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 성범영
나무는
오늘도 내일도
변함없이 그 자리에
서 있구나.
나무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잎을 내고 떨구고 하며
일을 잘도 알아서 하는구나.
나무는
보여 달라고 하지 않아도
꼭 제때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우리에게 돌려주는구나.
나무는
오늘도 내일도
변함없이 무럭무럭
잘도 자라주는구나.
- 에세이집 <나무는 인생이다>(생각하는 정원, 2014)
* 감상 : 성범영.
1937년 1월, 경기도 용인군 수지에서 태어났습니다. 현재 제주도 한경면에서 잘 가꿔진 분재 정원, ‘생각하는 정원’을 만들어 나무를 가꾸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87세 할아버지지만 아직도 에너지 넘치고 생각하는 힘이 ‘청년의 그것보다 더 젊은’ 청년 같은 분이십니다.
지난해 가을 배를 타고 마라도를 가기로 한 날, 하필 비바람으로 풍랑주의보가 발효되면서 발이 묶여 예약해 둔 배가 출항할 수 없어 그 대안으로 들렀던 분재 정원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오락가락 비가 내리는 분재 정원을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며 그와 두 시간 남짓 나눈 대화는 많은 삶의 지혜들을 배울 수 있었던 참으로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감상하는 시는 일어설 때 그가 사인을 하고 제게 건네준 직접 본인이 집필한 한 권의 책, <나무는 인생이다>에 수록되어 있는 짧은 시입니다. 평생 나무를 가꾸면서 살아온 그가 온몸으로 터득한 지혜를 한 편의 시에 표현했다고나 할까요. 그가 가꿔놓은 ‘생각하는 정원’을 둘러보면 금새 알아차릴 수 있듯이, 나무를 가꾸면서 깨달은 것들을 글로 표현해 놓은 팻말들이 온통 줄줄이 늘어서 있습니다. 시가 있는가 하면, 짧은 에세이도 있고, 또 격언이 있는가 하면 긴 설명문도 있습니다. 그 글들을 찬찬히 읽어야 비로소 정원이 숨겨 놓은 보물을 발견할 수 있기에 ‘생각하게 하는 정원’입니다. 그날 그와 대화가 가능했던 것도, 늘 전망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방문객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그가, 첫 출발 지점부터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읽으면서 오고 있는 저를 눈여겨 보고 있다가, 먼저 말을 걸어오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비가 그친 후 갑자기 추워지면서 우수수 낙엽 지는 나무들을 보면서 1년 전에 만났던 그가 갑자기 생각이 나서 그의 책을 책꽂이에서 찾다가, 성범영 원장의 책뿐 아니라 ‘나무’를 통해서 삶의 귀중한 교훈을 깨달았던 또 한 분의 책을 발견했습니다. 토요일마다 북한산을 열심히 오르내리던 20년 전, 그가 쓴 이 책을 읽고 그때까지 그저 무심하게 바라보았던 ‘나무’를 눈여겨보는 계기가 되었지요. 우종영이 쓴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가 바로 그 책입니다.
본인을 ‘나무 의사’라고 자처하면서 평생을, 나무를 가꾸고 또 병든 나무를 다시 살리는 일을 하고 계신 분. 그가 쓴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중앙 M&B, 2001)는 그 후 나의 삶의 방향과 색깔을 바꿔놓을 정도로 진한 감동을 줬던 책이었습니다. 그의 책에서 그가 소개했던 ‘서어나무’를 알고 난 후에는 산행 중에 서어나무를 만나기만 하면 마치 애인을 만난 듯 안아주고 쓰다듬어줬던 기억도 새삼 납니다. 아마도 그 책으로 인해 새로운 시각으로 나무를 바라보기 시작했던 때가, 내가 시를 좋아하기 시작한 때와 거의 비슷한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성범영, 그리고 우종영. 그들이 나무를 통해서 깨달은 것은 평범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책이나 이론에서 깨달은 것이 아니라 나무를 직접 돌보고 가꾸고, 또 되살리면서 몸소 깨달은 것이기에 더 절절히 다가옵니다. ‘나무는 / 오늘도 내일도 / 변함없이 그 자리에 / 서 있’다는 깨달음이 깊은 울림으로 공감이 되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조석으로, 찰나의 순간으로 변하며 불안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무는 / 오늘도 내일도 / 변함없이 무럭무럭 / 잘도 자라주는구나.’라고 노래한 시인의 마음이 ‘십분’ 이해가 되는 것은,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 좀체 신뢰할 수 없는 불신의 시대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에서 저자 우종영은 ‘내가 나무라면 가장 가고 싶지 않은 곳이 바로 사람 곁이다’고 표현하기도 했지요.(244p)
그는 나무를 통해서 ‘삶에도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27살에 쓴 첫 시집 <노동의 새벽>이 금서(禁書)가 되었지만 100만 부가 발간되었으며 ‘얼굴 없는 시인’으로 살아온 박노해 시인의 시, 한 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감나무 한 그루도 한 해를 쉬어야 그다음 해에 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어머니의 지혜를 소재로 하여 노래한, 생각하게 하는 멋진 시입니다.
해거리
- 박노해
그해 가을이 다숩게 익어가도
우리 집 감나무는 허전했다
이웃집엔 발갛게 익은 감들이
가지가 휘어질 듯 탐스러운데
학교에서 돌아온 허기진 나는
밭일하는 어머님을 찾아가 징징거렸다
왜 우리 감나무만 감이 안 열린당가
응 해거리하는 중이란다
감나무도 산목숨이어서
작년에 뿌리가 너무 힘을 많이 써부러서
올해는 꽃도 열매도 피우지 않고
시방 뿌리 힘을 키우는 중이란다
해거리할 땐 위를 쳐다보지 말고
발아래를 쳐다봐야 하는 법이란다
그해 가을이 다 가도록 나는
위를 쳐다보며 더는 징징대지 않았다
땅속의 뿌리가 들으라고 나무 밑에
엎드려서
나무야 심내라 나무야 심내라
땅심아 들어라 땅심아 들어라
배고픈 만큼 소리치곤 했다
어머님은 가을걷이를 마치신 후
감나무 주위를 파고 퇴비를 묻어주며 성호를 그으셨다
꽃과 열매를 보려거든 먼저
허리 굽혀 땅심과 뿌리를 보살펴야 하는 거라며
정직하게 해거리를 잘 하는 게
미래 희망을 키우는 유일한 길이라며
- 시와 에세이집 <오늘은 다르게>(해냄 출판사, 1999)
오늘은 나무를 가꾸고 돌보면서 삶 자체를 꼭 ‘나무’처럼 치열하게 살아가는 두 분, 성범영 원장과 우종영 나무 의사를 소개했습니다. 이 가을, 잎사귀를 떨구는 나무를 바라보면서 그들이 깨달은 삶의 지혜들을 배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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