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야(除夜)
- 배한조
한밤에
눈이 소복이 내렸다.
그동안 있었던 모든 일이
눈 속에 묻히고 세상은
하얀 화선지다.
화선지 밑에는 그려진 밑그림이
보일락말락 흐려지고 있다.
연말 동참 모임도, 향우회 송년회도, 퇴직자 모임도,
종친회의 연말 송년회까지, 그리고
오늘은 올해 마지막 새벽 수영도 끝났다.
누군가에게 준 아픔은 없었는지
갚아야 할 마음의 빚은 없는지
유엔난민기구에 자동이체했던
기부금마저 끊고 나니 편치 않은 마음이 도사린
그믐날의 밤은 깊어 가고 있다.
오늘이 지나면 또 오늘이 오고
올해가 지나면 또 올해가 온다는 걸 알지만
매번 그랬던 것처럼 수없이 맞는 이 마지막 밤,
그려졌던 희미한 밑그림은
이 마지막 밤에도 또
변함없이 아쉬움으로 가득하다.
저 하얀 화선지 위에
또 무엇을 그려야 할까?
아니, 무엇이 그려질까?
- 시집 <만남과 헤어짐 사이>(우리시 움, 2024)
* 감상 : 배한조.
시인. 호(號)는 이당(耳堂). 1957년 경북 성주군 대가면 도남리 자리섬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서울 오산고, 서울과학기술대학교의 전신인 경기공업대 기계과를 나와 평생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지난 2018년 퇴직하였습니다.
배 시인은 저와는 특별한 관계입니다. 4촌 형님의 아들이니 촌수로 치면 5촌 조카, 그리고 호칭으로 말하자면 종질(從姪)입니다. 조카라고 하지만 나이는 나보다 몇 년 선배여서 어릴 적부터 마치 친형제처럼 함께 해 온 삶의 지기(知己)입니다. 평소 모든 부분에서 그를 닮아보려고 하는 저에게 있어선 어떤 의미에서 ‘인생의 스승’이요 ‘도반(道伴)’이기도 합니다. 붓글씨와 서화(書畫) 실력은 이미 공식 시화전에서 당당히 입상할 정도로 경지에 다다른 그에게서는 옛 ‘선비’의 향기가 납니다. 느지막한 나이에 시를 접한 후 여전히 텀벙 뛰어들지 못하고 그 언저리만 이렇게 맴돌고 있는 저와는 반대로, 그는 그 미지(未知)의 시 세계로 용감하게 뛰어들었고 이제 그 세 번째 시집을 내게 된 것입니다. 외람된 말이지만, 제가 호(號)로 사용하고 있는 '석전(碩田)'이라는 이름도 그가 멋진 붓글씨 작품과 함께 지어 준 것입니다.
2015년 <한국문학작가회>의 시 부문 신인상으로 등단하였습니다. 시집으로 <저녁노을 바라보며>(창작과 의식, 2018), <스페이스 바>(우리시 움, 2021), <만남과 헤어짐 사이>(우리 시 움, 2024) 등이 있습니다. 현재, [우이서당 詩.書.畵]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연말연시, 그야말로 송년 모임이 줄을 잇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시인이 이번에 상재(上梓)한 시집, <만남과 헤어짐 사이>를 읽어 내려가다 공감 가는 페이지를 살짝살짝 접어놓은 시들이 여러 편. 그중에서 오늘 감상하는 바로 이 시가 이즈음의 풍경을 너무도 잘 표현한 게 아닌가 싶어 ‘아침에 읽는 한 편의 시’로 골라봤습니다.
시의 첫 문장을 읽으면, 며칠 전 내린 올해 첫눈이 폭설이 되어 소복하게 온 천지를 하얗게 만들었던 날 이 시를 건져 올린 건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시인은 온 사방이 하얗게 변해 버린 모습을 보며 '하얀 화선지'를 떠 올렸나 봅니다. 그리고 해마다 한 해가 가고 또 다른 한 해를 맞는 섣달그믐날, 제야(除夜)의 상념(想念)들을 소환하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준 아픔은 없었는지 / 갚아야 할 마음의 빚은 없는지’, 심지어 그동안 계속해 왔던 ‘유엔난민기구에 자동이체’로 기부했던 것을 정리했던 지난날의 행위마저 누군가에게 아픔을 준 행동처럼 느껴져 ‘편치 않은 마음’으로 자신을 반성하고 있는 시인의 모습이 보입니다.
한 해를 시작하면서 세웠던 수많은 계획과 포부들을 시인은 ‘밑그림’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많은 밑그림을 그렸지만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날 되돌아보면 ‘변함없이 아쉬움으로 가득’한 것이 우리 네 삶이라고 시인은 회한에 찬 마음을 쏟아놓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일부러 무엇을 이루려고 하기보다는 순응(順應)하는 마음으로 그저 받아들이겠다고, ‘저 하얀 화선지 위에 / 또 무엇을 그려야 할까? / 아니, 무엇이 그려질까?’ 겸손하게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집에 실린 시들은 대부분 시인이 삶의 현장에서 건져 올린 생활 시편들로, 유교적인 가르침과 불교적인 깨달음의 기반 위에서 삶의 본질을 깊이 탐구하는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진지하게 답하는 주옥같은 서정시들입니다. 삶이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에 대답한 시로 ‘산다는 것’이란 제목의 시를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산다는 것
- 배한조
산다는 것은
들숨과 날숨 사이에서
곡예를 하는 것이다.
그토록 슬펐어도
숨 한 번 내쉬고 아버지를 보냈고
크게 한 번 들이쉬고
앞을 향해 걸었다
그러고 보면 소년 시절
그토록 짝사랑하던
야마꼬도 그렇게 보냈고,
믿었던 사람들이 배신하여 모함할 때는
하늘도 사라지고 없었지만
그때도 그렇게 보냈다
크게 한 번 내쉬는 것은
지난 일을 역사 속에 묻는 일이고
크게 한 번 들이쉬는 것은
미래로 향하는 걸음을 내딛는 일이다.
모두
들숨과 날숨 사이에서 그렇게
옥신각신 사는 것이다
- 시집 <만남과 헤어짐 사이>(우리시 움, 2024)
시인에 의하면, 산다는 것은 뭔가 유별난 게 아니라, 그저 ‘들숨과 날숨 사이에서 / 곡예를 하는 것’, ‘들숨과 날숨 사이에서 그렇게 / 옥신각신 사는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코로나19가 한창 창궐할 때인 지난 2021년, 시인의 아버지인 저의 사촌 형님은 끝내 이승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먼 길을 황망히 떠나셨습니다. ‘그토록 슬펐어도 / 숨 한 번 내쉬고 아버지를 보냈’던 시인은, ‘크게 한 번 들이쉬고 / 앞을 향해 걸었’노라고 노래하며, 아버지를 보낸 슬픔을 딛고 일어섰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들숨과 날숨’, 그 찰나 같은 짧은 사이를 오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일희일비(一喜一悲) 할 이유도 없고, 또 뽐내 자랑하거나 크게 슬퍼할 이유도 없는 것이 우리 삶인데, 한 해를 보내고 한 해를 맞는 이즈음에 우리는 그동안 너무나 ‘옥신각신’하지는 않았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볼 일입니다.
지난주에 내린 첫눈은 여러 가지 기록을 세웠습니다. 무려 117년 만에 내린 11월의 폭설, 또 첫눈이 폭설이 되었는데 흔히 들어보지도 못한 습설(濕雪)이어서 많은 나무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꺾이는 수난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내 질척거린 눈 때문에 도심의 거리는 온통 진창이 되고 말았지요.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지만, 시집에 실린 시 중에는 이런 진창이 된 눈을 예언이라도 한 것처럼 노래한 시가 있어, 글을 마무리하기 전에 읽어보려고 합니다.
눈
- 배한조
도심의 거리에 내린 눈은
주정뱅이의 시커먼 구애처럼 질척거린다
코로나 때 과도하게 뿌려진 금전처럼
마구 뿌려진 염화칼슘이 열을 내고
사람 모습을 한 짐승들은 모두
활화산의 화염처럼 불만을 쏟아 낸다
진창에서 흰빛을 잃었듯
정의와 불의는 한통속이 된 짬뽕이다
짬뽕 국물에서는 마늘 맛을 찾아낼 수 없다
주정뱅이가 토해 낸 구토물에도
마늘은 보이지 않는다
마른 거리에는
희끄무레한 염화칼슘이 아스팔트를 뒤덮었고
아무도 흰 눈은 보지 못했다
다만,
산속에 하얗게 화선지가 펼쳐지고
까치는 팔짝팔짝 제 그림을 찍고 있었다
- 시집 <만남과 헤어짐 사이>(우리시 움, 2024)
‘내가 옳다 네가 그르다’ 서로 핏대를 올리며 싸움박질만 일삼는 ‘사람 모습을 한 짐승’들의 한통속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분명히 첫눈으로 흰 눈이 내리긴 했는데, 흰빛을 잃고 질척이는 진창과 구토물만 보였을 뿐, 누구도 흰 눈을 보지 못했으니 이 어찌 통탄할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오히려, 멀리 보이는 북한산 ‘산속에 하얗게 화선지가 펼쳐지고 / 까치는 팔짝팔짝 제 그림을 찍고 있었’다고 노래하는 시인의 목소리는 ‘까치보다 못한 짐승들’이라는 호통 소리 죽비(竹篦)가 되어 귓가에 들려옵니다.
모름지기, 다가오는 새해엔 ‘크게 한 번 내쉬는 것은 / 지난 일을 역사 속에 묻는 일이고 / 크게 한 번 들이쉬는 것은 / 미래로 향하는 걸음을 내딛는 일’임을 깨달아,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고 하얀 화선지 위에 선명한 ‘제 그림’을 그려나갈 수 있길 소망해 봅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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