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객
- 박철
서삼릉 보리밥집은 이름난 식당
사촌과 점심을 먹고 서삼릉 길을 걸었다
서삼릉 곁에 종마장
시민에게 개방했다는데 인적은 전혀 없고
입구 관리인이 여기도 걷기 좋습니다~ 하고
허공에 소리를 지른다
그 소리가 산자락에 아득하고 여간 무안하여
무인도 같은 종마장 안으로 들어섰다
세상 덧없이 조용한 가을날
울타리 너머 늙은 종마들의 생각은 알 수가 없고
새로 도배한 하늘 아래
자다 깨듯 가끔 말 꼬리를 흔드는데
내 생각도 일체 따라 걸었다
- 시집 <대지의 있는 힘>(문학동네, 2024)
* 감상 : 박철 시인.
1960년 1월, 서울 강서구 개화동(당시에는 김포)에서 태어났습니다. 성남고와 단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1987년 <창비 1987>에 ‘김포’외 14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또 1997년 <현대문학>에 단편 ‘조국에 드리는 탑’이 추천되면서 소설가로도 등단하였습니다.
시집으로 <김포행 막차>(창비, 1989), <밤거리의 갑과 을>(실천문학사, 1992), <새의 전부>(문학동네, 1994), <너무 멀리 걸어왔다>(푸른숲, 1996),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문학동네, 2001), <험준한 사랑>(창비, 2005), <사랑를 쓰다>(열음사, 2007), <불을 지펴야겠다>(문학동네, 2009), <작은산>(실천문학사, 2013), <없는 영원에도 끝은 있으니>(창비, 2019), <새를 따라서>(아시아, 2022), <대지의 있는 힘>(문학동네, 2024) 등이 있으며, 소설집 <평행선은 록스에서 만난다>(실천문학사, 2006), 어린이를 위한 책 <옹고집전>, <선비 한생의 용궁답사기>, <김포 아이들> 등이 있습니다. <시힘> 동인으로 활동 중이며, 문화일보 객원기자로 활동하였습니다. 2006년 단국문학상, 2009년 천상병 시상, 2010년 백석문학상, 2019년 노작문학상, 제16회 이육사 시문학상, 서울 성남고 자랑스런 동문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2년 전 이곳 은평 뉴타운으로 이사오기 전, 개화동의 단독 주택으로 가려고 여러 번 중개사 사무실을 찾아 적당한 집을 알아본 적이 있습니다. 개화산에도 올라 보고 시간만 나면 소심이를 데리고 내촌 마을, 상사 마을, 신대 마을 등 듣기에도 정겨운 개화동 이곳저곳을 산책하면서 탐색하기를 여러 달. 그러나 당시 미친 듯이 오르는 집값 때문에 최종 결정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결국 포기하고 이곳 은평으로 오게 되었지요.
박철 시인이 바로 그 개화동 마을 출신이라는 점, 그리고 이곳 ‘아침에 읽는 한 편의 시’ 코너에서 그의 시를 몇 편 소개하면서 동년배로서 느끼는 시적 감성과 생각하는 결이 비슷함에 적이 놀라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지난달 박철 시인의 새 시집이 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시집을 주문했는데 책이 차일피일 늦어지다가 엊그제야 도착이 되었습니다. 허겁지겁 첫 페이지부터 끝까지 단숨에 다 읽은 후, 또다시 천천히 읽으면서 오늘 함께 감상할 시 세 편을 골라봤습니다. 물론 선정 기준은 특별한 게 없고 그저 ‘물 흐르듯이’ 삶 속에서 건져 올린 소재를 가지고, 이즈음의 나이에 공감할 만한 것들을 노래한 시들입니다.
오늘 감상하는 첫 번째 시 ‘호객’은 내가 자주 가는 단골집인 ‘서삼릉 보리밥집’을 소재로 노래했다는 것 때문에 골라 본 시입니다. 오래전부터 이 보리밥집을 단골로 다녔는데, 몇 년 전부턴 바로 옆에 넓은 잔디밭을 갖춘 애견 카페가 생기면서, 소심이를 데리고 더 자주 가는 단골이 되었습니다. 서쪽에 있는 세 개의 능이 있는 곳이라 하여 이름붙여진 ‘서삼릉’은 서울 가까이 있지만 사람들에겐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왕릉으로, 바로 옆에 종마 목장도 함께 있어 호젓한 산책길로는 제격입니다. 얼마나 사람들이 뜸하게 찾아오면 그곳을 지키는 관리원이 ‘호객 행위’까지 할까요. 주변이 그린벨트 특별 보호 숲으로 지정되어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곳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인과 사촌이 점심 식사로 보리밥을 먹고 바로 옆에 있는 종마 목장길에 들어서는 장면은 눈에 그려지듯이 상상이 갑니다.
두 번째 소개하는 ‘흐르는 강물처럼’이라는 제목의 시는, 지난주에 소개했던 ‘성범영’과 ‘우종영’ 두 분의 이야기를 읽고, <흐르는 강물처럼>이라는 제목의 책 이야기로 답신을 주신 지인분 때문에 골라 본 시입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우리 삶을 차분히 되돌아보며 느끼게 되는 것은 우뚝 솟은 높은 산보다는,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처럼 살고 싶다는 마음인 듯합니다.
흐르는 강물처럼
- 박철
'흐르는 강물처럼'
이 말을 좋아한다
가끔 작게 소리 내 읊조리기도 하는
멀리 북악의 등짝 같은 거기 떨어진 그늘처럼
바라보는 자리에 따라 달리 보이는 강은
막막한 장애물을 떠올리게 하고
안일한 자세를, 때론 너와 나를 가른다
그러나 여러 모습 중에 나는
요란하지 않으나 쉼 없이 낮춰 흐르는
강물의 한자리를 사랑한다 변함없는 나부낌을
그러면서 먼 곳을 향해 나아가는 온갖 힘
끝없는 방황을 좋아한다
그만그만한 광야에 우뚝 솟은 강물의 북악
세상에 없는 바위산을 사모한다
이롭다는 것은 멈추지 않는 것이리라
아무리 애타는 갈증도
물을 움켜쥐고 마실 수는 없지
하늘 보듬어 가난한 이의 손길 펴는 곳
유실이 아닌 부활로써 누구든 끝없이 흐를 때
죽을 만큼 살았다는 강물의 낮은 문장을 좋아한다
흐르는 강물처럼
있는 힘을 다하여 산맥처럼 걸어가는 강
자꾸자꾸 안에서 풀려나오는 강
멀리 가는 길에
내겐 흐른다는 말만한 찬사가 없다
- 시집 <대지의 있는 힘>(문학동네, 2024)
65세, 지공의 나이에 접어든 시인은 ‘요란하지 않으나 쉼 없이 낮춰 흐르는 / 강물의 한자리를 사랑한다 변함없는 나부낌을’ ‘그러면서 먼 곳을 향해 나아가는 온갖 힘’으로 끝없이 흘러가는 강물의 모습을 ‘끝없는 방황’이라 표현했고, 그것을 좋아한다고 노래합니다. ‘내겐 흐른다는 말만한 찬사가 없다’는 그의 마지막 호소는 마치 큰 울림이 있는 종소리가 되어 울려 퍼지는 듯합니다.
아마도, 시인의 친구 중에는 시골 살이를 하며 농사를 짓는 이가 있는가 봅니다. 어느 날 그가 보내온 한 장의 사진을 보면서 노래한 ‘글싹’이라는 시가 세 번째 소개하는 시입니다. 시를 짓는 직업, 즉 시업(詩業)을 하는 시인 자신을 한 장의 사진 속에서 발견해 나가는 것이 이 시의 시적 은유인데, 그 사유(思惟)의 과정을 재미나게 그려낸 멋진 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친구나, 시를 짓는 시인 본인이나 본질적으로 동일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절묘하게 시로 건져 올렸습니다. ‘글싹’이라는 시어도 참 앙증스럽고 사랑스럽습니다.
글싹
- 박철
한식 지나 친구가 사진 하나를 보내왔다
밭을 일구는 사진인데 큰딸이 찍었다 한다
고랑을 파고 부부가 씨를 심는 뒷모습이었다
아내는 앉고 친구는 곁에서 조심스럽게
물주전자를 기울이고 있었다
둥근 어깨와 두툼한 살집이 풍족해 보였다
작은 농사가 아닌가보다
옆 이랑은 벌써 푸성귀가 푸르게 솟아나고 있었다
푸르다지만 색색의 상추와 손박닥 같은 명이나물
수줍은 열무가 뒤엉켜 장난질하는 마당에
아직 철없는 잎새들이 시끄러웠다
어느 하나 제자리가 아닌 것이 없는 장면에
부부는 무엇을 심는지 곱게 북돋은
이랑을 따라가고 있었다
다정한 모습이 글씨 하나하나를 심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내가 한 뼘 간격으로 글자 씨앗을 심고
손가락 두 마디 높이로 흙을 돋아 덮어주고
가볍게 손바닥을 펴서 살살 두드려주면
친구는 곁에서 조심스레 물 한 잔을 뿌려줄 것이다
글자 씨앗은 곡우를 전후해 발아할 것이고
연둣빛 글싹에게 세상은 얼마나 경이로울까
새순은 숨겨온 이야기를 이웃에 전할 것이다
솎아내기에 잡초를 제거하고 가끔 단비가 내리겠지
웃거름이 없어도 글싹, 문맥은 힘차게 솟아나올 텐데
여름이 오기 전 친구는 다시 몇 편의 사진을 보내오리라
글씨가 이만큼 자랐다고
내외하듯 앞모습 보이지 않는 아내의 바구니 가득
푸른 문장을 받아들면서 사내는
벌써 친구들 생각에 어깨가 들썩들썩하겠지
- 시집 <대지의 있는 힘>(문학동네, 2024)
엊그제, 고향에 있는 친구가 고구마를 캤는데 그 색깔과 자태가 너무 이쁘다면서 마치 시인처럼 노래하며 자랑하는 사진 한 장을 동창 단톡방에 올렸습니다. 마침 박철 시인의 이 시집을 읽고 있다가 바로 데자뷰처럼 생각이 난 건 우연이 아니겠지요. 농사를 지으면 ‘벌써 친구들 생각에 어깨가 들썩들썩’한 농사짓는 친구나, ‘글싹, 문맥은 힘차게 솟아나’ ‘바구니 가득 / 푸른 문장을 받아 들면’ 주변의 응원하는 친구들을 생각하는 시인이나, 모두가 ‘하늘 보듬어 가난한 이의 손길 펴는 곳’을 지향하며, 그저 유유히 흐르는 멋진 강물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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