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순간은 막 열린 영원 / 피고 지는 일 - 허향숙

석전碩田,제임스 2024. 4. 24. 06:00

순간은 막 열린 영원

 

- 허향숙

 

오지 않은 시간 속

무수한 첫들이

 

머언 기억 속

한 톨의 씨로 있음을 본다

 

순간은

 

첫의 꽃이자

영원의 꽃이다

 

- 시집 <오랜 미래에서 너를 만나고>(천년의 시작, 2024)

 

* 감상 : 허향숙 시인.

1965년 충남 당진에서 태어났습니다. 2018년 <시작>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백강문학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현재 시낭송과 스피치를 가르치고 있으며 시 낭송가와 MC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시집으로 <그리움의 총량>(천년의 시작, 2021), <오랜 미래에서 너를 만나고>(천년의 시작, 2024) 등과 전자 소시집 <슬픔은 늙지 않는다>가 있습니다.

 

향숙 시인의 시는 ‘아침에 읽는 한 편의 시’에서 그동안 두세 차례 소개했던 적이 있습니다. 특히 3년 전, 그녀의 첫 시집에 실린 시 두 편을 소개하면서, 딸을 먼저 저세상으로 보낸 어미의 심정을 절절이 노래한 시편들을 통해 시인의 시 세계를 접하고 그 슬픔을 견디며 그 깊은 곳에서 건져 올린 주옥같은 시를 함께 공감했던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https://jamesbae50.tistory.com/13411175)

 

늘 감상하는 시는 지난달에 발간된 따끈따끈한 시인의 두 번째 시집에 실린 시인데, 첫 번째 시집에 실린 시와는 달리, 극한 슬픔을 승화시켜 한결 보편적인 서정(抒情)으로 노래하고 있어 이제는 좀 더 편하게 읽을 수 있다는 느낌이 들어 시집을 읽으면서 얼마나 마음이 놓였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 비결을 찾아내려고 시집을 여러 번 읽다가 바로 이 시를 만났습니다.

 

인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영원과 잇대어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꽃’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순간은 // 첫의 꽃이자 / 영원의 꽃이다’라고 말입니다. 이 땅을 떠나면 모든 게 끝나는 게 아니라, 또 다른 세계인 영원으로 이어지는 첫 문이라는 사실을 시인은 깨닫고, 이곳에서 소중한 ‘순간’을 영원을 위한 한 톨의 첫 씨가 되도록 하겠다고 다짐하는 시입니다.

 

로 이 다짐을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는, 같은 시집에 실려 있는 또 다른 시를 읽어보겠습니다. 이 시에서 시인은 ‘지금 캄캄하다고 하여 울지 말자 / 머지 않아 어둠은 질 것이고 / 사위가 환해’ 질 것이라고, 어둠 너머에 ‘늘’ 빛나고 있는 영원한 태양을 상기시키며, 스스로에게 소망의 노래를 불러주고 있습니다.

 

피고 지는 일

 

- 허향숙

 

피고 지는 일은

어둠의 몫

 

태양은 늘 처음 자리에서 빛나고

어둠 혼자 피고 진다

 

지금 캄캄하다 하여 울지 말자

머지 않아 어둠은 질 것이고

사위 환해지리니

 

- 시집 <오랜 미래에서 너를 만나고>(천년의 시작, 2024)

 

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 ‘수야’가 떠난 지 벌써 14년. 3년 전 첫 번째 시집을 내면서 시인은 극한 슬픔을 통해서 다시 태어날 정도로 ‘눈이 번쩍 떠’지는 새로운 탄생의 사건이 있었음을 귀띔했고, 그 새롭게 눈 뜬 사건이 바로 ‘시’였음을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첫 시집의 시편들이 ‘낯설고 경이로운’ 세계를 알게 된 것을 자신이 ‘재탄생’하는 기적과 같은 것이었다고 노래하는 시편들이었다면, 두 번째 시집의 시편들은 그 단계를 훌쩍 뛰어넘어, 이제 한결 담담한 마음으로 죽음 그 너머에 있는 ‘영원’을 바라볼 줄 아는 시선을 장착한 시편들로 가득차 있다고 해야 할까요. 피고 지는 일이 ‘어둠의 몫’이라면, 그 피고 지는 어둠의 일로 인해 우왕좌왕 방황할 일이 아니라 ‘늘 처음 자리에서 빛나고’ 있는 영원한 태양이 있음을 바라보자는 목소리를 내고 있으니 말입니다.

 

울대 병원에서 내과 전문의로 34년을 근무했던 분이 쓴, 죽음 후에 또 다른 삶이 분명히 있다는 내용을 담은 책을 요즈음 흥미 있게 읽고 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을 평생 해 온 의사 본인이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라는 의문이 생기면서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어느 날 아내가 권해 준 ‘사후생(死後生)’이라는 책을 읽고 죽음을 바라보는 가치관에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교에서나 가르치는 줄 알았던 사후의 생(生)에 대해, 그는 본격적으로 과학자의 자세로 공부했고 그 결과 수많은 과학적 연구 성과들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연구 결과들이 공통적으로 결론을 맺고 있는 것, 즉 ‘죽음은 사방이 꽉 막혀 있는 벽이 아니라, 다른 세계 즉 영원으로 이동하는 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후 그는 대중을 상대로 ‘죽음의 의미를 제대로 직면하고 사유하며, 살아 있는 순간순간을 충실하게 살다가 존엄한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죽음학’을 강의하는 ‘죽음학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향숙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제목, <오랜 미래에서 너를 만나고>를 보는 순간 마치 데자뷰처럼 내가 읽고 있는 그 의사의 책 내용을 한 줄로 요약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을 정도였습니다. 시집의 가장 앞에 있는 ‘시인의 말’에서 시인은 ‘내게 있어 생이란 / 무애(無碍)하는 일 / 오랜 미래에서 만나 너를 / 내 안에 심는 일’이라고 담담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순간 여기에서’ 충실하게 살아가는 일이, 바로 너를 오랜 미래에서 다시 만나는 일과 같음을 선언하는 말입니다.

 

쪼록 거칠고 캄캄한 삶의 파도를 만나 지친 영혼들이 시인의 시를 읽으며 시인이 바라본 그 태양 빛을 볼 수 있기를, 또 시인이 그런 영롱한 시편들을 삶의 깊은 바다에서 계속 건져 올리며 정신해 나가길 응원합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