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열어라
- 허형만
산 설고 물설고
낯도 선 땅에
아버지 모셔드리고
떠나온 날 밤
문 열어라
잠결에 후다닥 뛰쳐나가
잠긴 문 열어제치니
찬바람 온몸을 때려
꼬박 뜬눈으로 날을 샌 후
문 열어라
아버님 목소리 들릴 때마다
세상을 향한
눈의 문을 열게 되었고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고
그러나 나도 모르게
그 문 다시 닫혀졌는지
어제 밤에도
문 열어라
- 시집 <비 잠시 그친 뒤>(문학과 지성사, 1999)
* 감상 : 허형만 시인.
1945년 10월 26일(음) 전라남도 순천에서 태어났습니다. 순천고등학교, 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성신여자대학교에서 국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72년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하면서 <중대신문>이 주최하는 현상 문예에 시 ‘제대병’이 당선되었으며, 이듬해 1973년 <월간 문학>에 시 ‘예맞이’로 신인상에 입상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시집으로 <청명>(평민사, 1978), <풀잎이 하나님에게>(영언문화사, 1984), <모기장을 걷는다>(오상출판사, 1985), <입맞추기>(전예원, 1987), <이 어둠 속에 쭈그려앉아>(종로서적, 1988), <공초(供草)>(문학세계사, 1988), <진달래 산천>(황토, 1991), <풀무치는 무기가 없다>(책만드는집, 1995), <비 잠시 그친 뒤>(문학과지성, 1999), <영혼의 눈>(문학사상, 2002), <첫차>(황금알, 2005), <눈먼 사랑>(시와 사람, 2008), <그늘이라는 말>(시안, 2010), <불타는 얼음>(고요아침, 2013), <가벼운 빗방울>(작가 세계, 2015), <황홀>(민음사, 2018), <음성>(언어의 집, 2020), <만났다>(황금알, 2022) 등이 있습니다. 시선집으로 <새벽>(대정진, 1993), <따뜻한 그리움>(시와 사람, 2008), <있으라 하신 그 자리에>(문예바다, 2021), 그리고 평론집으로 <시와 역사 인식>(열음사, 1988), <우리 시와 종교 사상>(김향문화재단, 1990), <영랑 김윤식 연구>(국학자료원, 1996), <문병란 시 연구>(시와사람, 2003), <오늘의 젊은 시인 읽기>(시와사람, 2003), <박용철 전집 – 시집 주해>(깊은샘, 2004), <시문학 !,2,3호 주해>(문학사상사, 2008) 등이 있습니다.
소파 문학상, 전남 문화상, 평화 문학상, 우리 문학 작품상, 편운문학상, 한국 예술상, 한국시인협회장, 심연수 문학상, 펜문학상, 한성기 문학상, 광주문화예술대상, 순천 문학상, 월간문학 동리상, 영랑 시문학상, 문병란 문학상, 공초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중국 옌타이대학교 교환교수, 목포 현대시연구소 소장, 광주전남현대문학연구소 이사장, 한국 카톨릭 문인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국립 목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고 재직 중 인문대학장, 교육대학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지난 2010년 정년 퇴임, 현재 명예교수입니다.
허형만 시인은 2개월 전 열대야가 연일 계속되고 있는 8월 말, ‘처서’와 ‘풀벌레 소리’라는 제목의 시를 감상하면서 소개했던 시인입니다. 퇴직 후 고양시 원당에 거처를 정한 후, 시작(詩作)뿐 아니라 카톨릭문인회 이사장을 맡는 등 소소한 사회적인 활동도 더 적극적으로 하는 시인입니다.
오늘 감상하는 이 시는 가수 장사익이 ‘아버지’라는 제목으로 곡을 붙여 불러서 더 유명해진 시인데, 그러다 보니 장사익의 노래 제목과 시의 제목이 동일한 줄 알고 있는 사람들도 꽤 있는 듯합니다.
허 시인의 아버지는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오면 대문 앞에서 늘 ‘문 열어라’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시인은 그런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시는 걸 보고서야 잠자리에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소한(小寒) 한겨울 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삼일장 초상을 치른 후, ‘문 열어라’는 아버지의 호통에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는 ‘이제 혼났구나’ 싶어 후다닥 밖으로 나갔더니 찬바람만 휭하니 불고 있었는데, 너무도 생생한 꿈이었다고 합니다. 그 시각이 새벽 3시, 환청이었지만 시인은 바로 그 꿈을 소재로 시를 건져 올린 것입니다. “이제 나 없어도 너 혼자 세상 살아가는 데 있어서 네 눈의 문, 마음의 문을 열라”고 꿈속에서 그에게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음성이 멋진 시로 탄생 된 배경입니다. 장사익의 애절한 곡조로 소리쳐진 ‘얘야, 문 열어라’는 음성은 이 시가 더욱 대중들의 사랑을 받도록 하였습니다.
처음 환청으로 들었던 아버지의 그 음성을 시인은 ‘마음의 문, 눈의 문을 열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버님 목소리 들릴 때마다 / 세상을 향한 / 눈의 문을 열게 되었고 /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고’ 그런 아버지의 가르침을 마음에 두고 살아오며 자신을 성찰할 때마다 스스로 귀를 기울였던 음성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음성이 들리지 않으면 혹시 ‘나도 모르게 / 그 문 다시 닫혀졌는지’ 소스라치게 놀라 자신을 점검하는 진정한 삶의 바로미터(barometer)가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숙연해지는 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의 나이 예순을 바라보는 해에 발간된 시집이었던 <영혼의 눈>, 그 시집의 표제작 시를 한 편 더 감상해 보겠습니다. 아버지가 떠나면서 그에게 일러 준 삶의 정답, ‘마음의 눈, 눈의 문을 열라’는 음성을 듣고 그런 삶을 살아내는 자만이 노래할 수 있는 멋진 시입니다.
영혼의 눈
- 허형만
이태리 맹인 가수의 노래를 듣는다. 눈먼 가수는 소리로 느티나무 속잎 틔우는 봄비를 보고 미세하게 가라앉는 꽃그늘도 본다. 바람 가는 길을 느리게 따라가거나 푸른 별들이 쉬어 가는 샘가에서 생의 긴 그림자를 내려놓기도 한다. 그의 소리는 우주의 흙 냄새와 물 냄새를 뿜어낸다. 은방울꽃 하얀 종을 울린다. 붉은점모시나비 기린초 꿀을 빨게 한다. 금강소나무 껍질을 더욱 붉게 한다. 아찔하다. 영혼의 눈으로 밝음을 이기는 힘! 저 반짝이는 눈망울 앞에 소리 앞에 나는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다.
- 시집 <영혼의 눈>(문학과 지성사, 2002)
시인은 이탈리아의 맹인 성악가 안드레아 보첼리가 부르는 노래를 듣고 있습니다. 눈먼 가수가 부르는 노래지만 그 소리의 힘이 엄청납니다. 맹인 가수는 자신의 그 소리로 ‘느티나무 속잎 틔우는 봄비를 보’기도 하고, ‘미세하게 가라앉는 꽃그늘’을 보기도 합니다, ‘바람 가는 길을 느리게 따라가거나 푸른 별들이 쉬어 가는 샘가에서 생의 긴 그림자를 내려 놓’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소리의 위력은 ‘우주의 흙냄새와 물 냄새를 뿜어’내기도 하고 은방울꽃 하얀 종을 울‘리기도 합니다. ’붉은점모시나비 기린초 꿀을 빨게‘하고, ’금강소나무 껍질을 더욱 붉게‘하기도 합니다.
진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시인이 마음의 눈으로, 또 눈의 문을 열고 예민한 시적 상상력으로 바라보았다는 말입니다. 아버지가 ‘얘야, 문 열어라’ 소리쳤던 그 음성으로 인해, 열린 영혼의 눈을 가진 시인이 바라본 세계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삶의 본질을 예리하게 통찰하는 시인의 능력이 아찔하고 탁월합니다. 눈을 감고 노래를 부르는 맹인 가수의 노래를 들으면서, 시인은 ‘반짝이는 눈망울’을 보았고, 그 앞에서 그 소리 앞에서 ‘나는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다.’고 겸손하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가 노래가 되고, 노래가 시가 되는 멋진 가을날입니다. 모쪼록 이 가을에는 눈으로 보는 것만이 아니라, 마음의 눈 영혼의 눈으로 보면서 밝음을 이기는 힘을 누릴 수 있길 소망해 봅니다. - 석전(碩田)
* 가수 장사익의 ‘아버지’ 듣기
https://www.youtube.com/watch?v=EBkX5CgHosg
* 안드레아 보첼리의 ‘주기도문’, ‘아메마리아’ 듣기
https://www.youtube.com/watch?v=6oElJG1ne7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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