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 연제진

석전碩田,제임스 2024. 9. 11. 06:00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 연제진

 

가식은 허세를 낳고 번민을 키운다

간절해야 명약을 찾을 수 있다

 

약점을 숨긴다고 완벽할 수는 없는 법

용기는 머뭇거리는 것이 질색이다

 

사람들은 사실 남의 단점을 잘 모른다

아니 모른척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약점을 감추기보다 드러내는 편이 숫제 낫다

털어놓고 나면 단점이 곧 결점은 아닐 수 있다

 

빈틈이 있는 곳이라야 햇빛이 찾아 든다

드러내고 빛을 받는 순간 치유가 된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어’

고백한 후에 들을 수 있는 정겨운 말이다

 

간 데 없는 그루박던 두려움

이제 홀가분한 기분이 들 것이다

 

망설임이 없는 그대를 위하여

나마스테*

 

* 당신에게 고개를 숙인다 즉, 당신을 가능케 한 모든 것을 경배한다는 뜻의 인도 인사말

 

- 시집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가온, 2020)

 

* 감상 : 연제진 시인. 2014년 <화백문학>을 통해 시를 발표해 오고 있습니다. 시집으로 <꽃잠>(가온, 2018),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가온, 2020), <스크램블 교차로>(가온, 2022) 등이 있습니다.

 

마 전, 여의도 국회 의사당 앞에서 큰 문화사를 경영하고 있는 대학 후배를 찾았을 때의 일입니다. 오랜만에 만나 이런저런 그간의 안부와 살아가는 이야기, 그리고 업무 이야기를 마치고 막 일어서려는데 ‘선배님이 시를 좋아하시니 이런 시집도 읽어보시면 좋겠다’면서 서가(書架)에 꽂혀 있던 시집 몇 권을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예기치 않게 받아 든 무명 시인의 귀한 시집들을 서재 한쪽에 놔두었다가, 한참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차근차근 읽어 내려가다가 그중 한 권의 시집에서 오늘 감상하는 이 시를 우연히 만났습니다.

 

‘그럴 수 있지’라는 말이 아마도 첫눈에 띄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상담자가 내담자를 상담할 때 상담자의 가치관이나 삶의 기준으로 문제를 바라보지 말고, 유연한 자세로 내담자의 문제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상담자는 언제나 ‘그럴 수 있지’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평소에 제가 늘 강조하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담을 하다보면 도덕적 윤리적으로, 또는 사회 문화적 양심상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문제인데도, 내담자들은 그 문제를 너무나도 심각하게 받아들이며 갈등 가운데 빠져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당장이라도 호통을 치고 싶고, 그 자리에서 상담을 종결하고 싶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제대로 된 상담을 한 건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참 많이도 변했고 또 급속하게 변해가고 있습니다. 이런 험한 시대 가운데에서 상담자로 살아가기로 한 이상, ‘그럴 수 있지의 마음’으로, 인내를 가지고 그들의 이야기 속으로 개입해서 들어가는 일은 위기 상담자들이 숙명처럼 겪어내야 하는 몫이라고나 할까요.

 

인은 자신의 약점과 단점을 숨기려고만 할 일이 아니라, 떳떳하진 않지만 고백하여 백일하(白日下)에 드러내는 순간, 들을 수 있는 정겨운 말이 바로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감추기보다는 그것을 드러내고, ‘그루박던 두려움’ 속에만 단단히 감추려고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빛을 받는 순간 치유가 된다’고 거듭 시인은 간절하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인이 사용했던 시어 ‘그루박다’라는 표현이 어떤 뜻인지 우리말 대사전에 찾아보니, ‘사람의 기를 펴지 못하게 억누르다’는 뜻이 있더군요. 사람들이 도저히 용납해 주지 않을 것 같은 나의 결점과 단점, 드러내놓기 싫은 약점을 후련히 밝혔더니,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라는 정겨운 말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간 기를 펴지 못하게 나를 억누르고 있던 두려움이 홀가분하게 사라진다는 것을 아는 시인은 그야말로 ‘브라보!’를 외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분으로, 아직도 머뭇거리면서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는 ‘그대를 위하여’ 격려하면서 ‘나마스테’를 외치며 시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자기 지난해 연말쯤 감상했던 최영철 시인의 ‘늙음’이라는 시가 생각이 납니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늘 ‘그럴 수 있지의 마음’으로 이해하고 공감하면서, 눈물 그렁그렁하며 함께 울어주는 것이라고 노래한 멋진 시입니다. 시인이 노래하는 ‘늙음’에는 자기중심적이고 옹고집으로 낡아져 간다든지 쓸모없이 내팽개쳐지는 늙은이의 이미지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늙음

 

- 최영철

 

늘 그럼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

늘 그럼그럼 어깨를 토닥여 주는 것

늘 그렁 눈에 밟히는 것

늘 그렁 눈가에 맺힌 이슬 같은 것

늘 그걸 넘지 않으려 조심하는 것

늘 그걸 넘지 않아도 마음이 흡족한 것

늘 거기 지워진 금을 다시 그려 넣는 것

늘 거기 가버린 것들 손꼽아 기다리는 것

늘 그만큼 가득한 것

늘 그만큼 궁금하여 멀리 내다보는 것

늘 그럼그럼

늘 그렁그렁

 

- 시집 <찔러 본다>(문학과지성사, 2010)

 

인이 노래한 것처럼 늙음이 ‘늘 그럼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듯이, 상담자가 갖춰야 하는 자세도 늘 ‘그럴 수 있지’하는 마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상담자가 되어 가는 것과 성숙하게 익어가는 늙음의 과정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인 듯합니다. 아직도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지만 결실의 계절 이 가을에는 ‘늘 그럼그럼’, 어깨를 토닥여 주고,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의 마음’으로 가득한, 풍성하게 영글은 삶의 열매를 수확할 수 있길 고대합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