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숲에서
- 안도현
참나무 자작나무 마른 잎사귀를 밟으며
첫눈이 내립니다
첫눈이 내리는 날은
왠지 그대가 올 것 같아
나는 겨울 숲에 한 그루 나무로 서서
그대를 기다립니다
그대를 알고부터
나는 기다리는 일이 즐거워졌습니다
이 계절에서 저 계절을 기다리는
헐벗은 나무들도 모두
그래서 사랑에 빠진 것이겠지요
눈이 쌓일수록
가지고 있던 많은 것을
송두리째 버리는 숲을 보며
그대를 사랑하는 동안
내 마음속 헛된 욕심이며
보잘것없는 지식들을
내 삶의 골짜기에 퍼붓기 시작하는
저 숫눈발 속에다
하나 남김없이 묻어야 함을 압니다
비록 가난하지만
따뜻한 아궁이가 있는 사람들의 마을로
내가 돌아가야 할
길도 지워지고
기다림으로 부르르 몸 떠는
빈 겨울나무들의 숲으로
그대 올 때는
천지사방 가슴 벅찬
폭설로 오십시오
그때까지 내 할 일은
머리끝까지 눈을
눈사람 되어 서 있는 일입니다.
- 시집 <그대에게 가고 싶다>(푸른 숲, 1991)
* 감상 : 안도현 시인.
1961년 12월 15일, 경북 예천에서 태어났고 대구 대건고, 원광대 국어국문학과, 그리고 단국대학교에서 석, 박사 과정을 졸업했습니다. 대학 졸업 후 중등학교 교사로 교직의 길에 들어섰지만, 당시 전교조 사건에 휘말리면서 6년여 해직 교사가 되었습니다.
1981년 대구매일신문과 1984년 동아일보 신춘 문예에서 각각 ‘낙동강’,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란 시로 당선, 등단한 이래 지금까지 100여 권이 넘는 시(선)집과 책을 낸 대한민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유명한 시인이 되었습니다. 1996년 시와시학 젊은 시인상, 1998년 소월시문학상 대상, 2002년 노작문학상, 2005년 이수문학상, 2007년 윤동주 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우석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사람 사는 세상 노무현 재단의 전북지역위원회 상임공동대표, 한국작가회의 소통위원회 위워장 등을 역임하였고 우석대학교를 거쳐 현재는 단국대학교 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첫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을 비롯해 <모닥불>(창비, 1990), <그대에게 가고 싶다>(푸른숲, 1991), <외롭고 높고 쓸쓸한>(문학동네, 2002), <그리운 여우>(창비, 2000), <바닷가 우체국>(문학동네, 1990),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현대문학북스, 2001),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창비, 2004), <간절하게 참 철없이>(창비, 2008), <북항>(문학동네, 2012),<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창비, 2020) 등 지금까지 11권의 시집을 냈습니다.
올해 겨울은 첫눈이 오지게 내리는 바람에 여러 가지 기록을 세우며 시작되었습니다. 서울 11월 첫눈, 117년 만에 가장 많이 쌓인 첫눈, 그리고 물을 잔뜩 머금은 습설(濕雪) 등등. 지난 초가을,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며 고운 단풍 대신 시퍼렇게 시들어버린 잎사귀가 그대로 나무에 달려 있어 가을이 오기는 할 건지 의구심도 들었지만, 뒤늦게 찾아온 가을은 그런대로 형형색색 '가을답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늦가을날 갑자기 내린 첫눈.
오늘 감상하는 시는 화려했던 단풍잎을 다 떨구고 ‘첫눈’을 맞으며 서 있는 겨울 숲의 한 그루 나무에 자신을 비유하여 노래하고 있는 안도현 시인의 겨울 시입니다. 첫눈을 맞으며 서 있는 나무에 시적 화자 자신을 빗댄 시적 은유가 '기다림'과 '사랑'의 은유로, 그리고 다시 내면의 성찰과 '지금 여기'에서 어떤 자세로 살겠다는 다짐으로 점점 확장되어 가는 구조가, 마치 완벽한 서정시의 교본을 읽는 듯합니다. ‘헐벗은 나무’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여 겨울나무가 숲속에서 새봄을 기다리는 것처럼 자신도 오실 임, 사랑하는 그이를 '머리끝까지 눈을 / 눈사람 되어 서 있는 일'이라며 기다리겠노라 노래하는 시인의 마음이 오롯이 전해져옵니다. 눈이 쌓일수록 가지고 있던 알량한 욕심과 보잘것없는 지식들을 송두리째 버리고 홀로 서 있는 숲의 겨울나무처럼 시인 자신도 헛된 욕심, 세상 자랑을 버리고 오로지 ‘사랑하는 그대’만 변함없이 기다리겠노라 고백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어릴 적 자주 불렀던 이원수 작사, 정세문 작곡의 ‘겨울나무’ 동요는 겨울나무를 보면 아직도 흥얼거려지는 노래이기도 합니다. ‘나무야 나무야 겨울나무야 / 눈 쌓인 응달에 외로이 서서 / 아무도 찾지 않는 추운 겨울을 / 바람 따라 휘파람만 불고 있느냐’는 노랫말은 평생 늘 한 자리를 지키며 봄 여름 가을 겨울 휘파람만 불고 있는 존재로 겨울나무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장석주 시인은 '겨울나무'라는 제목의 시에서 이런 모습을 '당분간 폐업합니다 이 들끓는 영혼을 / 잎사귀를 떼어버릴 때 / 마음도 떼어버리고 / 문패도 내렸습니다'라는 재미난 표현을 했습니다. 무성했던 잎사귀들을 '들끓는 영혼'이라고 노래한 것이 흥미롭습니다. 이상진 시인은 '인생도 겨울나무 같아야'라는 시에서 겨울나무가 겪는 고난과 그 속에서도 꽃을 피워내는 아름다움을 '맨살을 파고드는 칼바람을 / 우듬지의 노래로 참아내고 / 빙설(氷雪)의 눈물을 / 꽃보다 아름다운 눈꽃으로 피워 / 옹골진 나이테로 자라는 겨울나무'라고 노래하면서, 그 외롭고 고단한 모습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봄은 그냥 오는 게 아니다 / 겨울나무가 죽음의 터널을 지나 / 옹골진 나이테로 / 생명이 깊고 견고해져 / 새순을 내어야 봄인 것이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무성한 잎을 떨구고 하늘 향해 두 팔 벌려 서 있는 '겨울나무'를 보고 노래한 시들이 참 많은 것은 아마도 겨울나무의 모습 자체가 수도자(修道者)의 그것과 많이 닮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한 해를 보내고 또 다른 한 해를 기다리는 이즈음에 ‘눈보라 치는 겨울 숲’을 만난 박노해의 시는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눈보라 치는 겨울 숲에서
- 박노해
눈보라 치는 겨울 숲에서
나는 울었다
내가 이룬 것들은 눈처럼 흩날리고
내가 이룰 것들은 앞이 보이지 않고
눈보라 치는 겨울 숲에서
벌거벗은 나무처럼 나는 울었다
가릴 것도 기댈 것도 없는
가난한 처음 자리에
내가 가진 하나의 희망은
벌거벗은 힘으로 살아있는 거라고
겨울나무의 뿌리처럼 눈에 띄지 않아도
어둠 속에서 내가 할 일을 해나가는 거라고
눈보라 치는 겨울 숲에서
나는 울었다
벌거벗은 힘 하나로
나는 웃었다
차디찬 한겨울 복판에서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벌거벗은 나무처럼 느껴질 때, 시인은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고 노래합니다. 내가 가진 하나의 희망은 나무처럼 ‘가릴 것도 기댈 것도 없는 / 가난한 처음 자리에’서 벌거벗은 힘으로 사는 것뿐이라고. 벌거벗은 힘으로 비록 ‘눈에 띄지 않아도 / 어둠 속에서 내가 할 일을 해나가는 거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시인은 마치 ‘겨울나무의 뿌리처럼’ 그렇게 살겠노라고 결심합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주간입니다. 겨울나무 앞에서 노래한 시인들의 노래처럼, 새해에는 ‘내가 이룬 것들은 눈처럼 흩날리고 / 내가 이룰 것들은 앞이 보이지 않’지만, 그저 나약하게 울고만 있을 일이 아니라 ‘머리끝까지 눈을’ 눈사람처럼 뒤집어쓰는 한이 있더라도 그 자리에 ‘눈사람 되어 서 있는 일’, 그리고 ‘벌거벗은 힘 하나로’ 맘껏 웃는 자리에 서 있어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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