밤이 바로 엊그제처럼 생생하게 느껴지는데 벌써 20여 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물끄러미 눈 펄펄 오는 아득한 벌판을 내다보는 자식들’이 다름 아닌 ‘나’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마다, 세대와 세대가 이어져가는 우리네 삶이 어느 시인이 노래했듯이 ‘생의 반복은 / 엄숙하고 슬픈 되새김’이라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 석전(碩田)
반복
- 신평
이제 막 날갯짓 하려는 아들에게
넥타이 매는 법을 가르쳐 준다
그 옛날 아버지가 텁텁한 냄새의 입김으로
나에게 가르쳐 주었던 똑같은 방법
아버지와 달리 몇 번이나 실패를 거듭한다
구부려 올려다보는 아들의 어깨너머
그가 겪어나갈 신산(辛酸)의 세월이 겹겹이 둘러섰다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 훨씬 더
세상은 차갑고 무섭단다
내 힘 한 점 소용없을 때까지
네 기력을 돋울 군불이 되고 싶건만
이미 달빛이 된 아버지
나도 곧 달빛으로 오른다
아들은 그 아들에게 넥타이 매는 법 가르치며
그 옛날 자신의 숨결과 닿았던 내 숨결을 기억하리
생의 반복은
엄숙하고 슬픈 되새김이다
- 시집 <산방에서>(책만드는집, 2012)
'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설날 아침에 - 김종길 / 설날 아침 - 김동리 / 설날 아침에 - 김남주 (1) | 2025.01.29 |
---|---|
퀄트 하는 여자 / 홍매화 - 정귀매 (0) | 2025.01.22 |
그리움 / 낡은 집 - 이용악 (0) | 2025.01.15 |
겨울나무에게 / 다시 새해의 기도 - 박화목 (0) | 2025.01.08 |
새해의 기도 - 이성선 / 새해 아침의 비나리 - 이현주 (1) | 2025.0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