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399

겁 / 1월 1일 - 이영광

겁 - 이영광 먼 곳에 슬픈 일 있어 힘없는 원주 토지문화관의 저녁이다 속 채우러 왔다, 슬리퍼 끌고 해장국이 나오길 기다리며 신문을 뒤적이다 누군가의 소식을 읽고, 아? 이 사람 아직 살아 있었구나! 놀라고 다행스러워하는 마음이 된다 허기가 힘을 내는 것이 우습다가 문득 또, 누군가 내 소식을 우연히 듣고 아? 그 사람 아직 살아 있었구나, 놀라길 바라는 실없는 마음이 돼본다 다행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그만한 용기는 없다 허기는 아무래도 쓸쓸한 힘, 뭘 바라지 못하는 순간이 좋다 밥보다도 더 자주 먹는 이 겁에 의해, 오늘도 무사하지 않았느냐고 무사한 사람, 무사한 사람, 중얼거렸다 겁도 없이 중얼거렸다 - 시집 (문학과지성, 2018) * 감상 : 이영광 시인. 1965년 경북 의성군 단촌면 병방리, ..

늙음 / 특이 체질 - 최영철

늙음 - 최영철 늘 그럼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 늘 그럼그럼 어깨를 토닥여 주는 것 늘 그렁 눈에 밟히는 것 늘 그렁 눈가에 맺힌 이슬 같은 것 늘 그걸 넘지 않으려 조심하는 것 늘 그걸 넘지 않아도 마음이 흡족한 것 늘 거기 지워진 금을 다시 그려 넣는 것 늘 거기 가버린 것들 손꼽아 기다리는 것 늘 그만큼 가득한 것 늘 그만큼 궁금하여 멀리 내다보는 것 늘 그럼그럼 늘 그렁그렁 - 시집 (문학과지성사, 2010) * 감상 : 최영철 시인. 1956년 경상남도 창녕군 남지읍에서 태어났고 부산에서 성장하였습니다. 이십 대 초반부터 또래들과 시 동인지를 낼 정도로 열심 있는 문학청년이었던 최 시인은 그때 지금의 아내를 만났습니다. 1984년 무크 [지평], [현실시각]에 시를 발표했고 1986년 한국일보..

그루터기 - 박승민 / 반복 - 신평

그루터기 - 박승민 벼를 베어낸 논바닥이 누군가의 말년 같다 어느 나라 차상위층의 안방 속 같다 겨울 내내 그루터기가 물고 있는 것은 살얼음 속의 푸르던 날 이 세상 가장 아픈 급소는 자식새끼가 제 약점을 고스란히 빼다 박을 때 그래서 봄이 오면 농부는 자기 생을 이식한 흉터를 무자비하게 갈아엎고 논바닥에 푸른색 도배를 하는 것이다 등목을 하려고 수건으로 탁, 탁 등을 치는 순간 감쪽같이 그의 등판에 업혀 있는 그루터기들 - 시집 (실천문학사, 2016) * 감상 : 박승민 시인. 1964년생 경북 영주에서 태어났으며 숭실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했습니다. 2007년 를 통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시집으로 (푸른사상, 2011), (실천문학사, 2016), (창비, 2020) 등이 있습니다. 2..

12월 / 어머니의 겨울 - 유강희

12월 - 유강희 12월이 되면 가슴속에서 왕겨 부비는 소리가 난다 빈집에 오래 갇혀 있던 맷돌이 눈을 뜬다 외출하고 싶은 기미를 들킨다 먼 하늘에서 흰 귀때기들이 소의 눈망울을 핥듯 서나서나 내려온다 지팡이도 없이 12월의 나무들은 마을 옆에 지팡이처럼 서 있다 가난한 새들은 너무 높이 솟았다가 그대로 꽝꽝 얼어붙어 퍼런 별이 된다 12월이 되면 가슴속에서 왕겨 타는 소리가 나고 누구에게나 오래된 슬픔의 빈 솥 하나 있음을 안다 - 시집 (문학동네, 2005) * 감상 : 유강희 시인. 1968년 전북 완주군 구이면에서 태어났습니다. 원광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서 그의 나이 19세일 때, 시 ‘어머니의 겨울’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신춘문예 최연..

그날이 오면 - 심훈

그날이 오면 - 심훈(沈薰)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三角山)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漢江)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鍾路)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頭蓋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恨)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六曹)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 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 만들어 들쳐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1930.3) - 遺稿 시집 (한..

진관사에서 - 이병일 / 페미니즘을 너무나 잘 이해해주는 남자라는 괴물 - 이소연

진관사에서 - 이병일 진관사 외진 방, 빗소리 곁에 두고서 내 것 아닌 것을 생각한다 더러운 것들 몸뚱이에 두르고 와서 그 어디에도 버릴 수가 없다 우연찮게 앵두의 그것처럼 탱글탱글 익어 가는 빗줄기를 보면서 밥 생각 없이 구운두부 찜을 먹었다 좋아라, 피가 돌고 숨이 돌았다 두부 자체가 간수인데 몸에 붙은 흰 그림자 잔뜩 으깨진 것이 보였다 - 시집 (문학수첩, 2020) * 감상 : 이병일 시인. 1981년 전북 진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2005년 신춘문예에서 시 ‘곰팡이’가 당선되었고, 2007년 에 시 ‘가뭄’, ‘빈집에 핀 목련’, ‘여름 이사’, ‘세숫대야에 뜬 별빛’, ‘마이산 천지탑’ 등의 시를..

바닷가 늙은 집 / 문전성시 - 손세실리아

바닷가 늙은 집 - 손세실리아 제주 해안가를 걷다가 버려진 집을 발견했습니다 거역할 수 없는 그 어떤 이끌림으로 빨려들 듯 들어섰던 것인데요 둘러보니 폐가처럼 보이던 외관과는 달리 뼈대란 뼈대와 살점이란 살점이 합심해 무너뜨리고 주저앉히려는 세력에 맞서 대항한 이력 곳곳에 역력합니다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생도 저렇듯 담담하고 의연히 쇠락하길 바라며 덜컥 입도(入島)를 결심하고 말았던 것인데요 이런 속내를 알아챈 조천 앞바다 수십수만 평이 우르르 우르르 덤으로 딸려왔습니다 어떤 부호도 부럽지 않은 세금 한 푼 물지 않는 - 시집 (실천문학, 2014) * 감상 : 손세실리아 시인. 1963년 2월13일,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으며, 2001년 문예지 , 등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시집으로 (애지,..

감사하는 마음 / 가을의 기도 - 김현승

감사하는 마음 - 김현승 마지막 가을 해변에 잠든 산비탈의 생명들보다도 눈 속에 깊이 파묻힌 대지의 씨앗들보다도 난로에서 꺼내오는 매일의 빵들보다도 언제나 변치 않는 온도를 지닌 어머니의 품 안보다도 더욱 다수운 것은 감사하는 마음이다! 감사하는 마음은 언제나 은혜의 불빛 앞에 있다 지금 농부들이 기쁨으로 거두는 땀의 단들보다도 지금 파도를 헤치고 돌아온 저녁 항구의 배들보다도 지금 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주택가의 포근한 불빛보다도 더욱 풍성한 것은 감사하는 마음이다! 그것들을 모두 잃는 날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잃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받았기에 누렸기에 배불렀기에 감사하지 않는다 추방에서 맹수와의 싸움에서 낯선 광야에서도 용감한 조상들은 제단을 쌓고 첫 열매를 드리었다 허물어진 마을에서 불 없는 방에서 빵..

멀리서 빈다 / 내가 사랑하는 계절 - 나태주

멀리서 빈다 - 나태주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나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 시집 (시인생각, 2013) - 시선집 (지혜, 2020) - 필사 시집 (북로그컴퍼니, 2021) * 감상 : 나태주 시인. 1945년 3월 17일, 충남 서천군 시초면 초현리 111번지 그의 외가에서 출생하여 공주사범학교와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졸업하고 1964년부터 초등학교 교사로 오랫동안 재직했습니다. 2007년 공주 장기 초등학교 교장을 끝으로 43년간의 교직 생활을 마친 뒤, 공주문화원장을 역임하였고 현재..

학림다방에서 / 미투(美鬪) - 임보

학림다방에서 - 임보 대학병원에 들렀다가 모처럼 대학로를 어정거리고 있는데 낯익은 이름 이 보이기에 들어가 보았네 목조 마루에 목조 탁자 옛 배우들의 사진이 죽 걸려 있고 턴테이블에선 LP 음반이 돌며 '목련꽃 그늘 아래서'를 흘리고 있네 창밖을 내다보니 도서관이 있던 옛 캠퍼스 자리에는 낯선 상전(商殿)들만 점령군들처럼 위풍당당 들어서 있고 50여 년 전 세느* 개천가에서 놀던 그 시절이 아슴아슴 다가오려 하는데 옆 테이블의 세 여자가 떠드는 소리 자꾸만 내 기억을 가로막고 있네 검정색 작업복에 워커를 신고 쌍 과부집에서 김치 깍두기에 막걸리를 마시며 기고만장했던 그 친구들, 스크럼을 짜고 거리를 누비며 독재와 부정선거를 규탄했던 4.19의 주역들 그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갔나? 튀는 놈은 국회의원도 되..

가을, 계면조 무게 - 김현에게 - 김영태

가을, 계면조 무게 – 김현에게 - 김영태 [객석]지 10월호에 우리 나라에서 散文을 제일 잘 쓰는 어떤 평론가의 푹 늙은 얼굴을 본다 살오른 피부 듬성 수염 술꾼답던 지난날 총총하던 눈빛도 많이 간 것 같아 보이고 새치가 섞인 푸석푸석한 머리 손질 안 한 그의 꾸밈새는 그대로지만 눈이 부신 듯 세상을 계면조로 가늘게 잘게 그가 사물을 分析하며 아름다운 筆致로 뽐내던 한데 사진기 앞에서는 좀 떨떠름한 모차르트가 調和라면 바하는 평화라고 말하는 그의 人字 두 개 엎은 듯한 입가의 미소가 그나 나나 늙어가고 있는 지금 가을 무게를 저울에 달아보기는 - 시집 (미래사, 1991) * 감상 : 김영태 시인. 아호는 초개(草芥). 무용평론가, 음악평론가, 연극평론가. 화가. 1936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매동초와..

그래야 단풍다운 가을 단풍 - 장경린

그래야 단풍다운 가을 단풍 - 장경린 중국집에 잡혀 먹은 손목시계처럼 최신판 영한사전처럼 맛이 진한 몽고간장처럼 미군 야전잠바처럼 돼지 껍데기처럼 요즘도 헌책방에서 제법 거래가 되는 '思想界'처럼 조계사 대웅전 문지방 위 꼬리를 떨며 교미 중인 고추잠자리처럼 1리터에 1,450원에서 1,390원으로 다시 1, 530원으로 미친 듯이 널뛰는 휘발유처럼 단풍이여 오늘만큼은 잠시 세상 접어두고 분배냐 성장이냐 누가 뭐래도 북핵 위기니 인구 감소니 독도니 뭐니 다 잊고 단풍이여 그냥 좀더 붉게 타야 쓰겠다 가을 단풍이여 아파트 값이 폭등했지만 더 오를지 몰라 이사도 못 가고 있는 나처럼 자식 과외비 마련하러 노래방 도우미로 나갔다가 뽕짝에 푹 빠진 아줌마처럼 뻔질나게 날아오는 스팸 메일처럼 가을 단풍이여 이제는..

눈사람 자살사건 - 최승호

눈사람 자살 사건 - 최승호 그날 눈사람은 텅 빈 욕조에 누워 있었다. 뜨거운 물을 틀기 전에 그는 더 살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자살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으며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사는 이유 또한 될 수 없었다. 죽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더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텅 빈 욕조에 혼자 누워 있을 때 뜨거운 물과 찬물 중에서 어떤 물을 틀어야 하는 것일까. 눈사람은 그 결과는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뜨거운 물에는 빨리 녹고 찬물에는 좀 천천히 녹겠지만 녹아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따듯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 눈사람은 온수를 틀고 자신의 몸이 점점 녹아 물이 되는..

노래와 이야기 / 깽깽이풀 - 최두석

노래와 이야기 - 최두석 노래는 심장에, 이야기는 뇌수에 박힌다 처용이 밤늦게 돌아와, 노래로써 아내를 범한 귀신을 꿇어 엎드리게 했다지만 막상 목청을 떼어 내고 남은 가사는 베개에 떨어뜨린 머리카락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 하지만 처용의 이야기는 살아남아 새로운 노래와 풍속을 짓고 유전해 가리라 정간보가 오선지로 바뀌고 이제 아무도 시집에 악보를 그리지 않는다 노래하고 싶은 시인은 말 속에 은밀히 심장의 박동을 골라 넣는다 그러나 내 격정의 상처는 노래에 쉬이 덧나 다스리는 처방은 이야기일 뿐 이야기로 하필 시를 쓰며 뇌수와 심장이 가장 긴밀히 결합되길 바란다. - 시집 (문학과지성사, 1984) * 감상 : 최두석 시인. 1956년 전남 담양에서 태어났습니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와 동 대학원에..

양반다리 / 시를 위한 진화론 - 박일환

양반다리 - 박일환 내 고향은 충청도 멍청도라 불리기도 하지만 양반의 고향이라는 말도 있지 그래서 내가 양반다리하고 앉는 걸 좋아하는 걸까? 나는 순천 박씨 박혁거세를 먼 조상으로 하고 사육신의 한 명인 박팽년파에 속한다지만 아무래도 나는 우리 집 족보가 가짜인 것만 같아 비록 양반다리 자세를 좋아하긴 해도 상놈 출신이라고 해야 더 멋지고 당당할 것 같은데 시제(時祭)에 가서 두루마기 입은 어른들 보면 가짜 족보 아니냐는 말은 차마 꺼내기도 어려운 상황 양반다리 슬쩍 풀면서 조선 오백 년이 길었다며 한탄하고 양반다리 대신 책상다리라는 말을 쓰자고 해봤자 민중은 개돼지라는 출세한 자의 말 한마디에 무너지고 마는 형국 그러니 어쩌겠는가 개돼지임을 인정하고 한평생 엎드려 살며 사람이 개돼지보다 나은 게 뭐냐고..

지그시 / 시 안 쓰는 시인들 - 김해자

지그시 - 김해자 소나기 몇 줄금 지나간 어스름 옥수수 몇 개 땄지요 흘러내리는 자주와 갈빛 섞인 수염, 아무렇게나 겹겹 두른 거친 옷들 한 겹 두 겹 벗기다 그만 그의 연한 병아리 빛 속 털 보고 만 것인데 무게조차도 없이 그저 지그시, 알알이 감싸고 있는 한없이 보드라운 속내 만지고 만 것인데요, 진안 동향면 지나다 왜가리 숲 아주 오랫동안 바라본 적 있어요 소나무 가지에 앉아 있는 왜가리들, 꼼짝 않고 있는 새들은 모두 알을 품고 있었죠 폭우가 쏟아져도 한 자리에서 지그시, 입과 날개 거두고 지그시, 소중한 것 깊이 품어본 자들은 알죠 왜 한없이 엎드릴 수밖에 없는지, 왜 한사코 여리고 보드라워질 수밖에 없는지, 왜 하염없이 그를 감싸줄 수밖에 없는지, 사랑은 그런 것이다, 지그시 덮어주는 일에 골..

그늘에 묻다 - 길상호

그늘에 묻다​ - 길상호​ 달빛에 슬며시 깨어보니​ 귀뚜라미가 장판에 모로 누워 있다​ 저만치 따로 버려둔 뒷다리 하나,​ 아기 고양이 산문이 운문이는​ 처음 저질러놓은 죽음에 코를 대고​ 킁킁킁 계절의 비린내를 맡는 중이다​ 그늘이 많은 집,​ 울기 좋은 그늘을 찾아 들어선 곳에서​ 귀뚜라미는 먼지와 뒤엉켜​ 더듬이에 남은 후회를 마저 끝냈을까​ 날개 현에 미처 꺼내지 못한 울음소리가​ 진물처럼 노랗게 배어 나올 때​ 고양이들은 죽음이 그새 식상해졌는지​ 소리 없이 밥그룻 쪽으로 자리를 옮긴다​ 나는 식은 귀뚜라미를 주워​ 하현달 눈꺼풀 사이에 묻어주고는​ 그늘로 덧칠해놓은 창을 닫았다​ 성급히 들어오려다 창틀에 낀 바람은​ 다행히 부러질 관절이 없었다 - (문학동네, 2016) * 감상 : 길상호 시..

도토리들 / 환장하겠다 - 이봉환

도토리들 - 이봉환 어디 가을이 얼마큼 왔나 궁금해 산에 갔더니 ​키 작은 졸참나무 도토리들 바위틈에 수월찮이 나앉아서 꼭 포경수술 한 동무지간들 목욕탕에서처럼 쪼그리고 앉아서 ​운동 나온 아낙이 흘끔 보거나 말거나 큰놈 작은놈들 거시기가 밖으로 볼똑하니 나오도록 앉아서 ​가을볕 따글따글하니 쬐고들 있습디다요 - 시집 (실천문학사, 2013) * 감상 : 이봉환 시인. 1961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났습니다.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중등학교 교사로 부임하였으나 전교조 파동이 있었을 당시 해직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1988년 진보적 문예지 에 ‘해창만 물바다’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첫 시집 (녹두, 1990)를 내고, 두 번째 세 번째 시집인 (풀빛, 1991), (두리, 19..

여름 산 / 울릉도(鬱陵島) - 오세영

여름 산 - 오세영 자지러져 검푸르기까지 한 여름 산 짙은 녹음은 차라리 짐승의 무성한 털 갈기 같다. 태풍이 치는 밤, 쩌렁쩌렁 우는 그 포효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가. 언뜻 보인다 번갯불 사이로 온몸을 땀에 흠뻑 적신 채 대지에 웅크리고 있는 그 거대한 수컷 한 마리. 주체할 수 없는 욕망에 꽃을 잡아먹어, 새를, 숲을 잡아먹어 마침내 씩씩대며 나를 노려보고 있는 그 맹수 한 마리. - 시집 (천년의 시작, 2013) * 감상 : 오세영 시인. 1942년 전라남도 영광(靈光)에서 유복자로 태어났으며 외가가 있는 전남 장성에서 외할머니 손에 자랐고, 전북 전주에서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본관은 해주(海州)입니다. 그의 외가는 호남 성리학의 태두인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 1510~1..

하....그림자가 없다 - 김수영

하 …… 그림자가 없다 - 김수영 우리들의 적은 늠름하지 않다 우리들의 적은 커크 더글러스나 리처드 위드마크 모양으로 사나웁지도 않다 그들은 조금도 사나운 악한이 아니다 그들은 선량하기까지도 하다 그들은 민주주의자를 가장하고 자기들이 양민이라고도 하고 자기들이 선량이라고도 하고 자기들이 회사원이라고도 하고 전차를 타고 자동차를 타고 요리집엘 들어가고 술을 마시고 웃고 잡담하고 동정하고 진격한 얼굴을 하고 바쁘다고 서두르면서 일도 하고 원고도 쓰고 치부도 하고 시골에도 있고 해변가에도 있고 서울에도 있고 산보도 하고 영화관에도 가고 애교도 있다 그들은 말하자면 우리들의 곁에 있다 우리들의 전선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들의 싸움을 이다지도 어려운 것으로 만든다 우리들의 전선은 된켄르크*도 노르망디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