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식한 놈
- 안도현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하지 못하는 너하고
이 들길 여태 걸어 왔다니
나여, 나는 지금부터 너하고 절교다!
- 시집 <그리운 여우>(창비, 1997)
* 감상 : 가을이 깊어 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요즘 산책길에서 만날 수 있는 구절초와 쑥부쟁이, 그리고 개미취 등 우리가 흔히 ‘들국화’라고 뭉뚱그려 부르는 꽃을 노래한 시를 감상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들국화’라는 꽃은 사실 없습니다. 가을이 깊어 가는 이맘때쯤 산과 들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꽃이 ‘들국화’인데, 이 꽃은 국화과에 속하는 다년생 식물로 다양한 품종과 색깔, 모양 등 각기 다른 특성과 고유의 이름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들에서 피는 국화’라는 의미로 ‘들국화’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그중 가장 흔하게 만날 수 있는 들국화가 ‘구절초’와 ‘쑥부쟁이’입니다.
오늘 감상하는 안도현 시인의 시 ‘무식한 놈’에서 시적 화자는 구절초와 쑥부쟁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며, 스스로 ‘무식한 놈’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면, 이 둘을 정확하게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얼마 전 친구들과 산행하는 중 한 친구가 아직도 여기저기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개망초꽃을 보고 들국화라고 말하는 것을 본 적도 있습니다. 비슷하게 생겼으면 모두가 다 들국화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심지어 식물분류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국립 수목원에서 평생을 근무했던 분도 야생 들국화를 구분하는 게 쉽지 않다고 솔직하게 쓴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런 마당에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하지 못한다고 해서 ‘무식한 놈!’이라고 자신을 꾸짖는 시인이 조금 심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아마도 시인은 지식적으로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 세심하게 자연을 관찰하는 태도나 자세’를 말하고 싶었던 듯합니다.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하지 못한다고 사실 그게 무슨 대수겠습니까. 그러나 시인은 그저 ‘들국화’라고 표현할 때와 정확한 이름을 붙여 불러줄 때는 그 사랑스러움과 느낌이 천지 차이라는 것을 알기에, ‘나여, 나는 지금 너하고 절교다!’라고 폭탄선언을 했던 것입니다.
쑥부쟁이는 흰색, 연분홍, 보라 등 색깔이 다양하면서 잎은 가늘고 길게 생겼고, 구절초는 주로 흰색이며 이파리가 쑥처럼 생긴 게 특징입니다. 너무 닮은 꼴이어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헷갈리기 십상입니다. 여기에 개미취나 벌개미취가 가담한다면 그 세세한 구분은 더더욱 어려워집니다. 쑥부쟁이의 종류만도 15가지가 넘는다고 하니 일일이 구분하여 이름을 아는 것은 애초부터 난망한 숙제임은 분명합니다. 그냥 쑥부쟁이에서부터 갯쑥부쟁이, 단양쑥부쟁이, 눈개쑥부쟁이, 섬쑥부쟁이, 미국쑥부쟁이, 개쑥부쟁이, 청화쑥부쟁이, 까실쑥부쟁이 등 비슷비슷한 모양의 꽃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골치가 아플 지경입니다.
하기야 몇 년 전 이른 봄, 부산에 사는 친구와 금정산을 오르다가 어릴 적부터 봐왔던 제비꽃만 제비꽃인 줄 알았다가 흰제비꽃, 흰젖제비꽃, 서울제비꽃, 남산제비꽃, 노랑제비꽃, 졸방제비꽃, 미국제비꽃, 콩제비꽃 등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으로 각기 다른 모양과 색깔의 제비꽃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친구의 말에 의하면 제비꽃 종류만 50가지는 족히 넘는다고 했습니다. 금정산 환경 지킴이를 자처하며 수년간 환경 운동을 해 온 친구가 무릎을 꿇고 보물을 발견한 듯, 자세히 들여다보며 불러주는 제비꽃 이름들이 그때 얼마나 신기하고 이쁘게 다가왔는지 모릅니다.
정일근 시인은 이런 다양한 이름이 있는 쑥부쟁이를 노래하면서, ‘이름 몰랐을 때 보이지도 않던 쑥부쟁이 꽃이 / 발길 옮길 때마다 눈 속으로 찾아와 인사를 한다’고 표현하면서 ‘사랑하면 보이고, 또 자세히 보면 더 사랑스러워진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름을 알면 보이고 이름 부르다 보면 사랑’이 싹 튼다고 하니, 이제는 그저 ‘들국화’라고 할 일이 아니라 적어도 쑥부쟁이인지 구절초인지는 좀 분별을 할 일입니다. 함께 그의 ‘쑥부쟁이 사랑’ 노래를 들어봅시다.
쑥부쟁이 사랑
- 정일근
사랑하면 보인다, 다 보인다
가을 들어 쑥부쟁이 꽃과 처음 인사했을 때
드문드문 보이던 보랏빛 꽃들이
가을 내내 반가운 눈길 맞추다 보니
은현리 들길 산길에도 쑥부쟁이가 지천이다
이름 몰랐을 때 보이지도 않던 쑥부쟁이 꽃이
발길 옮길 때마다 눈 속으로 찾아와 인사를 한다
이름을 알면 보이고 이름 부르다 보면 사랑하느니
사랑하는 눈길 감추지 않고 바라보면, 모든 꽃송이
꽃잎 낱낱이 셀 수 있을 것처럼 뜨겁게 선명해진다
어디에 꼭꼭 숨어 피어 있어도 너를 찾아가지 못하랴
사랑하면 보인다. 숨어 있어도 보인다
- 시집 <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문학사상, 2003)
구절초(九折草)라는 말은 아홉 번이 꺾여야 꽃을 피운다는 의미에서 이름 붙여진 꽃 이름이라고 하니 갑자기 그 사연이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구절초가 피기 시작하면 오래전 들소리 신문사에서 주최한 신인 소설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은 자서전적인 소설 <구절초>(들소리, 2010, 조윤숙 著)가 늘 생각이 나곤 합니다. 가을이 깊어 가는 때 우리 산하(山河)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고 화려하진 않지만 잔잔한 아름다움으로 가을을 수놓는 꽃. 꺾이고 꺾여 아홉 번을 꺾어지면서도 기어이 단아한 꽃을 피워내는 구절초가 소설 속에 있는 주인공의 삶과 너무도 닮아있어 가슴 찡한 감동을 느꼈던 소설이었습니다.
김용택 시인은 이런 구절초를 노래하며, 새하얀 색깔을 많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새하얀 구절초꽃이 ‘물결보다 잔잔하게 피면 가을이 오고, 그 구절초 꽃이 지면 가을이 간다’고 시인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가을엔 온통 구절초꽃 하나만 피면 완벽하게 완성되듯이 애절하게 노래하고 있는 시의 분위기가 인상적입니다.
구절초꽃
- 김용택
하루 해가 다 저문 저녁 강가로
산그늘을 따라서 걷다보면은
해 저무는 물가에는 바람이 일고
물결들이 밀려오는 강기슭에는
구절초꽃 새하얀 구절초꽃이
물결보다 잔잔하게 피었습니다
구절초꽃 피면은 가을 오고요
구절초꽃 지면은 가을 가는데
하루해가 다 저문 저녁 강가에
산 너머 그 너머 검은 산 너머
서늘한 저녁달만 떠오릅니다
구절초꽃 새하얀 구절초꽃에
달빛만 하얗게 모여듭니다
소쩍새만 서럽게 울어댑니다
- 시집 <나무>(창비, 2002)
가을이 깊어지면서 가을을 엮어내는 빛깔들도 하나같이 깊이를 더해가고 있습니다.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하지 못한다고 해서 ‘무식한 놈!’이라고 자책하는 것은 아무리 해도 심했다 싶기도 하지만, 이 가을이 가기 전 산책하다가 가을을 가을답게 꾸미고 있는 가을 꽃들을 만나면 그냥 지나치지 마시고 그 이름을 한 번쯤 확인해서 불러주길 바랍니다. 어쩌면 이름을 불러주는 그 순간 그 꽃들과 가을 사랑에 푹 빠지게 될질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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