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동두천 1 / 그대는 어디서 무슨 病 깊이 들어 - 김명인

석전碩田,제임스 2024. 12. 11. 00:44

동두천 1

 

- 김명인

 

기차가 멎고 눈이 내렸다 그래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신호등

불이 켜지자 기차는 서둘러 다시 떠나고

내 급한 생각으로는 대체로 우리들도 어디론가

가고 있는 중이리라 혹은 떨어져 남게 되더라도

저렇게 내리면서 녹는 춘삼월 눈에 파묻혀 흐려지면서

 

우리가 내리는 눈일 동안만 온갖 깨끗한 생각 끝에

역두(驛頭)의 저탄 더미에 떨어져

몸을 버리게 되더라도

배고픈 고향의 잊힌 이름들로 새삼스럽게

서럽지는 않으리라 그만그만했던 아이들도

미군을 따라 바다를 건너서는

더는 소식조차 모르는 이 바닥에서

 

더러운 그리움이여 무엇이

우리가 녹은 눈물이 된 뒤에도 등을 밀어

캄캄한 어둠 속으로 흘러가게 하느냐

바라보면 저다지 웅크린 집들조차 여기서는

공중에 뜬 신기루 같은 것을

발밑에서는 메마른 풀들이 서걱여 모래 소리를 낸다

 

그리고 덜미에 부딪혀 와 끼얹는 바람

첩첩 수렁 너머의 세상은 알 수도 없지만

아무것도 더 이상 알 필요도 없으리라

안으로 굽어지는 마음 병든 몸뚱이들도 닳아

맨살로 끌려가는 진창길 이제 벗어날 수 없어도

나는 나 혼자만의 외로운 시간을 지나

떠나야 되돌아올 새벽을 죄다 건너가면서

 

- 시집 <동두천>(문학과지성사, 1979)

 

* 감상 : 김명인 시인.

1946년 9월, 경북(당시엔 강원도) 울진에서 태어났습니다. 울진 후포고, 고려대학교(학.석.박사)를 졸업했습니다. 대학 재학시절 <고대 신문사>에서 주최한 전국 대학생 문예 현상 공모에 시로 당선되기도 했습니다.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서 시 ‘출항제’가 당선되면서 등단하였습니다. 대학을 마친 직후 동두천의 어느 고등학교에서 잠시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대학원 과정을 마친 후 1981년 경기대 교수로 시작하여, 1999년부터 모교인 고려대학교로 옮겼으며 2012년 2월 정년퇴직하였습니다. 1975년 김창완, 이동순, 정호승 등과 <반시(反詩)> 동인을 결성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집으로 <동두천>(문학과지성사, 1979), <머나먼 곳 스와니>(문학과 지성사, 1988), <물 건너는 사람>(세계사, 1992), <푸른 강아지와 놀다>(문학과 지성사, 1994), <바닷가의 장례>(문학과지성사, 1997), <길의 침묵>(문학과지성사, 1999), <바다의 아코디언>(문학과지성사, 2002), <파문>(문학과지성사, 2005), <따뜻한 적막>(문학과지성사, 2006, 시선집), <꽃차례>(문학과지성사, 2009), <여행자 나무>(문학과지성사, 2013), <기차는 꽃그늘에 주저앉아>(민음사, 2015), <이 가지에서 저 그늘로>(문학과지성사, 2018), <오늘은 진행이 빠르다>(문학과지성사, 2023) 등이 있습니다. 1992년 김달진 문학상, 소월시문학상, 1995년 동서문학상, 1999년 현대문학상, 2001년 이산문학상, 2005년 대산문학상, 2006년 이형기문학상, 2007년 지훈문학상, 2010년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인의 첫 시집인 <동두천>에 수록되어 있는 ‘동두천’이라는 제목의 연작시 중에서 첫 번째로 소개되는 시입니다. 동두천역 저탄(貯炭) 더미에 내려 쌓이는 겨울 눈을 바라보면서 혼혈아와 같은 사회의 소외된 사람들의 서러움을 시적 은유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김명인 시인이 잠시 교사 생활을 동두천에서 했다는 이력이 있지만 굳이 그것 때문에 시인이 자신의 첫 시집의 이름을 ‘동두천’으로 택한 것은 예사롭지 않습니다. 단지 출생에서부터 비극이 시작되는 아이들의 삶과 암울한 운명, 어두컴컴한 골목과 포주들의 악랄함이 있는 동두천은 시인에게 있어서 고유 지명이라기보다는 고아와 혼혈아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불행과 싸우며 살아가고 있는, 말하자면 삶의 어려움과 그 어려운 삶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욕망마저 가로막혀 있는 특별한 공간으로, 일종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족 간의 비극적인 전쟁, 그리고 그 전쟁에 개입했던 미군들이 아직까지 머무르고 있는 곳. 그곳엔 그들을 상대로 몸을 팔아야 살아갈 수 있는 여자들이 있으며, 그들 사이에서 태어나 슬픈 운명을 안고 살아야 하는 혼혈아들. 그 도시의 기차역에서 떠나는 사람과 남아 있는 사람, 그리고 떠나는 기차는 시인이 노래했듯이 우리 인생도 어디론가 가고 있다는 상념에 빠지게 했습니다. 시인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 급한 생각으로는 대체로 우리들도 어디론가 / 가고 있는 중이리라 혹은 떨어져 남게 되더라도’

 

이 아무리 깨끗하다 할지라도 ‘내리는 눈일 동안만’ 깨끗할 뿐, 떨어져 내리는 순간 쌓인 시커먼 석탄과 구분이 되지 않는 진창의 검은 물이 되어 흐르는 것이 어쩌면 바다를 건너 먼 나라로 가지만 ‘첩첩 수렁’ ‘캄캄한 어둠 속으로 흘러가는’ 혼혈아들의 운명과도 같음을, 그리고 낯선 나라 험한 세상에서 그들이 이곳에서 가졌던 유년의 순수함을 그대로 간직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시인이 '더러운 그리움'이라고 표현한 시어(詩語)가 눈물겹습니다. 그리고 ‘혼자만의 외로운 시간을 지나’ ‘새벽을 죄다 지가가면서까지’ 서러워하며 대신 노래를 부르는 시인의 마음이 전달되어 옵니다.

 

명인 시인의 시들은 이렇듯 대체로 소외되고 힘없는 하층 서민을 형상화하는 작품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공간적으로는 화려한 도회지보다는 상실과 슬픔이 깃들어 있는 고아원 ‘켄터키 집’이나 뒷골목 등 변두리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 그의 시에는 친근한 운율(韻律)이 살아있어 시를 반복해서 읽다 보면 마치 슬픈 창(唱)을 듣는 것 같습니다.

 

칠 전, 지인 한 분이 김명인 시인의 시 ‘겨울 입구(入口)’를 보내 주셨습니다. 시집 <머나먼 곳 스와니>에 실린 이 시를 읽으면서 직접 찾아보려고 서재의 책장을 열어보니 김명인 시인의 시집이 무려 세 권이나 나란히 꽂혀 있더군요. 그런데도 4년 전에 달랑 한 번 그의 시를 감상했던 것(https://jamesbae50.tistory.com/13410950)이 전부였다는 사실에 미안함을 느껴 다시 그의 시집들을 꺼내 정독했고 시인의 융숭 깊은 시 세계를 새삼 맛볼 수 있었습니다.

 

박하게 돌아가는 정국이 하도 어수선하다 보니 같은 시집 제1부의 마지막에 실려 있는 시, ‘그대는 어디서 무슨 병 깊이 들어’를 감상해 보겠습니다.

 

그대는 어디서 무슨 病 깊이 들어

 

- 김명인

 

길을 헤매는 동안 이곳에도 풀벌레 우니

계절은 자정에서 바뀌고 이제 밤도 깊었다

저 수많은 길 중 아득한 허공을 골라

초승달 빈 조각배 한 척 이곳까지 흘려보내며

젖은 풀잎을 스쳐 지나는 그대여 잠시 쉬시라

사람들은 제 살붙이에 묶였거나 病 들었거나

지금은 엿듣는 무덤도 없어 세상 더욱 고요하리니

 

축축한 풀뿌리에 기대면

홀로 고단한 생각 가까이에 흐려 먼 불빛

살갗에 귀에 찔러 오는 얼얼한 물소리 속

내 껴안아 따듯한 정든 추억 하나 없어도

어느 처마 밑

떨지 않게 세워 둘 시린 것 지천에 널려

 

남은 길을 다 헤매더라도 살아가면서

맺히는 것들은 가슴에 남고

캄캄한 밤일수록 더욱 막막하여

길목 몇 마장마다 묻힌 그리움에도 채여 절뚝이며

지는 별에 부딪히며 다시 오래 걸어야 한다.

 

- 시집 <동두천>(문학과지성사, 1979)

 

명인 시인하면 ‘시가 곧 삶이고, 삶이 곧 시’임을 모토로 삼았던 ‘반시동인(反詩同人)’ 활동과 그 치열한 정신을 실천한 시들로 묶어낸 그의 시집 <동두천>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동인지 <반시>의 창간호(1976년 6월 1일) 선언문은 김명인 시인이 초안을 작성했고 다른 동인들이 수락하면서 별다른 수정 없이 그대로 실렸다고 전해집니다. 그 창간 선언문의 일부를 소개해 봅니다.

 

[우리가 옹호하는 시는 언제나 삶의 문제에 귀일하는 것이고, 시의 바탕은 삶과 동일성으로 이해될 수 있으므로, 우리의 시는 잊혀져가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개성과 자유의 참모습을 되찾아 내어 그것을 사랑의 위치로 환원시키는 일이며, 다수의 삶이 누려야 할 다양성을 옹호하는 일이다. 아울러 우리의 시는 민중의 애환을 함께하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찢겨버린 조국의 아픈 상처와 비장감을 어루만지는 데에 있다. 또한 우리의 시는 모든 관계의 이질감으로부터 동질감을 획득하는 데에 있고, 시인과 시인 아닌 자의 구분을 지양하는 데에 있다.]

 

도자 한 명을 잘못 뽑아 온 국민이 근심과 걱정으로 온밤을 하얗게 지새야 했던 며칠 전 그날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전전긍긍 그를 지키려는 자들, 그들을 향해 시인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찢겨버린 조국의 아픈 상처와 비장감을 어루만지며’ ‘그대는 어디서 무슨 病 깊이 들어’ 아직도 그러고 있느냐고, 길게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