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아침에
- 김종길
매양 추위 속에
해는 가고 오는 거지만
새해는 그런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쉬고
파릇한 미나리 싹이
봄날을 꿈꾸듯
새해는 참고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
오늘 아침
따뜻한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
세상은
험난하고 각박하다지만
그러나 세상은 살 만한 곳,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
좀 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
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
한 해가 가고
또 올지라도
어린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 고대신문(1961)에 처음 게재, 김종길 시집 <성탄제>(삼애사, 1969)
* 감상 : 김종길 시인, 영문학자. 1926년 11월 5일 경북 안동 길안면 지례(임하댐이 완공되면서 수몰되었음)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김치규(金致逵)이며 '김종길'은 그의 아호입니다.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수록된 시 ‘성탄제’ 때문에 잘 알려진 시인입니다. 대구 사범학교와 혜화전문학교, 그리고 고려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했으며, 대학 졸업 후 대구공고 교사, 경북대학교 강사 등을 거쳐 1959년 고려대학교 교수로 부임, 34년간을 근무하다가 1992년 정년 퇴임하였습니다. 지난 2017년 4월, 향년 91세의 나이로 별세하였습니다.
1947년 <경향신문> 신춘 문예에서 시 ‘문(門)’이 입선되어 당시 주필이었던 정지용 시인으로부터 상을 받고 등단했습니다. 고려대 영문학과에 재학할 때 지도교수였던 이인수 교수(1916~1950)를 만난 인연 때문에 T.S. 엘리엇의 ‘황무지’를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70년에 가까운 긴 시력(詩歷)을 지녔지만 작품집은 그리 많지 않은 과작(寡作)의 시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교수 시절에는 혹여 강의와 연구에 소홀해질까 염려해서 시를 많이 쓰지 못했다’고 여러 차례 술회했습니다.
고려대 문과대학에 시인과 관련된 재미난 뒷담화가 하나 있다고 합니다. 그의 본명인 ‘김치규(金致逵)’를 누군가 한자를 잘못 읽어서 ‘김치달(金致達) 교수’로 불리는 웃지 못할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후 그가 맡은 ‘19,20세기 영미시(英美詩)’ 과목은 그저 ‘치달 선생 현대시’라고 하면 다 통했다고 하네요.
시집과 시선집으로 <성탄제>(삼애사, 1969), <하회에서>(민음사, 1977), <황사현상>(민음사, 1986), <천지현황>(미래사, 1991), <달맞이꽃>(민음사, 1997), <해가 많이 짧아졌다>(솔, 2004), <해거름 이삭줍기>(현대문학, 2008), <그것들>(서정시학, 2011), <솔개>(시인생각, 2013)등이 있습니다. 한국시인협회장, 고려대 문과대학장,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등을 역임하였으며 목월문학상, 인촌상, 청마문학상, 육사시문학상, 만해대상 등을 수상하였고 국민훈장 동백장과 은관문화훈장을 받았습니다.
두 돌이 지나 어머니를 여의고 조모와 증조모 손에서 자란 시인은 91세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특별하게 뛰어나거나 또 튀는 삶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려고 했던 평범하고 우직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우주 만물의 생성과 변화를 하나로 아우르며 그 안에서 유한한 삶의 시간을 반추하는 시, 그리고 고전적인 감각과 유가적(儒家的)인 전통이 스며있는 작품들이 주종을 이루는 것은 어릴 적부터 증조부, 증조모, 조모 등 세 노인 밑에서 한학을 자연스럽게 접하며 내공이 탄탄하게 쌓인 연유도 있을 것입니다.
처음 이 시가 발표된 해가 1961년도 <고대 신문> 지상(紙上)이었으니, 그의 나이 35세 무렵에 쓴 시입니다. 그런데도 이 시를 읽으면 마치 그가 90 인생을 다 산 후에 읊은 노년의 시같이 느껴지는, 인생을 바라보는 혜안이 철철 넘치는 시입니다. 이 시는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설날 아침에 새해를 축하하는 희망의 메시지이며 덕담으로 딱 어울리는 시입니다. 해마다 설날 아침이면 슬쩍 꺼내서 읽어 보는 시이기도 합니다.
혹한의 겨울 추위 속에서도 만물의 생리를 묵상하고, 새봄을 기다리는 겸허한 시인의 마음을 엿볼 수 있어 참 좋습니다. 차갑고 두꺼운 얼음장 밑에서도 살아 움직이는 고기이며, 꽁꽁 언 미나리꽝에서도 새롭게 싹이 나는 순환의 자연 원리를 시인은 담담하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 / 한 해가 가고 / 또 올지라도’ 절망하지 않고 세상은 살 만한 곳이라는 믿음으로, 주어진 것들에 감사하며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자고 시인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삶을 살아내야 하는 이유는 어린것들 잇몸에서 새 이빨이 돋는 것처럼, 늙은이들은 사라져 가더라도 한 세대가 가면 또 다른 한 세대가 오는 생의 순환은 어김없이 그렇게 이어져갈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시의 마지막 행을 연(聯)으로 구분하여 별도로 노래한 이유입니다.
그저 그렇게 담담하게 새해를 맞을 일이라고 노래하는 시인의 노래를 들으니 팔순을 바라볼 때 쓴 시로 추정되는 소설가 김동리가 ‘새해라고 뭐 다른 거 있나’ ‘다 그저 그렇고 그런 거지 / 그저 그렇고 그렇다 해도 그런대로 / 한 해 한 번씩 이 아침에 나는 / 한복으로 옷이나 갈아 입는다’고 노래한 ‘설날 아침’이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그도 매양 다를 바 없는 설날 아침이면 매년, ‘한복으로 옷이나 갈아 입는다’고 담담하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설날 아침
- 김동리
새해라고 뭐 다른 거 있나
아침마다 돋는 해는 동쪽에 뜨고
한강은 어제처럼 서쪽으로 흐르고
상 위에 떡국 그릇 전혀 접시 얹혀 있어도
된장찌개 김치보다 조금 떫스름할 뿐
이것저것 다 그저 그렇고 그런 거지
그저 그렇고 그렇다 해도 그런대로
한 해 한 번씩 이 아침에 나는
한복으로 옷이나 갈아 입는다
- <문학사상> 1998년 7월호에 공개된 미발표 유작시
어린 시절에는 설날이 다가오면 동네 물레방아 떡 방앗간은 가래떡을 순서대로 뽑는 마을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습니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갓 나온 떡가래를 지게에 지고 백호 머리 마을 어귀를 돌아 동네로 들어서면 명절 음식을 만드느라 가가호호(家家戶戶) 굴뚝에선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꿈에도 잊을 수 없는 정겨운 마을이 바로 내가 태어나 자란 ‘자리섬’ 마을이었습니다. 설날 당일에는 부모님보다 일찍 일어나 가장 먼저 세배드린 후 새해 덕담을 들은 후 온 가족이 닭고기 꾸미로 맛을 낸 떡국을 푸짐히 먹고, 죽마고우 친구들과 어울려 온 동네 어른께 차례로 골목길을 누비며 세배를 드리는 것이 바로 그 유년 시절 설날 아침의 풍경이었습니다.
오늘처럼 하얀 눈이 내린 설날 아침에는 실명(實名)을 곁들여 노래한 김남주 시인의 ‘설날 아침에’라는 시도 불현듯 생각이 납니다. 마흔이 넘도록 색시를 구하지 못해 총각으로 있었던 ‘아우 덕종’씨도 지금쯤은 어엿한 한 가정의 가장(家長)으로 일흔 즈음의 설날을 맞이하고 있겠지요.
설날 아침에
- 김남주
눈이 내린다 싸락눈
소록소록 밤새도록 내린다
뿌리뽑혀 이제는
바싹 마른 댓잎 위에도 내리고
허물어진 장독대
금이 가고 이빨 빠진 옹기그릇에도 내리고
소 잃고 주저앉은 외양간에도 내린다
더러는 마른자리 골라 눈은
떡가루처럼 하얗게 쌓이기도 하고
닭이 울고 날이 새고
설날 아침이다
새해 새 아침 아침이라 그런지
까치도 한두 마리 잊지 않고 찾아와
대추나무 위에서 운다.
까치야 까치야 뭐하러 왔냐
때때옷도 없고 색동저고리도 없는 이 마을에
이제 우리 집에는 너를 반겨줄 고사리손도 없고
너를 맞아 재롱 피울 강아지도 없단다
좋은 소식 가지고 왔거들랑 까치야
돈이며 명예 같은 것은
그런 것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나 죄다 주고
나이 마흔에 시집올 처녀를 구하지 못하는
우리 아우 덕종이한테는
행여 주눅이 들지 않도록
사랑의 노래나 하나 남겨두고 가렴
- 김남주 시집 <사상의 거처>(창작과비평사, 1991 )
지난 갑진년 한 해는 저 개인적으로 큰 의미가 있었던 해였습니다. 우선 6년 전에 가정을 이루었던 큰아들 홍민 내외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 ‘수빈’을 낳은 일입니다. 또 지난해 마지막 달에는 둘째 홍찬이도 가정을 이루고 힘찬 새출발을 했습니다. 부족한 아비의 의견을 존중해서 주변에 짜다라 크게 알리지 않고 ‘작은 결혼식’으로 출발을 한 두 젊은 아들과 며느리에게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보내고 싶습니다.
두 아들이 가정을 이룬 후 맞는 첫 명절인 이번 설날은 그런 면에서 어느 때보다 큰 의미가 있는 날입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는 아버지로부터 배운 대로, 가장 먼저 세배를 받은 후 ‘세상은/험난(險難)하고 각박(刻薄)하다지만 / 그러나 세상은 살 만한 곳 //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 / 좀 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는 시인이 들려주는 덕담을 흉내 내보려고 합니다.
을사년(乙巳年) 한 해는 모쪼록 뜻밖의 행운보다는 '어린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 고운 이빨을 보듯', 이 글을 읽는 모든 분께 평범한 일상(日常)에서 오는 소소한 행복이 가득 넘치길 두 손 모아 빕니다.
- 을사년(乙巳年) 설날 아침, 은평 뉴타운 북한산 아래 폭포동에서 석전(碩田)이 세배(歲拜)드립니다.
'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퀄트 하는 여자 / 홍매화 - 정귀매 (0) | 2025.01.22 |
---|---|
그리움 / 낡은 집 - 이용악 (0) | 2025.01.15 |
겨울나무에게 / 다시 새해의 기도 - 박화목 (0) | 2025.01.08 |
새해의 기도 - 이성선 / 새해 아침의 비나리 - 이현주 (1) | 2025.01.01 |
겨울 숲에서 - 안도현 / 눈보라 치는 겨울 숲에서 - 박노해 (2) | 2024.1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