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사마천 / 견딜 수 없는 것 - 박경리

석전碩田,제임스 2024. 12. 18. 06:00

사마천(司馬遷)

- 박경리

그대는
사랑의 기억도 없을 것이다
긴 낮 긴 밤을
멀미같이 시간을 앓았을 것이다
천형(天刑) 때문에
홀로 앉아 글을 썼던 사람
육체를 거세 당하고
인생을 거세 당하고
엉덩이 하나 놓을 자리 의지하며
그대는
진실을 기록하려 했는가

- 시집 <자유>(솔 출판사, 1994)

* 감상 : 박경리. 시인, 소설가.

1926년 10월 28일(음력)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박금이’입니다. 아버지의 방랑벽 때문에 어릴 적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야 했습니다. 1946년 진주여고를 졸업한 해 중매로 일본 유학까지 갔다온 김행도와 결혼, 1남 1녀를 얻었고 인천으로 올라와 잠시 초등학교 학생을 가르치기도 하고 헌책방을 운영하기도 했지만 그만두고 현재 세종대학교의 전신인 서울 가정보육사범학교 가정과에 입학했습니다. 졸업 후에는 황해도 연안여중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지만 한달도 못하고 전쟁이 발발, 그만두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지만 남편이 공산당에 입당했다는 죄목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이후에 다른 형무소로 이송 도중 행방불명되었다는 소식만 접하고 생이별하고 맙니다. 두 아이를 데리고 고향 통영으로 내려온 박경리는 딸이 다녔던 초등학교의 음악 선생과 재혼을 하지만 주위의 곱지 않은 시선과 아이 양육 문제 등으로 1년 만에 갈라서고, 휴전 후 다시 서울로 올라와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며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이때 아홉 살이던 아들이 산에 놀러 갔다가 사고로 죽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녀를 소설가로만 알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박경리는 1955년 김동리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소설 <계산>을 발표하기 전, 이미 시로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있었고 그녀의 생애 다섯 권의 시집을 상재한 시인이었습니다. 그녀가 근무했던 서울 상업은행 사보(社報)에 장시 ‘바다와 하늘’을 발표한 것이 1954년 6월이었습니다.

단 작품인 ‘계산’은 원래 박경리가 쓴 제목은 ‘불안지대’였는데, 김동리가 55년 8월호 <현대문학>에 ‘계산’이라는 제목, 그리고 작가 이름도 ‘박금이’ 대신 필명인 ‘박경리’로 일방적으로 추천하여 발표하였습니다. 그다음 해인 1956년, 소설 ‘흑흑백백’이 다시 추천되면서 추천 완료되어 등단하였습니다. 소설가로 등단한 후에도 그녀는 꾸준히 시를 발표하여, <못 떠나는 배>(지식산업사, 1988), <도시의 고양이들>(동광, 1990), <자유>(솔, 1994), <우리들의 시간>(나남, 2000), 그리고 유고 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마로니에북스, 2008) 등의 시집을 냈습니다.

후 <불신 시대>(1957), <김약국의 딸들>(1962), <시장과 전장>(1964), <파시>(1968) 등의 장편 소설을 잇달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1969년 대하소설 <토지>를 월간인 <현대문학> 9월호에 연재하기 시작하여 1994년 탈고하기까지 무려 26년이란 세월 동안 집필에 몰두했습니다. 권수로 21권이며, 원고지 분량으로는 3만 1200장에 이르고, 등장하는 인물은 무려 700명에 달하는 대역작이었습니다. 홀로 키운 딸(김영주)은 김지하 시인과 결혼했고, 박경리는 사위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돼 옥고를 치르는 동안 딸의 가족 뒷바라지를 하면서도 집필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경리는 아들을 잃은 후부터 담배를 피기 시작했는데, 이후 한시도 담배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때문인지 폐암과 뇌졸중으로 2008년 5월 5일, 향년 81세의 다소 아쉬운 나이에 별세하였습니다. 그녀가 타계한 후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 문학상인 [박경리 문학상]이 제정되었으며, 고향 통영과 토지의 무대가 되었던 경남 하동, 그리고 말년에 그녀가 거주했던 원주 등 총 3곳에 <박경리 문학관>이 세워질 정도로 한국 문학에서 그녀가 차지하는 위치는 확고합니다.

난주 금요일 밤 꿈을 꾸었습니다. 밤새도록 뒤척이며 꾼 꿈은 결국 몇 표 차이로 탄핵이 가결되는 꿈이었지요. 그리고 14일 토요일 아침이 밝았고, 내 마음과 입에선 하루 종일 노래의 곡조 하나가 흥얼거려졌습니다. '주여, 지난밤 내 꿈에 뵈었으니 그 꿈 이루어 주옵소서' 그리고 토요일 이른 저녁, 똑같은 상황의 가결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이런 걸 '데쟈뷰'라고 하나요?

러다가,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 무섭기도 했지만 /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 나를 지탱해 주었고 / 사마천(司馬遷)을 생각하며 살았다’(시 ‘옛날의 그 집’ 중에서)고 노래했던 박경리 시인의 시가 불현듯 생각이 났습니다.

마터면 유혈 사태가 벌어질 뻔했던 아찔했던 순간을 생각하면 할수록 소름이 돋았고, 이제 더 이상 이런 불안한 상황이 지속되어서는 안된다는 절박감이 있었습니다. 남자로서는 치욕스런 궁형(宮刑)을 당해 거세당하는 고통 중에서도 인고(忍苦)하며 자신을 곧추세워, 결국 후세 사람들이 교과서처럼 읽는 <사기(史記)> 집필을 완성하여 사성(史聖)이 되었던 사마천를 생각했던 박경리. 이래선 안된다는 당혹스러운 절박감 속에서 그녀의 시가 생각났던 건 왜일까. 박경리가 그토록 생각했던 사마천. 그가 어떤 삶을 살았길래 그녀는 힘들 때마다 사마천을 생각했던 것일까.

마천((司馬遷),

BC 145년 ~ BC 86)은 중국 한 무제 때의 사관(史官)이었습니다. 흉노와의 전쟁에서 투항하여 포로가 된 친구 ‘이릉(李陵)’ 장군을 아무도 변호해 주지 않는 상황에서 의분(義憤)을 가지고 나서서 변호하다가 한 무제의 노여움을 사, 궁형(宮刑 : 남성의 생식기를 잘라내는 형벌)의 처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남은 인생을 그대로 끝낸 게 아니라, 인고(忍苦)하면서 최고의 역사서 <사기(史記)>를 죽간에 기록했던 사람입니다. 친구 이릉이 비록 패하긴 했지만, 5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유목 민족인 흉노의 기마병 3만 명과 맞서 싸워야 해서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고 말했다가 그런 변을 당했던 것입니다.

는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그의 친구 임안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人固有一死(인고유일사)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지만 / 或重於泰山(혹중어태산)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도 무겁고 / 或輕於鴻毛(혹경어홍모) 어떤 죽음은 기러기 털보다도 가볍다 / 用之所趣異也(용지소취이야) 그것은 죽음을 이용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는 비록 거세(去勢)를 당해 남자로서, 인간으로서 모든 치욕을 당했지만 그 지점에서 멈추지 않았고,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삶인지’ ‘어떻게 죽는 것이 잘 죽는 길인지’ 생각하면서 치욕을 참고 참으면서, 자신이 이루고자 했던 역사서 완성에 치열하게 목숨을 걸었던 것입니다. 박경리 작가가 힘들 때마다, 또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사마천의 삶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삶을 지탱하면서 다시 곧추세울 수 있었던 이유일 것입니다.

1988년 <토지>를 쓰면서 틈틈이 썼던 시들을 묶어냈던 시집 <못 떠나는 배>에 실려 있는 시 한 편을 더 읽어보겠습니다.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꿰뚫는 대역작을 집필하면서, 그녀의 마음을 견딜 수 없게 했던 것들이 있었다고 하니 시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볼 일입니다.

견딜 수 없는 것

- 박경리

단구동에 이사온 후
쐐기에 쏘여
팔이 통통 부은 적이 있었고
돌 틈의 땡삐,
팔작팔작 나를 뛰게 한 적도 있었고
향나무 속의 말벌 때매
얼굴 반쪽 엉망이 된 적이 있었고

뿐이랴
아카시아 두릅 찔레도
각기 독을 뿜으며
나를 찔러댔다

뿐이랴
베어놓은 대추나무
끌고 가다가
종아리 부딪쳐 피투성이 되던 날
오냐,
너가 나에게 앙갚음을 하는구나
아픔을 그렇게 달래었지만

차마 견딜 수 없는 것은
나보다 못산다 하여
나보다 잘산다 하여
나보다 잘났다 하여
나보다 못났다 하여

검이 되고 화살이 되는
그 쾌락의 눈동자
견딜 수가 없었다

- 시집 <못 떠나는 배>(지신산업사, 1988)

녀가 참으로 참을 수 없어 했던 것은 ‘나보다 못산다 하여 / 나보다 잘산다 하여 / 나보다 잘났다 하여 / 나보다 못났다 하여 // 검이 되고 화살이 되는 / 그 쾌락의 눈동자’였습니다. 서로 미워하고 비교하고 또 자기 욕심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억누르고 짓밟는 못된 행위들을 싸잡아서 ‘쾌락의 눈동자’라고 표현한 것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삶을 살아가면서 치열한 의분 없이 ‘흐리멍덩하게’ 살다 보면 견딜 수 없는 ‘괘락의 늪’에 빠지고 만다는 것을 그녀는 앞을 내다보는 혜안(慧眼)으로 이미 알았던 탓일까요. 국민을 향해, 검과 화살을 겨누는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까지도 말입니다.

“문왕은 갇힌 몸이 되어 주역(周易)을 연역하였고, 공자는 곤란한 처지를 당하여 춘추를 지었다. 굴원은 쫓겨나는 신세가 되어 <이소>를 지었고, 좌구는 눈이 멀어 <국어>를 남겼다. 손빈은 발이 잘리고 <병법>을 편찬하였고, 여불위는 촉나라로 유배된 후 세상에 <여씨춘추>를 전했으며, 한비는 진나라에 잡히고서야 세상에 <세난, 고분>을 저술하였으며 시경의 300편 시는 대개 성현이 발분(發憤)하여 지은 것이다”

마천이 ‘열전’편 서문에 자신이 <사기(史記)>를 쓴 경위를 고백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선인(先人)들을 일일이 예로 들면서, 그들 모두가 의분(義憤) 내지는 발분(發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마치 박경리의 목소리가 ‘데자뷰’처럼 들려오는 듯합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