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겨울 인수봉 / 씬냉이 꽃 - 김달진

석전碩田,제임스 2025. 2. 12. 06:00

겨울 인수봉

- 김달진

고요한 겨울 한낮
눈 위의 햇살이 눈에 부시고
뒷산 언덕에 바람이 일어
솔가지에 쌓인 눈이 떨어지자
까치가 놀라 날아갔다.

며칠 내려 쌓인 허연 눈빛에
겨울 황혼은 그 걸음이 느린데
저 건너 인수봉 꼭대기에는
얼어붙은 듯 떠 있는 구름 한 점.

전신주에 앉아 있는
까치 한 마리
그 하얀 목털에서
해질녘 인수봉의 바람을 본다.

- 유고 선시집 <한 벌 옷에 바리떼 하나>(민음사, 1990)

* 감상 : 김달진 시인. 호는 월하(月下).

1907년 2월 4일 경남 창원군 웅동면(현재 창원시 진해구 소사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야은(野隱)으로부터 한학을 배웠으며 항일 민족 기독교 학교로 알려진 계광 보통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서울로 올라온 그는 중앙 고등 보통학교를 다니다 병으로 잠시 학업을 중단, 고향으로 내려왔다가 1923년 다시 상경, 서울 경신 중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하였지만 4학년 재학 중 일본인 영어교사 추방 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했습니다.

향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1926년부터 계광보통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1929년 <문예공론>에 양주동의 추천으로 시, ‘잡영수곡(雜咏數曲)’을 발표하면서 등단하였고, 이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지면에 시를 발표하였습니다. 1933년 계광학교가 민족 항일 교육에 앞장섰다는 이유로 폐교를 당하자 시인은 민족의 현실에 좌절과 절망한 나머지 부모와 이미 결혼하여 처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향을 떠나 1934년 봄 강원도 금강산 유점사에 도착, 그곳에서 김운악 주지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출가, 승려가 되었습니다.

1935년 봄, 그는 함양에 있는 백운산의 화과원으로 옮겨 수도 생활을 하면서 기미년 독립선언 33인 중의 한 분이었던 백용성 선사가 번역한 화엄경을 다듬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그러다 1936년 유점사 공비생(公費生)으로 중앙불교 전문학교(혜화전문학교의 전신이면서 현재의 동국대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친구 서정주, 김어수 등을 만나 순수시 전문 동인지였던 ‘시원’의 동인으로 활동하였으며 이때 김동리와도 교분을 갖게 되었습니다. 또 그해 11월에는 서정주, 김동리, 오장환, 함형수와 더불어 ‘시인부락’ 동인지를 내면서 활발한 시작(詩作) 활동을 하였습니다.

1939년 중앙불교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입산하여 유점사의 법무(法務)로 일하며 절을 돌아다니며 강론과 불법 해설에 힘을 기울였고, 이때까지 쓴 시들을 모아 첫 시집 <청시(靑柿)>를 출판했습니다. 강론 중 일제의 강점이 온당치 못하다는 발언이 반복될 수밖에 없었는데, 1941년 일경의 요시찰 인물이 된 그를 감시하던 경찰을 눈 속에 처박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주변의 권유로 유점사를 탈출, 잠시 북간도 용정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1년을 머물렀습니다.

1945년 금강산 유점사로 다시 돌아와 해방을 맞았는데, 그는 벅찬 기쁨과 감격을 노래하는 시를 신문과 방송에 발표하였습니다. 또 이광수의 소개로 <동아일보> 주간이었던 설의식을 만나 문화부 기자로 잠시 근무하기도 하였으며 청년 문학가 협회에도 가담하는 등 해방된 조국을 위해서 열심히 활동하다가 어느 날 홀연히 문단에서 잠적했습니다. 그가 후에 직접 쓴 글인 ‘나의 인생, 나의 불교’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날이 갈수록 때를 좇아 인심을 어지럽히는 세상에서 활기찬 순수를 보호하는 길은 수도 생활과 같은 교사가 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 모든 직함을 내려놓은 것입니다. 시인은 ‘해방 후 정치적 와중에서 중 생활을 했던’ 자신에게 ‘신문 기자나 저항 정신을 가지고 활동하는 협회는 적소가 아니’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1946년 그는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대구로 내려가 경북 여자중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시작하는 한편, ‘죽순’ 동인으로 참여하여 다시 활발하게 시를 썼습니다. 1948년에는 고향인 진해에 있는 진해 중학교로 옮겨 가르쳤고, 이 기간 <자유민보>의 논설위원과 해군 사관학교 출강도 하는 등 가르치는 일에 매진하였습니다. 1962년, 남면 중학교(현재 창원 남중학교) 제2대 교장을 끝으로 교직에서 정년퇴직했습니다.

1960년대 이후에는 은둔하면서 동국대학교 동국역경원 심사위원으로 불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사업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고, 1983년 불교정신문화원에 의해 한국고승석덕(韓國高僧碩德)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이때 봉선사 주지이자 역경원장이었던 운허 스님이 그의 호(號)인 ‘월하(月下)’를 지어주었습니다.

집으로 <청시>(1940), 시 전집으로 <올빼미의 노래>(시인사, 1983), 유고 선시집 <한 벌 옷에 바리떼 하나>(민음사, 1990), 우리나라 최초의 장편 서사 시집 <큰 연꽃 한 송이 피기까지>(동국역경원, 1974)가 있으며, 그 외 <손오병서>(청우, 1954), <고문진보>(청우, 1957), <장자>(현암사, 1965), <법구경>(현암사, 1965), <한산시>(법보원, 1962), <당시전서>(민음사, 1987) 등 동양의 고전과 <한국선시>(열화당, 1985), 원효의 <금강삼매경론>(열음사, 1986), <붓다 차리타>(고려원, 1988), <보조국사 전서>(고려원, 1988) 등 다수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습니다. 직접 옮기고 해설한 <한국 한시>(민음사, 1989) 전 3권의 완간을 앞두고 1989년 6월 향년 82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늘은 정월 대보름날입니다. 정월 대보름이면 내가 나고 자란 고향에선 뒷산에 올라 달불을 태운 후 동쪽 하늘에 떠오르는 대보름 달을 보며 소원을 비는 ‘달불놀이’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행사였습니다.

녀노소 할 것 없이 온 동네 사람들이 올랐던 '할미산성'에선 주변의 웬만한 동네는 다 발아래로 보일 정도로 전망이 특출했습니다. 마른풀을 베어 아래 불쏘시개로 삼고, 위에는 청솔 가지를 잔뜩 올려야 더 많은 양의 연기를 올려보낼 수 있어 동네 청년들은 일심동체가 되어 큰 달불집을 만들었지요. 그래야 다른 동네의 달불보다 더 크고 높이 연기를 피워올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정월 대보름날 ‘달불놀이’는 지금 젊은 세대들에겐 아무리 설명해도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당시 사람들에겐 이 동네 저 동네 할 것 없이 모두에게 '축제의 한 마당 그 자체‘였습니다.

늘 감상하는 월하(月下)의 시 '겨울 인수봉'을 정월 대보름날에 갑자기 꺼낸 이유는 그의 호(號)가 '달'과 관련 있기도 하거니와, 시인이 노래한 겨울 인수봉이 '며칠 내려 쌓인 허연 눈빛에' 비치는 지금 현재의 인수봉 모습과 너무도 닮아있기도 하고 또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시인 자신을 '겨울 황혼은 그 걸음이 느린데 / 저 건너 인수봉 꼭대기에는 / 얼어붙은 듯 떠 있는 구름 한 점'에 빗댄 노래가 절창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보름날에 월하의 시를 읽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은 시집에 실려 있는 그의 시 한 편을 더 읽어보겠습니다. 평생 그가 시를 통해서, 가르치는 교사로서, 또 불경과 고전을 번역하는 일을 통해서 무엇을 추구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시입니다.

씬냉이 꽃

- 김달진

사람들 모두
산으로 바다로
신록철 놀이 간다 야단들인데
나는 혼자 뜰 앞을 거닐다가
그늘 밑의 조그만 씬냉이꽃을 보았다.
이 우주
여기에
지금
씬냉이꽃이 피고
나비 날은다.

- 유고 선시집<한 벌 옷에 바리때>(민음사, 1990)

'사람들 모두 / 산으로 바다로 / 신록철이라 놀이간다 야단들인데’ 시인은 고즈넉하게 ‘혼자 뜰 앞을 거닐’고 있습니다. 세상의 번잡함에서 물러나 나만의 삶의 공간을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거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늘 밑의 조그만 씬냉이 꽃'을 보며 묻습니다. 시인이면서 입산하여 승려의 길을 걷기도 했던 월하 김달진. 시인은 이 시에서도 끊임없이 뭔가를 찾습니다. 그러면서 ‘이 우주 / 여기에 / 지금 / 씬냉이 꽃이 피고 / 나비 날은다.’라고 노래하며 자신이 찾고 있던 것을 바로 이곳에서 찾았다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이고 있습니다. 아주 하잘것없는 작고 여린 세계, 그리고 지금 바로 여기, 멀리도 아니고 높이도 아닌 바로 자신의 주변 혹은 발밑에, 우주가 꽃핀다고 말입니다. 산으로 바다로 찾아다니지 않아도 거기, 고개 돌려보면 작은 꽃 하나 피어난다고 말입니다.

‘머지않아 이 겨울도 지나고 새봄이 올 것’이라는 전령사(傳令使)처럼 며칠 전 멀리 양산 통도사의 홍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렸다는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겨울의 끝자락에 서서 시인이 겨울 인수봉을 올려다 보며 노래했던 것처럼, 지금 여기, 내 발밑 조그만 씬냉이꽃 속에 있는 우주를 발견하는 자세로, 느린 걸음이지만 하잘것없는 작은 것들에 귀 기울이고, 여린 것들에 눈길을 주면서 이 한 해도 나만의 길을 우직하게 걸어가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