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질투는 나의 힘 / 우리 동네 목사님 / 홀린 사람 - 기형도

석전碩田,제임스 2024. 5. 15. 06:00

질투는 나의 힘

 

-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 시집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 1989)

 

* 감상 : 기형도 시인.

1960년 3월13일 경기도 옹진군(현재는 인천광역시) 송림면 연평리 392번지에서 당시 공무원이었던 아버지 기우민과 어머니 장옥순 사이의 3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1964년 경기도 시흥군으로 이사해 1967년 서면 소하리(지금 광명시 소하동 701-6번지)에 새집을 지어 옮긴 후 타계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울의 시흥국민학교와 신림중학교를 졸업한 후 고등학교는 종로구에 위치한 중앙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시흥에서 그곳까지 버스로 통학하였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가계 전체가 가난하게 살게 된 일, 중학교 3학년 때는 바로 위 누나가 불의의 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난 일, 그리고 안개가 많이 끼는 안양천이라는 주변 환경 등은 시인의 내면에 깊이 체화되어 그의 시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생계를 담당해야 했던 어머니, 그리고 닥쳐온 가난은 온 가족에게 영향을 미쳤는데, 특별히 막내였던 기형도에게는 더 크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가 시를 쓰기 시작했던 때가 누이가 죽은 후부터였기 때문입니다. 공장들이 들어서는 안양 천변의 안개 낀 풍경, 그리고 그 안개를 뚫고 일터로 향하는 노동자들, 녹녹지 않은 살림을 꾸려가기 위해서 시장에 나가야 하는 어머니의 일하는 모습과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던 가난의 기억들은 그의 유년 시절을 온통 지배했을 정도로 그의 시를 이루는 바탕과 단골 소재가 되었습니다.

 

1979년 연세대학교 정법대학에 입학하고 나중에 정치외교학과를 전공하지만 대학 생활은 주로 ‘연세문학회’와 더불어 했습니다. 1980년 서울의 봄을 맞아 연세대학교 학보인 ‘연세 춘추’에 시 ‘노마네 마을의 개’를 기고하였다가 공안 당국에 끌려가 조사를 받은 적도 있었습니다. 캠퍼스에서 주점에서 합평과 토론을 이어가며 암울한 1980년대를 이겨냈습니다. 1981년 방위병으로 입대, 근무지인 안양 지역의 문학동인 ‘수리시’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초기작품들의 대부분을 쓰고 정리했다고 합니다. 1983년 복학하였으며, ‘연세춘추’가 주관하는 ‘윤동주 문학상’에서 시 ‘식목제’가 당선, 수상하는 등 부지런히 작품을 써서 기성문단에도 투고하던 중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 시 '안개'가 당선되어 등단하였습니다.

 

1985년 2월이 졸업이지만 그 이전인 1984년 중앙일보에 입사해 이후 정치부, 문화부, 편집부 등에서 기자 생활을 하며 많은 문우들과 교류했습니다. 1980년대 젊은 시단의 한 축이던 ‘시운동’ 동인 모임에도 적극 참여했으며 왕성한 시작 활동으로 주목을 끌었습니다. 첫 시집 발간을 준비하던 1989년 3월7일 새벽, 종로의 파고다 극장에서 2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인(死因)은 고혈압으로 인한 뇌졸중이었습니다. 경기도 안성 소재 천주교 수원교구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는데 묘비에는 그의 영세명인 ‘그레고리오’가 새겨져 있습니다.

 

해 5월 유고 시집 <입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 1989)이 출간되었고, 1994년에는 그의 미발표 유고 시, 소설, 산문을 모은 문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솔, 1994)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기형도 전집>(문학과지성사, 기형도 전집 편집위원회, 1999) 출간되면서 그의 시, 소설, 산문들이 한꺼번에 정리되었으며, 그의 20주기가 되는 해인 2009년에는 그를 아끼고 추억하는 지인과 문우들의 산문, 그의 시를 비평한 문장들을 한데 모은 <정거장에서의 충고 – 기형도의 삶과 문학>(문학과지성사, 2009)이 출간되기도 하였습니다. 2017년 11월, 광명시는 시인의 시업(詩業)을 기리기 위해 그가 살았던 소하동, 그의 집 근처에 <기형도 문학관>을 건립하였습니다.

 

근 ‘아침에 읽는 한 편의 시’ 애독자이신 팔순이 넘은 연세이지만 문학소녀처럼 시와 문학, 여행에 조예가 깊은 지인께서 ‘광명에 있는 기형도 문학관을 코로나 기간 두 번씩이나 가 보았다’면서 자신은 기형도 시인의 시를 좋아하는데, ‘그 문학관을 가보았는지’ 제게 물었습니다. 기형도 시인은 저와 동년배로 동시대 비슷한 공간을 살았던 시인이라 이미 그의 시를 읽었어야 옳았지만, 아마도 지금 살아있지 않은 시인이라 저의 관심 밖에 살짝 비껴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그의 시를 몇 편 함께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여러 시들 중 오늘 감상하는 이 시들을 선택한 것은, ‘기형도’라는 한 시인을 특별히 신앙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는데 이보다 더 적절한 시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인은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미래의 어느 시점에 있는 자신을 상상하면서 현재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형식으로 시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먼 훗날, 시인이 써 놓은 책갈피의 메모들이 힘없이 떨어졌는데, 그 메모지 위에 적힌 기록들이 지금 현재 시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메모들의 내용을 보면서 시인은 지금 자신을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운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자신의 모습을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현실에 튼튼하게 뿌리 박은 현실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게 아니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붕 뜬 상태로 ‘머뭇’거리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메모에 적힌 시인의 생각은 급기야 오직 자신에게 남은 것은 ‘탄식과 질투 뿐’이라고 말하기에 이릅니다. 저녁 거리마다 청춘을 세워두고, 또 살아온 날들을 곰곰이 세어보지만 아무도 나를 두려움의 존재로 대해주지 않는, 그야말로 온통 ‘질투뿐’인 자신을 바라보면서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 미친 듯이 사랑하며 살고 있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도로 이렇게 ‘짧은’ 메모들을 남겨도 보았지만, 먼 훗날의 자신이 현재의 자신을 돌아보면서, ‘너는 단 한 번도 네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구나’라고 질책할 것이 뻔하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러나 이 시가 마치 온통 부정적이고 우울한 것처럼 보이지만, 시의 행간이 말하는 것은, 시인이 노래하고자 하는 것에 반전이 있다는 것입니다. 열정적으로 살아 왔지만 탄식과 질투만을 일삼으며 정작 ‘자신에 대한 사랑’은 하지 못했다는 짙은 아쉬움은 어쩌면 지금 시인이 간절히 벗어나고 싶은 ‘현재의 열망이요 몸부림’이며, 그것이 바로 시인이 제목에서도 말했듯이 ‘질투와 탄식’이 되어 곧 자신을 버티게 하는 ‘힘’이라는 것 말입니다. 그의 시들이 대체로 어둡고 우울하지만 그의 시 행간에서 읽히는 것은 가난과 상실, 도시적 암울한 일상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그 이면에 있는 ‘반드시 언급해야 할 이상(理想)’을 늘 상정하면서 나름의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의 시집 끝부분에 실려 있는 시 중에 ‘우리 동네 목사님’과 ‘홀린 사람’이라는 제목의 시가 눈에 띕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또 말보다는 삶 속에서 실천하는 신앙을 견지해야 한다는, 평소 시인이 갖고 있는 이상적인 목사 상(牧師像)을 노래하는 시임에는 두말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 동네 목사님

 

- 기형도

 

읍내에서 그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철공소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그는

양철 홈통을 반듯하게 펴는 대장장이의

망치질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자건거 짐틀 위에는 두껍고 딱딱해 보이는

성경책만 한 송판들이 실려있었다

교인들은 교회당 꽃밭을 마구 밟고 다녔다,

일주일 전에 목사님은 폐렴으로 둘째 아이를 잃었다.

장마통에 교인들은 반으로 줄었다.

더구나 그는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

찬송하는 법도 없어

교인들은 주일마다 쑤군거렸다.

학생회 소년들과 목사관 뒤터에 푸성귀를 심다가

저녁 예배에 늦은 적도 있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서

맹렬한 본노를 자아냈다.

폐렴으로 아이를 잃자

마을 전체가 은밀히 눈빛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에 그는 우리 마을을 떠나야 한다.

어두운 천막교회 천장에 늘어진 작은 전구처럼

하늘에는 어느덧 하나둘 맑은 별들이 켜지고

대장장이도 주섬주섬 공구를 챙겨들었다.

한참 동안 무엇인가 생각하던 목사님은 그제서야

동네를 향해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저녁 공기 속에서 그의 친숙한 얼굴은 어딘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

 

- 시집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 1989)

 

홀린 사람

 

- 기형도

 

사회자가 외쳤다

여기 일생 동안 이웃을 위해 산 분이 계시다

이웃의 슬픔은 이분의 슬픔이었고

이분의 슬픔은 이글거리는 빛이었다

사회자는 하늘을 걸고 맹세했다

이분은 자신을 위해 푸성귀 하나 심지 않았다

눈물 한 방울도 자신을 위해 흘리지 않았다

사회자는 흐느꼈다

보라, 이분은 당신들을 위해 청춘을 버렸다

당신들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

그분은 일어서서 흐느끼는 사회자를 제지했다

군중들은 울먹였고 감동한 여인들은 실신했다

그때 누군가 그분에게 물었다, 당신은 신이가

그분은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유령인가, 목소리가 물었다

저 미치광이를 끌어내, 사회자가 소리쳤다

사내들은 달려갔고 분노한 여인들은 날뛰었다

그분은 성난 사회자를 제지했다

군중들은 일제히 그분에게 박수를 쳤다

사내들은 울먹였고 감동한 여인은 실신했다

그분의 답변은 군중들의 아우성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 시집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 1989)

 

저 말로만이 아니라, 제대로 된 ‘삶의 말씀’으로 교인들을 가르쳤던 우리 동네 목사님이 결국은, 그 교회를 어떤 상황에서 떠날 수밖에 없었음을 알려주는 시가 바로 두 번째 소개한 ‘홀린 사람’이라는 재미난 제목의 시입니다. 이 두 편의 시가 시인 기형도가 천주교 신앙을 가진 시인으로서, 평소 어떤 ‘이상적인 신앙관’을 가졌는지를 잘 보여주는 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생 동안 이웃을 위해 산 분’, ‘이웃의 슬픔은 이분의 슬픔’, ‘이분의 슬픔은 이글거리는 빛’ 그 자체였던 목사님이었지만, 군중 심리에 의해 죽 끓듯이 변하는 뭔가에 홀린 무리에 의해, 결국 교회를 쫓겨나 철공소의 대장장이로 살아가는 ‘우리 동네 목사’의 이미지에서, 배척당하여 십자가에 달려야 했던 예수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고 말하면 무리한 해석일까요.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