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나무에게 - 새해에 부쳐
- 박화목
동구 밖 외진 둔덕 겨울나무는
황량한 들녘을 바라보며
울고 있는가, 오늘의 아픔을
쓰다듬을 길 없어 앙상한 가지
부르르 떨며
하늘 향해 그 어떤 애절한 호소를
외치고 있는가, 겨울나무여
그토록 얼룩졌던 곤욕의 나날들
낙엽들 함께 어디론지 모두 떠나보내고
새해 돌아왔으니 기쁜 소식 물고
들까치도 날아와 마을 향해 깟 깟 깟
지저귐즉 하다마는
아직 삼동 내 몰아치는 차운 바람 가시잖고
밤하늘의 별들도 꽁꽁 얼어붙는구나
하나 오는 새봄의 소망을
땅속에 묻어둘 순 없어
언젠가는 새엄 돋아 다시금
푸른 잎사귀들로 감싸일 것을,
그 믿음으로 하여 겨울나무
오늘 꿋꿋이 서 있음은......
차운 바람 스치는 가지 끝에서
기도의 음성을 듣네
둔덕의 겨울나무여!
- 시집 <시인과 세월>(창조문예사, 2003)
* 감상 : 박화목 시인, 아동문학가. 필명(筆名)은 ‘은종’.
1924년 2월 15일 황해도에서 태어나 만주에서 성장하였으며 평양신학교 예과, 하얼빈 영어학원을 거쳐 1952년 봉천 신학교와 한신대 선교신학대학원을 졸업했습니다. 1946년 남쪽으로 내려와 서울 중앙방송국 문예(시) 담당 프로듀서, 한국전쟁 당시에는 종군 작가, 한국일보 문화부장, 기독교 방송국 교양부장과 편성국장, 중앙 신학대(현 강남대) 교수를 역임했습니다. 2005년 7월, 향년 81세의 나이로 타계하였습니다. 시인이 1958년경 조성된 홍제동 ‘문화촌’ 마을로 이사온 후 타계할 때까지 50여 년을 살았던 홍제3동 홍제근린공원에 2009년 그의 <과수원길> 시비가 세워졌으며 2024년에는 그의 탄생 100주기를 맞아 기념우표가 발행되기도 했습니다.
1941년 <아이 생활>에 동시 ‘피라미드’, ‘겨울밤’ 등이 추천되었으나 본격적인 작품활동은 1948년 동화 및 아동소설을 발표하며 시작되었습니다. 동시집으로 <초롱불>(1957), <꽃 이파리가 된 나비>(1972), <아이들의 행진>(1978), <봄을 파는 가게>(1980) 등이 있으며 동화 및 아동 소설집으로 <부엉이와 할아버지>(1950), <봄과 나비>(1952), <밤을 걸어가는 아이>(1954), <저녁놀처럼>(1970), <비바람 속의 아이들>(1980), <마징가의 꿈>(1981), <개똥벌레 삼 형제>(1983), <저녁 눈처럼>(1983), 그리고 시집으로 <시인과 산양>(1958), <그대 내 마음 창가에>(1959), <주의 곁에서>(1961), <천사와의 씨름>(1975), <이 사람을 보라>, <님의 음성 들려올 때 : 박화목 신앙시집>(선경 도서출판, 1977), <환상의 성지순례>, <이처럼 꽃잎 흩날리는 날에>, <시인과 세월>(창조문예사, 2003) 등이 있습니다.
박화목 시인은 ‘기독교적 이상주의에서 출발하여, 정적이고 애수 어린 허무주의적 사상이 예술적으로 승화되고 유기적으로 결합되는 작품이 주를 이루고 있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그의 동시 작품이 동요로 작곡된 ‘과수원 길’과 가곡으로 만들어진 그의 시 ‘보리밭’은 국민 가곡이 되었고, 그를 일약 유명 작사가, 시인의 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
1972년 동시 ‘봄밤’으로 제4회 한정동 문학상, 1980년 동시 ‘겨레의 소원을 풍선에 실어’로 제12회 대한민국 문학상 아동문학부문 우수상, 1989년 서울시 문화상, 기독교문학상, 1993년 옥관문화훈장, 한국전쟁 문학상, 2001년 한국음악저작권대상(가곡부문 작사가상), 한국 아동문화 대상, 황희문화예술상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국민 가곡이 된 ‘보리밭’은 6.25 전쟁 중에 작곡되었습니다. 이 곡이 만들어진 일화가 재미있습니다. 1951년 서울서 부산으로 피난 온 박화목은 종군기자로, 작곡가 윤용하는 해군 음악대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서로 가깝게 지내던 동향 황해도 출신 친구 사이였습니다. 둘은 술자리에서 후세에 남길 가곡 하나를 만들어 보자고 제안하였고, 박화목은 고향 황해도의 보리밭을 떠올리며 제목을 '옛 생각'으로 가사를 지어 윤용하에게 주었는데 윤용하는 3일 만에 그 가사에 곡을 붙여서 제목을 '보리밭'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박화목은 ‘보리밭’ 악보를 보고 즉시 노래를 불렀고 그 모습을 본 윤용하는 좋아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 황해도 출신 실향민으로, 고향의 보리밭을 떠올리면서 그들의 향수(鄕愁)를 담아낸 작사와 작곡이었기 때문입니다.
피난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1953년, 초연을 했지만 별 호응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60년대 후반부터 조금씩 사람들 사이에서 불리기 시작하다가 1974년 고등학교 교과서에 이 곡이 실리면서 대중에게 알려졌으며, 그 후 대단한 인기로 애창되었습니다. 작곡가 사후 7, 8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윤용하는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작곡을 열심히 했으며 집과 악기를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채 정리되지 않은 오선지 뭉치만 남기고 1965년 7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7년 만인 1972년, 그의 친구들과 세광 출판사의 배려로 <윤용하 작곡집 - 보리밭>이 발간되었는데 시인 박화목과 작곡가 윤용하의 ‘보리밭’ 이야기는 ‘시(詩)가 더 좋으냐, 노래가 더 좋으냐’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논쟁의 거리가 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지난주 이성선, 이현주 시인의 새해를 맞는 기도 시를 함께 나누었더니 평소 시로 답신을 보내주시는 지인 한 분께서 오늘 감상하는 박화목의 이 시를 보내주셨습니다. 마침 새해이기도 하고 또 올겨울 들어 가장 추운 한파가 몰아치고 있는 이즘에 너무도 딱 어울리는 시여서 지난주에 새해를 맞는 기도 시를 감상했지만 다시 한번 이 시를 나누려고 합니다. 마치 낭떠러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듯한 작금의 우리 현실을 바라보며 새해에는 뭔가 새로운 좋은 변화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심정이다 보니 이런 기도 시를 그냥 서랍 속에 넣어두기에는 아쉬워 자꾸 눈에 밟혔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동네 어귀 둔덕 위에 서 있는 겨울나무 가지 끝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를 ‘기도의 음성’으로 들은 모양입니다. 찬 바람에 흔들리며 소리를 내는 겨울나무 가지를 보면서 '오늘의 아픔을 쓰다듬을 길 없어 앙상한 가지 / 부르르 떨며' 울고 있다고 시인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토록 얼룩졌던 곤욕(困辱)의 나날들 / 낙엽들 함께 어디론지 모두 따나 보내고' '하늘 향해' '애절한 호소'로 외치고 있다는 표현이 절절합니다. 늘 마을 어귀에 서 있는 나무 위에서 좋은 소식이 있을 때마다 '깟 깟 깟' 지저귀며 알려주던 들 까치들도 지저귈 만한데, 아직도 몰아치는 삼동(三冬)의 추위 탓에 그 노래 소리도 들을 수 없는 '꽁꽁' 얼어붙어 있는 한파가 매섭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직 삼동 내 몰아치는 차운 바람 가시잖고 / 밤하늘의 별들도 꽁꽁 얼어붙’을 정도로 매서운 추위지만 꿋꿋하게 서 있는 겨울나무의 모습 속에서 시인은 한 가지 소망을 발견합니다. 믿음의 눈으로만 보이는 것, 그것은 ‘오는 새봄의 소망’입니다. 그리고 그 소망을 ‘땅속에 묻어둘 순 없어 / 언젠가는 새엄 돋아 다시금 / 푸른 잎사귀들로 감싸일 것을’ 바라며 꿋꿋하게 추위를 견디고 서 있는 겨울나무의 속삭이는 기도 음성을 들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이 노래는 그저 기온이 내려갔기 때문에 추운 계절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듯, ‘동구 밖 외진 둔덕’ ‘황량한 들녘’이라는 주변 상황을 시의 초입에 배치하고 있음에 주목해 볼 일입니다. 이 시가 발표될 20년 전의 상황이나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불안하고 매서운 암울한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았나 봅니다. 시인이 ‘동구 밖 둔덕 겨울나무 미루나무’의 가지 끝에서 들려오는 기도 음성, 그 기도의 구체적인 내용처럼 들리는, 그의 또 다른 시 ‘다시 새해의 기도’를 읽어보겠습니다.
다시 새해의 기도
- 박화목
곤욕(困辱)과 아픔의 지난 한 해
그 나날들은 이제 다 지나가고
다시 새해 새날이 밝았다
동창(東窓)에 맑고 환한 저 햇살 함께
열려오는 이 해의 365일
지난밤에 서설(瑞雪) 수북이 내리어
미운 이 땅을 은혜처럼 깨끗이 덮어주듯
하나님, 이 해엘랑 미움이며
남을 업수히 여기는 못된 생각
교만한 마음 따위를 깡그리,
저 게네사렛의 돼지 사귀처럼
벼랑 밑으로 몰아내 떨어지게 하소서.
오직 사랑과 믿음 소망만을 간직하여
고달프나 우리 다시 걸어야 할 길을
꿋꿋하게 천성(天城)을 향해 걸어가게 하소서.
이 해에는 정말 정말 오직 사랑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난한 마음만이
이 땅에 가득하게 하소서, 하여
서로 외로운 손과 손을 마주 꼭 잡고
이 한 해를 은혜 속에 더불어 굳건히 살아가게 하소서.
동구 밖 저 둔덕 겨울 미루나무에
언제 날아왔을까, 들 까치 한 마리,
깟깟깟… 반가운 소식 전해오려나.
하그리 바라던 겨레의 소원,
이 해에는 정녕 이뤄지려나, 이 아침
밝아오는 맑은 햇살 가슴 뿌듯이 가득 안고
새해에 드리는 우리의 간절한 기도
꼭 이루어 주소서, 하나님
이루어 주소서
시 ‘겨울나무에게’에서 들렸던 들까치 소리가 이 시에서도 여전히 깟깟깟 들려오고 있습니다. 시인은 답답한 가슴을 환하게 해 줄 반가운 기쁜 소식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해에는 정말 정말 오직 사랑만이 /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난한 마음만이 / 이 땅에 가득하게 하소서, 하여 / 서로 외로운 손과 손을 마주 꼭 잡고 / 이 한 해를 은혜 속에 더불어 굳건히 살아가게 하소서. 새해에 드리는 우리의 간절한 기도 / 꼭 이루어 주소서, 하나님 / 이루어 주소서’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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