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왔다 우리 사랑을 하자
- 용혜원
가을이 왔다
우리 사랑을 하자
모든 잎사귀들이 물드는 이 계절에
우리도 사랑이라는 물감에
물들어보자
곧 겨울이 올 텐데
우리 따뜻한 사랑을 하자
모두들 떠나고 싶다고
외치는 것은
고독하다는 증거이다
이 가을에
고독을 깨뜨리기보다
고독을 누리고 고독을 즐기고 싶다
가을이 왔다
우리 사랑을 하자
모든 들판에 익어가는 곡식들과
열매들도 거둘 때가 되었다
살아오는 동안 표현하지
못했던 마음을
이 순간만큼은 마음껏 나타내 보자
모든 것들이 떠나가고
모든 것들이 잊혀지는데
우리 가을이 머무는 동안에
언제나 가슴속에 간직해도 좋을
멋진 사랑을 하자
이 가을에
- 시집 <가을이 남기고 간 이야기>(책만드는집, 2008)
* 감상 : 용혜원 시인.
1952년 2월12일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성결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1992년 황금찬 시인의 추천을 받아 <문학과 의식>을 통해 본격적으로 문단에 나왔습니다. 목사이면서 기업체와 단체에서 유머와 열정, 자신감을 심어주는 강사이기도 한 그는 다양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삶에 대한 활력과 애정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용혜원 시인의 시들은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면서 소소한 일상의 삶 속에서 깨달은 것들을 평범한 시어로 편안하고 솔직하게 표현하기 때문에 시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인기가 있습니다.
현재 자신이 세운 <유머 자신감 연구소> 소장이면서 ‘사랑을 노래하고 웃음을 강의하는 시인’, ‘열정 깨우기 강사’, ‘유머 컨설턴트’ 등 여러 애칭을 갖고 있으며, 등단 이후 지금까지 시집 97권, 동시집 2권, 시선집 14권 등 수많은 저서를 출간한 베스트 셀러이기도 합니다. 그의 시는 중고등학교의 국어 교과서와 도덕 교과서 등에도 실려 있어 젊은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진 시인입니다.
지난 주말, 태풍 풀라산(Pulasan)의 잔해가 저기압으로 변해 한반도를 지나가면서 큰 비를 뿌린 후 폭염 특보들은 한 순간에 사라지고 갑자기 기온이 내려갔습니다. 그래서인지 요 며칠 사이 단연 최고의 화두는 ‘가을이 왔다’는 표현이었습니다. 며칠 전, 극동방송의 한 아침 방송 프로그램 오프닝 멘트에서 여러 시인이 ‘가을이 왔다’고 노래한 동일한 표현을 모아 소개하면서 애청자들의 공감을 얻기도 했습니다.
류근 시인이 ‘뒤꿈치를 든 소녀처럼 가을이 왔다...그 누구도 따르지 못할 망설임으로 왔다’고 노래한 것, 그리고 오규원 시인이 ‘가을이 왔다 // 대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고 / 담장을 넘어 / 현관 앞까지 왔다 / 대문 옆의 황매화를 지나 / 비비추를 지나 돌단풍을 지나 / 거실 앞 타일 바닥 위까지 / 가을이 왔다....친구의 엽서 속에 들어있다가 / 내 손바닥 위에까지 가을이 왔다’고 노래한 시 등을 소개했습니다.
‘가을이 왔다’는 동일한 제목의 박형규 시인의 시도 눈에 띕니다. ‘가을이 어느새 / 구절초 흐드러지게 핀 /산 윗 마을 골목길 / 풀벌레 머리 위에로 왔다 / 혼자 사는 할머니 집 / 텃밭 두어 송이 코스모스 미소와 / 강아지풀 눈썹 갈기를 타고 와서 / 토담에 걸친 감에서 / 노을처럼 익어 간다’
바야흐르 가을이 왔습니다. 아마도 지난여름이 너무 더웠기 때문에 이렇게 찾아온 가을이 더 반갑고 감격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올해 여름은 더위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신기록을 세운 특별한 해로 기억이 될 듯합니다. 서울 지역 ‘34일’이라는 역대 최장 ‘열대야’ 기록도 기록이지만, 섭씨 40도까지 올라갔던 기온은 거의 ‘살인적(殺人的)’이었습니다.
오늘 감상하는 시는 극동방송이 많은 시인들의 공통된 시어인 ‘가을이 왔다’는 표현을 언급하면서 마지막으로 소개했던 용혜원 시인의 시입니다. 시인이 노래했던 것처럼 가을이 왔으니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따뜻하게 사랑하는 것’임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고자 했던 멘트였습니다.
가을이 왔으니 ‘우리 사랑을 하자’고 단도직입적으로 운을 뗀 시인은 우리가 이 좋은 계절 가을에 사랑해야 할 이유를 줄줄이 나열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노래한 사랑할 이유들은 ‘곧 겨울이 올 텐데 / 우리 따뜻한 사랑을 하자’는 것입니다. 그 무덥던 성하(盛夏)의 계절 여름도 한순간에 지나가고 말 듯이, 사랑하기에 적합한 이 가을도 그리 길지 않다는 말입니다. 또 시인은 우리는 고독한 존재들이기에 더욱더 사랑할 일이고, ‘모든 들판에 익어가는 ‘곡식들과 열매들도 / 거둘 때’를 아는 것처럼, 이 가을에는 결실을 위해서 ‘우리 사랑을 하자’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길지 않은 가을날이기에, 시인은 ‘모든 것들이 떠나가고 / 모든 것들이 잊혀지는데 / 우리 가을이 머무는 동안에 / 언제나 가슴속에 간직해도 좋을 / 멋진 사랑을 하자 이 가을에’라고 간절히 호소하며 노래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이즈음에, 용혜원 시인의 시를 감상하다 보면 마치 성경 ‘아가서’를 읽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그의 시편들이 남녀 간의 사랑을 노래한 것들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고 특히, 가을이라는 계절이 사랑하기엔 안성맞춤인 계절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을이 오면’이라는 제목의 그의 시 한 편을 더 감상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어느 시인이 노래했듯이, ‘모든 잎사귀들이 물드는’ 이 가을에는 서로서로 ‘누군가의 그대가 되어’ 후회 없는 따뜻한 사랑을 할 수 있길 바랍니다. - 석전(碩田)
가을이 오면
- 용혜원
가을이 오면
함께 걷고픈 사람이 있다
낙엽 지는 길을 걸으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정겹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원 벤취에서 간간이 웃으며
속살일 수 있고
낭만이 있는 카페에서
마주 보며 갈색 커피를
마시고 싶은 사람이 있다
가을이 깊어 갈수록
가을 분위기를 연출하는
파스텔 톤 색감에 젖어들어
편안하고 다정하게 느껴지는 사람
함께 머무르고 싶은 시간이
짧기만 하고 아름다운 그리움으로만 남는
항상 마음에 여유가 있어
같이 있으면 모든 것이
음악처럼 흐르는 사람이 있다
서로의 가슴이 설레고
심장의 고동이 뛰는 것을 느끼면서도
순간의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 서로를 아껴주며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오색 단풍이 절정을 이루며 떨어지는
가을 풍경 깊은 곳에서
마음껏 사랑하고 싶다
노란 잎들이 한결 운치를 더하는
커다란 은행나무 감싸 안으며
싱그럽고 달콤하게
입 맞춤을 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가을날이면 촉촉한 그리움에 젖어
서로의 손을 꼭 잡고
낙엽이 쌓여 가는 길을
한없이 걷고 또 걷고 싶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 시집 <가을이 남기고 간 이야기>(책만드는집,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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