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한 시절
- 이장희
어느덧 가을은 깊어
들이든 뫼이든 숲이든
모다 파리해 있다
언덕 우에 오뚝히 서서
개가 짖는다
날카롭게 짖는다
비 – ㄴ 들에
마른 잎 태우는 연기
가늘게 가늘게 떠오른다
그대여
우리들 머리 숙이고
고요히 생각할 그때가 왔다
- 합동 시집 <상화와 고월>(청구 출판사, 1951, 백기만 編著),
* 감상 : 이장희(李章熙).
시인. 번역 문학가. 1900년 11월 9일 경상북도 대구에서 태어났고 1929년 11월 3일, 스물아홉 살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처음 태어났을 때 그의 이름은 ‘양희’였으나 20세가 되던 해인 1920년 4월 개명하여 호적에는 이장희(李樟熙)로 등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작품을 쓰기 시작하면서 ‘장희(章熙)로 썼는데 이것이 그의 필명(筆名)이 되고 말았습니다. 본관은 인천(仁川)이고, 호(號)는 고월(古月)입니다.
이장희는 당대 손꼽히는 부호(富豪)이자 중추원 참의를 지낸 아버지 이병학과 박금현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다섯 살 때 어머니를 잃고 이후 계모인 박강자, 조명희 등 계모 밑에서 성장하며 아버지와 불화했습니다. 아버지 이병학은 두 번째 부인과 5남 6녀를 두었고, 이장희가 죽기 5년 전에 셋째 결혼을 하였으며 그 외에 측실(側室)도 1명 두었다고 전해집니다. 이장희가 요절할 당시 형제가 무려 10남 8녀였다고 하니 매우 복잡한 가계(家系)였습니다. 부친이 중추원 참의로서 일본인들과의 교제가 빈번하여 아들 이장희 시인에게 중간 통역을 맡기려 했으나, 이장희 시인은 한 번도 복종하지 않았고 총독부 관리로 취직하라는 지시도 거역하여 부친은 아들을 버린 자식으로 취급, 아주 단념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장희는 극도로 빈궁한 삶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복잡한 가정 환경, 그리고 아버지와의 대립과 갈등, 자존심이 강했던 천성(天性) 탓 등으로 신경 쇠약으로 고생하다가 끝내 자택에서 쥐약을 먹고 스스로 자결하였습니다.
경상북도 대구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교토(京都) 중학교를 졸업하였다고 전해 지지만 최근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의 입학 내지는 졸업 관련 자료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교토중학교 시절부터 글을 썼다고 전해 지지만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건 1924년 친구인 목우 백기만의 주선으로 <금성(金星)> 동인이 되면서부터입니다. 이장희는 1924년 5월 <금성 3호>에 시 '실바람 지나간 뒤' '새 한 마리' '불노리' '무대' '봄은 고양이로다' 등 5편과 톨스토이 원작 소설을 번역한 <장구한 귀양>을 발표했습니다. 이후 <신민>, <생장>, <여명>, <신여성>, <조선 문단> 등의 잡지에 ‘동경’, ‘석양구’, ‘청천의 유방’, ‘하일소경’, ‘봄철의 바다’ 등 30여 편을 발표하였고 1929년 11월까지 그가 발표한 시는 총 40여 편이었습니다.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그의 이름으로 생전에 출간된 시집은 없습니다. 그의 사후, 1951년 친구 백기만이 청구 출판사에서 펴낸 <상화와 고월> 합동 시집에 그의 시 11편이 실려 전해지다가, 1982년 제해만이 <이장희 전집>(문장사)을, 1983년 김재홍이 <이장희 전집 평전>(문학 세계사)을 연달아 내면서 그의 유작(遺作)들이 모두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발굴되어 전해지는 시는 34편뿐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서 동일한 기간에 활동했던 평안도의 소월(素月, 1902~1934)과 경상도의 고월(古月, 1900~1929)을 일컬어 ‘북쪽과 남쪽을 지키는 두 개의 달’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달처럼 환하게 빛나다가 일찍 지고만 요절 시인들이었습니다. 또 부자로 태어났으면서도 자발적으로 가난하게 살았던 그는 속세 권력에 마음을 두지 않았고, 친일(親日)에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탓에 교우관계는 그리 넓지 않아 양주동, 유엽, 김영진, 오상순, 백기만, 이상화, 현진건 등 극히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오늘 감상하는 시는 며칠 전 어느 방송사에서 대충 사과하고 넘어가버린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 기자회견에 항의하는 뜻으로 ‘언덕 우에 오뚝히 서서 / 개가 짖는다 / 날카롭게 짖는다’는 부분만 거두절미(去頭截尾) 인용하며 서늘하게 보도하는 것을 보고, 이참에 이 시를 제대로 한번 읽어보는 것도 의미 있겠다고 싶어 꺼내 보았습니다. 물론 이 시에서 시인이 ‘개가 짖는다’고 표현한 것이 그 방송 기자가 의도했던 것처럼 그런 의미로 쓰지 않았음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평소 친일을 싫어했고 또 날카롭고, 정결하고, 섬세한 성정(性情)을 가진 시인이 쓸쓸한 가을 서정 노래에 특별히 개를 등장시킨 이유가 감상하는 독자의 해석 여하에 따라 ‘서늘한 가을날의 정신’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해 봅니다.
그 ‘가을날의 정신’이란. 시인이 시를 마무리하면서 독자에게 되물어 보는 물음 속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합니다. ‘그대여 / 우리들 머리 숙이고 / 고요히 생각할 그때가 왔다’는 표현이 그것인데, 지금 우리는 어디쯤 와 있으며, 또 이곳에 서 있는 우리는 도대체 무엇이며,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우리가 잘 사는 것인지를 물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라는 것입니다.
지난 한 주는 내내 우울했습니다. 그리고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대구 출신이었던 이장희 시인이 운명을 달리 했던, ‘11월 3일이라는 날’이 소름 끼치게 다가온 한 주간이었습니다.
매일 아침 배드민턴 운동을 함께 해 온 회원 한 분이 딱 한 달 전에 음식이 기도(氣道)로 잘못 넘어가는 바람에 그 길로 중환자실로 직행했는데,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떠난 날이 바로 11월 3일이었습니다. 아침마다 늘 뵙던 분이 갑자기 허망하게 우리 곁을 떠났다는 사실이 내내 믿어지지 않았는데, 지난 8일(금)에는 이보다 더 큰 슬픈 소식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11월 6일에 예정된 고향 마을의 행사에 참석하는 일 때문에 그 일주일 전, 그와 길게 통화하면서 이번 행사에는 우리 둘이 모두 참석하지 못해서 아쉬워했던, 고향 마을의 그 후배가 대구의 자택에서 11월 3일, 부부가 함께 절명했다는 비보(悲報)였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연락이 닿지 않아 서울에 사는 자녀들이 신고했고 경찰이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말할 수 없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진 후였는데, 연락이 닿지 않은 시간을 추정해 보니 결국 11월 3일(일)이 그날이라고 하니, 우연의 일치치고는 너무도 소름이 돋는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큰 슬픔, 그리고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충격.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한 치 앞을 모른다는 말이 맞구나’하는 황당함이 지금까지 내내 마음을 슬프게 했습니다. 그야말로 깊어가는 이 가을, ‘쓸쓸한 시절’이라는 시가 확 다가온 순간이었다고나 할까요.
요절한 이장희 시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시 ‘봄은 고양이로다’를 읽지 않고 그냥 지나가기는 아쉬워서 다시 한번 꺼내 읽어보겠습니다. 당시로서는 이미지를 생생하게 표현하는 감각적인 시를 쓰는 ‘한국의 보들레르’로 불릴 정도로 치밀한 관찰력을 탁월한 시어로 풀어내는 상징주의 시인으로 평가되었습니다.
봄은 고양이로다
- 이장희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 1924년 5월 <금성(金星)> 1호에 발표
시인은 봄은 고양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이 둘이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것인데, 부드럽고 고운 털과 봄의 향기(1연), 고양이의 동그란 눈망울과 봄의 불길(2연), 꼭 다문 고양이 입술과 졸음에 겨운 봄의 포근한 고요(3연), 날카로운 수염과 봄의 생동감(4연)을 대비시키며 열거하고 있습니다. 이 시가 나른한 봄에 고양이가 졸음에 겨워 누워있는 모습을 그저 단순하게 노래하는 듯하지만, 실상은 시를 읽고 나면 시인이 느낀 감각을 이미지로 구축해 독자들도 그 느낌을 그대로 느끼게 합니다. 이 시의 매력입니다.
11월에 나서 11월에 떠난 시인의 시를 감상하면서, 묘하게도 시인과 같은 날 운명을 달리한 지인들을 생각해 봤습니다. 그래서 더욱 쓸쓸한 시절, 우울한 가을날이 깊어 가고 있습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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