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436

구월이 오면 - 안도현

구월이 오면  - 안도현  그대구월이 오면구월의 강가에 나가강물이 여물어 가는 소리를 듣는지요뒤따르는 강물이앞서가는 강물에게가만히 등을 토닥이며 밀어주면앞서가는 강물이 알았다는 듯한 번 더 몸을 뒤척이며물결로 출렁걸음을 옮기는 것을그때 강둑 위로지아비가 끌고 지어미가 미는 손수레가저무는 인간의 마을을 향해가는 것을 그대구월의 강가에서 생각하는지요강물이 저희끼리만속삭이며 바다로 가는 것이 아니라젖은 손이 닿는 곳마다골고루 숨결을 나누어주는 것을그리하여 들꽃들이 피어나가을이 아름다워지고우리 사랑도강물처럼 익어가는 것을 그대사랑이란어찌 우리 둘만의 사랑이겠는지요그대가 바라보는 강물이구월 들판을 금빛으로 만들고 가듯이사람이 사는 마을에서사람과 더불어 몸을 부비며우리도모르는 남에게 남겨줄그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

이런 낭패 / 갑골(甲骨)길 - 도광의

이런 낭패 - 도광의 오랜만에 고향에 갔다간밤에 마신 술 탓에새순 나오는 싸리 울타리에그만 누런 가래 뱉어놓고 말았다늦은 귀향길 안쓰런 마음 더해가는고향 앞에서 나는 또 한 번 실수에무안해 하는데때마침 철 늦은 눈이내 허물을 조용히 덮어주고 있었다 - 시집 (문학동네, 2003)  * 감상 : 도광의(都光義) 시인. 호는 목우(木雨).1941년 경북 경산시 와촌면 동강리 171번지에서 태어났습니다.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후 1967년 마산고등학교(1967~1968)를 시작으로, 창신고(1969~1971), 대구 대건고(1971~1996), 효성여고(1997~1999) 등에서 국어 교사로 근무하였으며, 1999년 교직에서 은퇴하였습니다. 1966년 그가 대학 4학년에 재학 중일 때, 대구 매일신..

처서(處暑) / 풀벌레 소리 - 허형만

처서(處暑) - 허형만 날벌레 낮게 낮게 난다순식간에 날이 흐리고앞산 중턱 소나무검은 구름에 갇혔다푸드덕, 지상의새들이 일제히 날아오르는 소리가세찬 바람을 동반하기 시작했다 살아온 날보다살아갈 날이 훨씬 짧아졌구나천상의 모든 생명들이서둘러 흙으로 돌아오고 있구나 - 시집 (문학과 지성, 1999) * 감상 : 허형만 시인.1945년 전라남도 순천에서 태어났습니다. 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성신여자대학교에서 국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73년 을 통해 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시집 (1978), (오상출판사, 1985), (영언문화사, 1986), , , (문학세계사, 1988), (황토, 1991), (한국문학, 1995), (문학과지성, 1999), (문학사상, 2002), (..

여행의 목적 / 낮 동안의 일 - 남길순

여행의 목적 - 남길순 그것은 몹시 희박하다 어디니, 라고 묻자화장실이야다음 날 다시 묻는다피곤해서 좀 쉬고 있어요자다가밥을 먹다그럴거면 그 먼 데까지 여행은 왜 갔니 연락이 뜸해지기 시작한다는 거시간과 장소로부터 점점 멀어진다는 거모두에게 잊힌다는 거 흐르는 강물에사람들이 엎드려 빨래를 하고 있다때를 묻히고다시 흔적을 지우고빨래를 하려고 태어난 사람처럼 열심히 빨래를 하다가물가에 엎드려 잠을 자고 있다 먼지를 일으키며 트럭이 지나간다먼지를 들이마시며 걷고 걸어 도착한 곳은 흰 무덤이다 내려올 걸그 높은 데는 왜 올라가니?아무도 없는데 누가 묻는다 죽은 사람의 약력이 줄줄이 적혀 있다 - 시집 (창비, 2022) * 감상 : 남길순 시인.1962년 전남 순천 월등면에서 태어났습니다. 순천대학교대학원 국어..

여름 끝물 / 자라 - 문성해

여름 끝물 - 문성해 여문 씨앗들을 품은 호박 옆구리가 굵어지고매미들 날개가 너덜거리고쌍쌍이 묶인 잠자리들이 저릿저릿 날아다닌다 얽은 자두를 먹던 어미는 씨앗에 이가 닿았는지 진저리 치고알을 품은 사마귀들이 뒤뚱거리며 벽에 오른다 목백일홍이 붉게 타오르는 수돗가에서끝물인 아비가 늙은 오이 한 개를 따와서 씻고 있다 - 시집 (문학동네, 2016) * 감상 : 문성해 시인.1963년 경북 문경읍 상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영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1986년)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일간 신문의 신춘 문예에 작품을 제출하는 등, 수년을 노력한 끝에 1998년 매일신문 신춘 문예에서 ‘공터에서 찾다’와 2003년 경향신문 신춘 문예서 시 ‘귀로 듣는 눈’이 연거푸 당선되어 등단하였습니다. ‘문채인’이라는 이..

봉우리 / 아름다운 사람 - 김민기

봉우리 - 김민기 작사/작곡 사람들은 손을 들어 가리키지높고 뾰족한 봉우리만을 골라서내가 전에 올라가 보았던 작은 봉우리 얘기 해줄까 봉우리 지금은 그냥 아주 작은 동산일 뿐이지만그래도 그때 난 그보다 더 큰 다른 산이 있다고는 생각지를 않았어나한테는 그게 전부였거든 혼자였지 난 내가 아는 제일 높은 봉우리를 향해 오르고 있었던 거야너무 높이 올라온 것일까? 너무 멀리 떠나온 것일까?얼마 남지는 않았는데 잊어버려!일단 무조건 올라보는거야봉우리에 올라서서 손을 흔드는 거야 고함도 치면서지금 힘든 것은 아무것도 아냐저 위 제일 높은 봉우리에서 늘어지게 한숨 잘텐데 뭐. 허나, 내가 오른 곳은 그저 고갯마루였을 뿐길은 다시 다른 봉우리로저기 부러진 나무등걸에 걸터앉아서 나는 봤지낮은 데로만 흘러 고인 바다작은..

장마 - 목필균 / 최하림

장마 - 목필균 굵은 비가 내린다.언제 그칠 줄 무르는 장맛비가지하방(地下房) 창가에 흐른다. 그렇지 않아도 눅눅한 방에칠순으로 향하는 마른 육신이고단한 몸을 담고 있는데비는 칭얼칭얼 치마꼬리를 잡는다. 온종일 고층아파트 계단 쓸어내리던무릎관절 오지게 부어오르는 밤을살만한 자식들 손길 마다하고홀로 지켜내는 유씨 할머니. 낮에도 어두운 그곳을햇볕 속에서도 축축한 그곳을피하지 않고 끊임없이 비가 내린다. - 시집 (오감도, 2003년), * 감상 : 목필균 시인.1954년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춘천 교육대학과 성신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과를 졸업했습니다. 1995년 의 신인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시집으로 (우이동 사람들, 1998년), (오감도, 2003년), (오감도, 2012), (오감도, 201..

일흔의 꿈 여든의 꿈 / 아버지의 시 - 이형복

일흔의 꿈 여든의 꿈 - 이형복 새벽 2시 16분어제보다 10여 분 더 빨리 깨어났다.이렇게 빨리 깨어났다는 것은이미 꿈을 다 꾸어버렸거나아예 꿈을 포기해버렸다는 이야기이다.일흔이 되고 여든이 되기 위해서는또 다른 꿈을 꾸어야 하는데벌써 깨어나면 어쩌자는 것인가?우우우 소리라도 지르며거리로 나서고 싶지만아직은 모두들 꿈을 꾸고 있는 시간.나 홀로 꾸지 못하는 꿈이그들에게 무슨 염려가 되랴새벽이면 혼자라는 생각에내 삶이 더 측은해진다. *벌써 지쳐버린 것일까?아니면 지금 이대로이어도 행복한 때문일까? 아직도 친구들은 세상살이의 한 부분에서 열심이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요지부동이다. 인생 100세 시대라고 더 열심히 모아두어야 한다고 열심인 친구들을 보고 그저 함께 놀기나 하자고 말리려 들기만..

정지의 힘 / 지켜지지 못한 약속 - 백무산

정지의 힘  – 백무산 기차를 세우는 힘, 그 힘으로 기차는 달린다시간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미래로 간다무엇을 하지 않을 자유, 그로 인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안다무엇이 되지 않을 자유, 그 힘으로 나는 내가 된다세상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달린다정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달리는 이유를 안다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 - 시집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창비시선, 2020) * 감상 : 백무산 시인. 본명은 백봉석.1955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났습니다. 1974년 현대중공업에 노동자로 입사해 노동을 하다가 1984년 무크지 제1 집에 ‘지옥선’을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편집위원을 지냈고, 1992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

정희성과 정호승 / 어떤 비선(秘線) / 탈의나주(脫衣裸走) -고운기

정희성과 정호승 - 고운기 두 사람 다 시인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서아니, 더러는 좀 설익기도 해서정희성을 정호승으로 알고정호승을 정희성으로 부르는 일도 생긴다. 비슷한 이름이라 그렇다 해도 정희성을 정희승이라거나정호승을 정호성이라거나신나게 헷갈린다 그러니까 세상에는정희성과 정호승이 살고정희승과 정호성이 떠돌아다닌다 진짜와 유령의 공존 그러다 아예정희성의 이름에 정호승의 약력이 붙고정희성 시의 제목에 정호승의 시가 붙고정희성의 1연에 정호승의 2연이 붙는다 거기서 더 기막힌 시가 나온다면? 드디어 유령은 시인으로 데뷔하여어느덧 유령 시인이 한몫하는 세상을 만들 것이다 나는 어젯밤 정희성 시인과 오랫동안 이런 이야기 나눴는데그는 정말 정희성이었을까혹 정희승이 아니 정호성은 아니었을까. - 시집 (문예 중앙..

사랑 / 감자 / 꼭 한 번은 - 박형진

사랑 - 박형진 풀 여치 한 마리 길을 가는데내 옷에 앉아 함께 간다어디서 날아왔는지 언제 왔는지갑자기 그 파란 날개 숨결을 느끼면서나는모든 살아 있음의 제 자리를 생각했다 풀 여치 앉은 나는 한 포기 풀잎내가 풀잎이라고 생각할 때그도 온전한 한 마리 풀 여치하늘은 맑고들은 햇살로 물결치는 속 바람 속나는 나를 잊고 한없이 걸었다 풀은 점점 작아져서새가 되고 흐르는 물이 되고다시 저 뛰노는 아이들이 되어서비로소 나는이 세상 속에서의 나를 알았다어떤 사랑이어야 하는가를오늘 알았다. - 시집 (창작과 비평, 1994) * 감상 : 박형진 시인.1958년 전라북도 부안군 도청리 모항 마을에서 7남매 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아홉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하였고 졸업하자마자 변산 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학기..

감자꽃을 따다 - 손택수

감자꽃을 따다 - 손택수 주말농장 밭고랑에 서 있던 동업자장철문형이 감자꽃을 딴다철문형, 감자꽃 이쁜데 왜 따우내 묻는 말에이놈아 사람이나 감자나너무 오래 꽃을 피우면알이 튼실하지 않은 법이여꽃에 신경 쓰느라감자알이 굵어지지 않는단 말이다평소에 사형으로 모시는 형의 말씀을 따라나도 감자꽃을 딴다꽃 핀 마음 뚜욱 뚝 끊어낸다꽃 시절 한창인 나이에 일찍 어미가 된 내 어머니도눈 질끈 감고 아까운 꽃 다 꺾어냈으리라조카 애가 생기고 나선 누이도화장품값 옷값을 말없이 줄여갔으리라토실토실 잘 익은 딸애들 등에 업고형이 감자꽃을 딴다딸이 생기고 나선 그 좋은 담배도 끊고술도 잘 마시질 않는다는 독종꽃핀 마음 뚜욱 뚝 분지르며한 소쿠리 알감자 품에 안을 날을 기다린다 - (2006년 9~10월호)- 시집 (실천문학사..

잘 듣는 약 / 속수무책 - 김경후

잘 듣는 약 - 김경후 이번 약은 잘 들을 겁니다의사 말을 듣고믿고 싶은 그 말을 믿고 나는 묻는다 얼마나 잘 듣지 않았나이불 속에 드러누운 나의 마음은컴컴한 창밖 얼어붙은 얼굴을 들이미는 나의 고함조차듣지 않았지 열어주지 않았지 내가 있어도 나는 빈방없어도 나는 나의 빈방 누구를 기다리는가골목 구석에 쑤셔 박은 내 밤들털 빠진 등허리를 말고 자던 내가 버린 고양이들듣지 않았지 나는 내가 지내온 빈 밤의 소리들내가 지워버린 빈 밤의 소리들 듣지 않고 딛고 가야 할 소리만을 믿었던 나는나는 텅텅 빈 소리그것들을 잘 다지고 잘 부수지만 잘 듣지는 않는 병 앞으로도 나는 듣지 않을빈 방의 나의 소리들이 약은 잘 듣고 있겠지 - 시집 (문학동네, 2012) * 감상 : 김경후 시인.1971년 서울에서 태어났습니..

목계장터 / 나목(裸木) - 신경림

목계장터 * - 신경림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나루에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려민물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 註 - 목계장터 : 1910년대까지 중부 지방의 각종 산물의 집산지로, 남한강안(南漢江岸)의 수많은 나루터 중 가장 번창했으나, 1921년 일제의 식민지 수탈 정책의 일환으로 충북선이 부설되자 ..

오월 / 인연 - 피천득

오월 - 피천득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있는 비취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스물한 살이 나였던 오월.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해변가에 엎어져 있는 보트, 덧문이 닫혀 있는 별장들. 그러나 시월같이 쓸쓸하지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섬들이 생생한 색이었다. 득료애정통고 得了愛情痛苦실료애정통고 失了愛情痛苦 * 젊어서 죽은 중국 시인의 이 글귀를 모래 위에 써놓고, 나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오월 속에 있다. ..

나팔꽃 / 당신과 살던 집 - 권대웅

나팔꽃 - 권대웅 문간방에 세 들어 살던 젊은 부부단칸방이어도 신혼이면날마다 동방화촉(洞房華燭)인 것을그 환한 꽃방에서부지런히문 열어주고 배웅하며 드나들더니어느새 문간방 반쯤 열려진 창문으로갓 낳은 아이야물딱지게 맺힌 까만 눈동자똘망똘망 생겼어라여름이 끝나갈 무렵돈 모아 이사 나가고 싶었던 골목집어머니 아버지가 살던저 나팔꽃 방 속 - 시집 (문학동네, 2017) * 감상 : 권대웅 시인.1962년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서 시 ‘양수리에서’가 당선, 등단하였습니다. 시집으로 (민음사, 1993), (문학동네, 2003), (문학동네, 2017)가 있고, 산문집 (김영사ON, 2014), (예담, 2015), 장편동화 (국민서관, 1997), (이레, 2002) 등이 있습니다..

질투는 나의 힘 / 우리 동네 목사님 / 홀린 사람 -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 시집 (문학과지성사, 1989) * 감상 : 기형도 시인.1960년 3월13일 경기도 옹진군(현재는 인천광역시) 송림면 연평리 392번지에서 당시 공무원이었던 아버지 기우민과 어머니 ..

모란이 피기까지는 / 오월 -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모란이 피기까지는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 (1934년 4월)- 시집 (시문학사, 1935) * 감상 : 김윤식 시인. 호는 영랑.1903년 1월16일, 전남 강진군 군내면(현재 강진읍) 남성리에서 대지주의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1917년 휘문의숙(현재 휘문고등학교의 전신)에 입학하였으며 3학년에 재학 중..

성북동 비둘기 / 저녁에 - 김광섭

성북동 비둘기 - 김광섭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가슴에 금이 갔다.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돈다. 성북동 메마른 산골짜기에는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피난하듯 지붕에 올라앉아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산1번지 채석장에 도루 가서금방 따낸 돌 온기(溫氣)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고사람 가까이서사람과 같이 사랑하고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