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퀄트 하는 여자 / 홍매화 - 정귀매

석전碩田,제임스 2025. 1. 22. 06:00

누빔 이불 - 퀼트 하는 여자

- 정귀매

시간은 멈춰있고 지구는 돌아요
지구를 돌리고도 남을 양의 실로
여자는 이불을 꿰매지요
한 땀 한 땀 광목을 누비며
자전과 공전을 되풀이하는
여자는 이불 속의 지구
밤과 낮을 만들고
겨울나무를 수놓아 계절을 짓지만
시간을 재생할 수는 없어요
여자는 멈춘 시간 속에 살지요
여자가 묶어 놓은 매듭은 수백수천
이불 속에는 풀어지지 않으려는 여자들이
자신의 발을 묶어 두고
이쪽 무늬에서 저쪽 무늬로 실타래를 옮겨 가지요
때로는 먼 길을 걷기도
서너 걸음 만에 돌아오기도 하지만
멈춘 시간마다 매듭짓는 걸 잊은 적은 없어요
솔기가 풀려 걸음이 가벼워지면
다시 돌아와 박음질하고 가는 여자
삼백예순날을 걷기만 하지요
늘 같은 보폭을 유지하며
밑단과 윗단을
저승과 이승을 촘촘하게 오르내리는 여자
스스로 옭아맨 매듭에 걸려
넘어지는 날이 많아요
발 묶인 여자들만 이쪽 끝과 저쪽 끝을 잡고
터지지 않으려고 끊어지지 않으려고
팽팽한 인력을 유지하는 이불 속
여자는 돌아요

* 퀼트(Quilt) : 겉감과 안감 사이에 솜이나 모사 등을 넣고 바느질하여 누비는 수공예. 원단을 잘라 패치워크하거나 아플리케하는 기법으로 가방, 이불, 쿠션, 인형, 벽걸이, 매트, 의류 등 다양한 곳에 활용되는 바느질이다.

- 시집 <퀼트하는 여자>(예서, 2023)

* 감상 : 정귀매 시인.

‘야생화 사진을 전문적으로 찍으며 우리나라 산하의 사라져가는 꽃들을 소개한 시집 <산행 일기>로 지난 1993년 제9회 오월문학상에 당선되어 등단하였으며, 2년 전 양평의 구석진 산골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야생화를 키우고 퀼트하면서 촌부로 지내고 있다’는 사실이 시인에 대해 제가 아는 정보의 전부입니다. 시집에 시인에 대해서 소개된 내용입니다.

늘 감상하는 이 시가 실린 시집은 피해자통합지원 사회적협동조합(VICTREE)을 설립하여 동분서주 뛰면서 사회적 약자들을 지원하는 일에 매진하고 계신 지인분께서 며칠 전 어떤 관계가 되는 분인지, 또 왜 이 시집을 보내는지 아무 설명도 없이 보내준 시집입니다. 전혀 기대를 하지 않고 펼쳐 든 시집을 읽기 시작했다가 끝부분에 실린 시인 자신이 스스로 셀프 인터뷰를 한 글까지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다 읽었을 정도로 그만 ‘시 읽는 재미에’ 푹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만큼 시가 어렵지 않고 잘 읽혔다고나 할까요. 탁월한 이야깃 꾼의 ‘이야기’에 매료된 느낌에 행복했습니다.

집에는 시인이 그동안 틈틈이 쓴 시 86편이 실려있었습니다. 제1부에는 카메라를 들고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만났던 귀한 꽃을 소재로 사랑과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 시들로 가득합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귀한 이름의 꽃들이 소개되는데, 가령 ‘광릉요강꽃’이라는 시에서 시인은 ‘사는 곳을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숨겨야 하는 / 1급 보호 식물 / 너무 아름다운 것이 죄가 되나’라고 되물을 정도로 희귀한 꽃을 언급하며, ‘설령 꽃 피우는 일이 목숨을 놓는 일이라 해도 / 멈출 수 없는 것이다 / 꽃이기에’라며 위험하지만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야 하는 꽃과 이 땅의 여성, 그리고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처연한 삶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풀어내고 있습니다. 이 글을 마무리하기 전에 소개할 ‘홍매화’라는 시에서도 시인은 생활 속에서 건져 올린 시로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부여잡고 있는 뜨거운 가슴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집의 표제로 사용된 ‘퀼트하는 여자’는 시집에 제4부에 16편이 한꺼번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치마, 인형, 쿠션, 골무, 누빔이불, 화이트 퀼트, 마마 벽걸이, 선보넷, 가방, 조끼 등 퀼트 바느질로 짤 수 있는 물건의 이름에 따라 제목을 붙인 연작시인데, 각각의 특징들을 살려 삶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풀어내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 시대의 여성 차별적 모순과 노동과 희생으로 자식을 키우신 어머니의 삶을 노래하기도 하고, 또 그 현실을 벗어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그 굴레로부터 스스로 벗어나지 못한 시인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딸에게도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여자는 멈춘 시간 속에 산다’는 은유적인 표현으로 노래하며 풀어내고 있습니다.

머니 세대에서는 어떤 물리적인 힘, 즉 노동과 희생으로 자식들을 건사하며 살아야 했고 또 가난과 여자라는 계급의 억압, 배우지 못한 무지함에 의해서 여자의 시간이 멈춰졌다면, 시인이 살아온 세대는 스스로 규정해 놓은 사회적인 통념과 욕심에 갇혀 시간이 멈춰졌다고 시인은 말합니다. 나보다는 가족이 먼저라야 한다는 생각, 나 자신의 발전보다는 남편과 아이들의 성공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욕심 아닌 욕심으로 자신의 꿈은 포기해야 했던 일, 그리고 그것을 딸에게까지 대물림하는 모습을 시인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자는 멈춘 시간 속에 살지요 / 여자가 묶어 놓은 매듭은 수백수천 / 이불 속에는 풀어지지 않으려는 여자들이 / 자신의 발을 묶어 두고 / 이쪽 무늬에서 저쪽 무늬로 실타래를 옮겨 가지요 / 때로는 먼 길을 걷기도 / 서너 걸음 만에 돌아오기도 하지만 / 멈춘 시간마다 매듭짓는 걸 잊은 적은 없어요’

학 시절 문학 동아리 활동을 하며 시를 쓰기 시작했지만 본격적인 시작(詩作)은 1993년 시집 <산행 일기>로 문학상을 받은 후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20여 년 동안 <시뿌리>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시보다는 먼저 삶을 서로 공유하면서 자연 속에서 피고 지는 꽃을 만나면 그들에게 억지로 시적 이미지를 부여해서 시를 짓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그들을 바라보며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려고 한다고 그녀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인에게 야생화꽃, 퀼트, 자수를 소재로 한 시편들은 ‘그녀 자신의 삶의 이야기’인 동시에 시 자체였습니다.

한 편에 이런 다양한 이야기들이 한꺼번에 녹아있는 시, 앞에서 언급했던 '홍매화'라는 제목의 시를 읽으며 이 글을 마무리해야겠습니다. 올해 입춘도 이젠 불과 두 주밖에 남지 않았으니 아마도 성질 급한 매화가 꽃망울 터뜨렸다는 소식이 오늘내일 남녘으로부터 전해질 것입니다.

홍매화

- 정귀매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손과 가슴에 화상을 입었다는 것이다
그럼 밥은? 애들은?
가슴에 화상을 입었다는데 밥이 문제니?
애가 셋에 나이 사십이 넘어 뭔 가슴 타령 손이 급하지
중얼거리는데
병실 창가에 홍매화 두 그루가 예쁘다고
꽃 보려거든 한 번 오라고

친구의 왼쪽 손과 팔의 화상은 깊었다
빨래를 삶다가 펄펄 끓는 들통이 쏟아져 내린 것인데
얼굴에도 크고 작게 물집이 잡혀 있었다
멀쩡한 곳은 가슴밖에 없었다나
그런데 병원 와서 꽃을 보니 가슴이 제일 아프다고
꽃이 저렇게 뜨거운지 처음 알았다고
너무 뜨거워서 가슴에서 자꾸 진물이 흐른다고

홍매화 꽃그늘에 서서 가만히 손을 대 본다
앗 뜨거워, 실은 흠칫 놀랄 만큼 차가왔다
애 셋을 키우느라 손이 너무 차가왔던 거야
이제 붉고 뜨거운 손이 피어날 텐데
그 손으로 빨래만 삶지 말고 친구야
꽃구경 가자
가슴에 피는 꽃 산에 피는 꽃
시절 저 밑바닥에 등 구부리고 피웠던 꽃들 옆으로
우리도 꽃피우러 가자
이제 네 손은 꽃손이잖니

- 시집 <퀼트하는 여자>(예서, 2023)

래를 삶다가 그만 들통의 끓는 물이 쏟아지는 바람에 화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한 친구가 시인에게 전화했나 봅니다. 병문안을 가서 친구와 나눈 일상의 대화가 한 편의 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에서 두 여자는 ‘이제 붉고 뜨거운 손이 피어날 텐데 / 그 손으로 빨래만 삶지 말고 친구야 / 꽃구경 가자’고 의기투합하는 장면이 참 재미납니다. 그동안 가슴 속에 숨겨 놓았던 삶의 꿈을 찾아 ‘우리도 꽃피우러 가자’고 서로를 격려하며 토닥이는 병실 안 풍경이 참 아름답게 다가오는 시입니다. 병원 창문 가에 핀 홍매화를 보고 호들갑을 떨고 있는 중년의 두 여인네의 대화가, 이렇게 아름다운 시로 두둥실 떠 오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입니다. 이렇듯 정귀매 시인의 시집을 읽으면 그녀가 삶의 주변에서 이야기를 건져 올리는 천상 시인이요, 재미난 이야기를 창조해 내는 이야깃 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쪼록 어수선한 주변 정세들은 묵은해와 함께 다 떨쳐버리고, 새해엔 새로운 희망과 설렘의 마음으로 '꽃구경'하러 갈 수 있으면, 아니 ‘꽃피우러’ 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양평 구석진 곳에서 손수 키우고 수놓은 야생화들이 들려주는 비밀스런 이야기들을 듣고 악보에 옮겨 적은 노래들이 더 많이 들려오길 기대하며 시인의 건필(健筆)을 응원합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