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
- 이용악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험한 벼랑을 굽이굽이 돌아간
백무선 철길 위에
느릿느릿 밤새워 달리는
화물차의 검은 지붕에
연달린 산과 산 사이에
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 내리는가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어쩌자고 잠을 깨어
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 시집 <이용악집>(동지사, 1949), 첫 발표는 <협동>(1947년 2월)
* 감상 : 이용악(李庸岳). 월북 시인. 1914년 11월 함경북도 경성에서 태어났고, 1928년 부령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 공립농업학교에 입학했으나 4학년 때 중퇴하였습니다. 두만강 인근에서 소금을 밀수하며 생계를 이어갔던 그의 부친은 시인이 어린 시절 객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 히로시마의 코오분(興文) 중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하였고, 니혼(日本)대학 예술과에 입학하여 1년을 수료한 후 조치(上智)대학 신문학과로 옮겼으며, 이 대학을 1939년 졸업한 후 <인문평론>의 기자로 근무하였습니다.
1935년 월간지 <신인문학>에 ‘패배자의 소원’ 등을 발표하면서 등단하였으며 꾸준히 작품활동을 계속하다가 1937년과 1938년 연거푸 두 권의 시집을 냈습니다. 당시 시인 서정주, 오장환과 더불어 삼재(三材)로 불린 시인이었지만 월북 시인으로 분류되어 논의에서 배제되었다가 80년대에 이르러서야 시인 정지용처럼 연구되기 시작했습니다. 1971년에 사망했다고 전해집니다. 시집으로 <분수령>(삼문사, 1937), <낡은 집>(1938), <오랑캐꽃>, <이용악집>(동지사, 1949) 등이 있습니다.
그의 시는 매년 수능에 출제되는 시로 유명한데, 2005학년도 수능에서는 그의 시 ‘낡은 집’이, 2021학년도 수능에서는 바로 이 시 ‘그리움’이 출제되었습니다. 이 밖에도 모의 평가나 EBS 연계 교재 등에 그의 시들이 출제 예상 작품으로 꼽히면서 자주 소개되었습니다.
이 시의 주제는 제목 그대로 ‘그리움’입니다. 그리고 그 그리움의 대상은 시인이 두고 온 고향인 함경도의 북방 마을입니다. 눈 오는 추운 겨울밤 시인은 잠 못 이루며 하얗게 눈 덮인 고향 마을의 풍경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첫 연에서 ‘눈이 오는가 북쪽엔 /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라고 일성을 터트리는데 이것은 눈이 오느냐고 묻는 의문문도 아니고 또 눈이 오는구나 감탄하는 감탄문도 아닙니다. 이맘때 겨울이면 폭설이 내려 온천지 사방이 하얗게 눈이 내린, 지금은 가지 못하는 고향의 모습을 떠올리며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문장입니다. 이 문장은 시를 마감하면서 또 한 번 똑같이 마지막 연에 그대로 마치 후렴구처럼 배치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눈 덮인 고향 마을의 풍경을 담은 ‘그리움’이라는 한 편의 영화를 찍는다면, 첫 화면과 마지막 화면이 어떤 장면이어야 할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듯합니다.
2연과 3연에 등장하는 실명(實名)인 ‘백무선(白茂線)’ 철길은 함경북도 백암역에서 두만강의 끝자락에 위치한 무산역을 잇는 철도 노선을 일컫습니다. 험한 산악 지형에 건설된 이 노선은 험한 벼랑길을 굽이굽이 연결한, 가장 험한 지역의 철길입니다. 그 철길을 ‘느릿느릿 밤새워 달리는 / 화물차의 검은 지붕에’ 뿐 아니라, ‘연달린 산과 산 사이에 / 너를 남기고 온 / 작은 마을에도’ 하얀 함박눈이 내리고 있는데, 시인은 이 눈을 ‘복된 눈’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함박눈 쏟아지는 철길을 느릿느릿 달리는 열차, 그리고 그 위로 복된 눈이 떨어지는 모습 자체만으로 시가 되고 또 영화가 되는 장면입니다. 시의 절정은 4연으로, 글을 쓰고 있는 시인이 열어 놓은 잉크병의 잉크가 얼 정도로 추운 날, 너무도 절실한 그리움의 감정에 자기 자신에게 울부짖습니다. ‘어쩌자고 잠을 깨어 / 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을 생각하는가 절규하고 있는 시인의 모습이 마치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합니다.
사실, 시에 그려진 고향이 그의 그리움을 사무치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백성의 삶은 그리 녹록지만은 않았습니다. 국경 근처에서 소금 밀수를 하며 살았던 이용악 시인의 부친은 마적들의 습격으로 객사한 후(그의 시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참조) 그의 어머니가 생계를 꾸려 어려서부터 궁핍한 생활을 해야 했던 시인이었습니다. 가난과 슬픔이 대(代)를 이어 계속되어야 하는 고달픈 백성들의 삶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는 그의 대표 시 ‘낡은 집’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낡은 집
- 이용악
날로 밤으로
왕거미 줄치기에 분주한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이 집에 살았다는 백성들은
대대손손에 물려줄
은동곳도 산호관자도 갖지 못했니라
재를 넘어 무곡을 다니던 당나귀
항구로 가는 콩실이에 늙은 둥글소
모두 없어진 지 오랜
외양간엔 아직 초라한 내음새 그윽하다만
털보네 간 곳은 아무도 모른다
찻길이 놓이기 전
노루 멧돼지 쪽제비 이런 것들이
앞뒤 산을 마음놓고 뛰어다니던 시절
털보의 셋째아들은
나의 싸리말 동무는
이 집 안방 짓두광주리 옆에서
첫울음을 울었다고 한다
「털보네는 또 아들을 봤다우
송아지래두 불었으면 팔아나 먹지」
마을 아낙네들은 무심코
차거운 이야기를 가을 냇물에 실어보냈다는
그날 밤
저릎등이 시름시름 타들어가고
소주에 취한 털보의 눈도 일층 붉더란다
갓주지 이야기와
무서운 전설 가운데서 가난 속에서
나의 동무는 늘 마음 졸이며 자랐다
당나귀 몰고 간 애비 돌아오지 않는 밤
노랑고양이 울어 울어
종시 잠 이루지 못하는 밤이면
어미 분주히 일하는 방앗간 한구석에서
나의 동무는
도토리의 꿈을 키웠다
그의 아홉살 되던 해
사냥개 꿩을 쫓아다니는 겨울
이 집에 살던 일곱 식솔이
어데론지 사라지고 이튿날 아침
북쪽을 향한 발자국만 눈 우에 떨고 있었다
더러는 오랑캐령 쪽으로 갔으리라고
더러는 아라사로 갔으리라고
이웃 늙은이들은
모두 무서운 곳을 짚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제철마다 먹음직한 열매
탐스럽게 열던 살구
살구나무도 글거리만 남았길래
꽃피는 철이 와도 가도 뒤울안에
꿀벌 하나 날아들지 않는다
*흉집 : ‘흉가’의 사투리
*은동곳 : 은비녀
*산호관자 : 산호로 만든 관자. 관자는 줄을 걸도록 망건에 다는 고리로 보석을 치장하기도 하였음
*무곡 : 이익을 보려고 곡식을 사들이는 것
*둥글소 : 황소
*싸리말 : 싸리비. 함경도 지방에서는 싸리비로 말을 삼아 놀기도 하였기 때문에 죽마고우(竹馬故友)를 의미함.
*짓두광주리 : 바느질고리의 함경도 사투리
*저릎등 : 저릎은 껍질을 벗긴 삼대. 그것으로 만든 등
*갓주지 : 갓을 쓴 주지승. 아이들 울음을 그치게 할 때 갓주지 이야기를 했다고 함
*오랑캐령 :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함경북도 회령으로부터 중국 길림성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고개
*아라사 : 러시아
*글거리 : 그루터기, 나무의 밑둥
- 시집 <낡은 집>(1938)
어쩌면 ‘그리움’은 행복했던 시절보다 힘들고 고단했던 시절이었기에 더 사무치게 다가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제 강점기, 온 백성이 살기 위해서 떠돌이 유랑민이 되어야 했던 시절 북쪽 국경 지역의 이야기를 노래한 슬픈 시입니다. 시인의 친구 아버지였던 ‘털보’는 그 이후 어디쯤에서 가족들과 정착해서 살았을지. 그의 몇 대 후손들이 중앙아시아 어느 곳에서 지금은 ‘고려인’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추측해 보게도 됩니다.
연초, 모처럼 눈이 온 날 이 시를 함께 감상할 수 있도록 소개해 준 멋진 고등학교 동창 친구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 석전(碩田)
'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퀄트 하는 여자 / 홍매화 - 정귀매 (0) | 2025.01.22 |
---|---|
겨울나무에게 / 다시 새해의 기도 - 박화목 (0) | 2025.01.08 |
새해의 기도 - 이성선 / 새해 아침의 비나리 - 이현주 (1) | 2025.01.01 |
겨울 숲에서 - 안도현 / 눈보라 치는 겨울 숲에서 - 박노해 (2) | 2024.12.25 |
사마천 / 견딜 수 없는 것 - 박경리 (34) | 2024.1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