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
- 허향숙
시인이 그랬어
장미에 가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가시나무에 장미처럼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고
눈이 번쩍 떠졌어
고 정 관 념
자라면서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는
사념들
곰팡이 포자처럼
은밀하게 침투한 편견들
벼랑이 파도를 놓치거나
구름이 하늘을 흐르게 하거나
향기가 바람을 흔들어 깨운다는
생각의 전이
통념을 벗고 새로운
관념으로 갈아입으니
세계가 낯설고 경이롭네
나는 다시 태어나 한 생을 얻네
- 시집 <그리움의 총량>(천년의 시작, 2021)
* 감상 : 허향숙 시인.
1965년 충남 당진에서 태어났습니다. 2018년 <시작>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현재 백강문학회 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시집으로 <그리움의 총량>(천년의 시작, 2021)이 있습니다.
오늘 감상하는 시는 늘 그렇게 생각하던 것을 벗어 던지고 새로운 통찰로 보기 시작하니 ‘세계가 낯설고 경이롭’기까지 하다고 노래한 평범한 시입니다. 그러나 시를 읽고 또 읽을수록 깊은 맛이 나는 시입니다. 아니 시인의 말처럼 ‘나는 다시 태어나 한 생을 얻’는 재탄생을 맛보기까지 했다고 고백하는 시입니다.
시인은 ‘은밀하게 침투한 편견들’로 무장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고 정 관 념’이라고 표현합니다. 각각의 단어들 사이에 한 칸 한 칸을 띄어 강조하고 싶은 마음이 그대로 전달되어져 옵니다. ‘장미에 가시가 있는 것이 아니라 / 가시나무에 장미처럼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고’ 시각을 바꾼 것을 시작으로, ‘벼랑이 파도를 놓치거나 / 구름이 하늘을 흐르게 하거나 / 향기가 바람을 흔들어 깨운다는’ 생각의 전이들은 끝없이 이어집니다.
허향숙 시인의 시를 처음 접한 건, 지난 8월 중순, 아직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고 또 요란한 매미 소리가 한 창일 때였습니다. 최서림 시인의 ‘울음통’이라는 시를 소개하면서 같은 제목의 시이지만 다른 느낌을 노래했던 허 시인의 시를 간단하게 언급했던 적이 있었지요. 그런데 그 감상문을 블로그에 탑재 한 며칠 뒤, 뜻밖에도 허향숙 시인이 직접 댓글을 달아주었습니다. 그 인연 때문에 허 시인의 시집도 한 권 선물로 받았고 제대로 그녀의 시편들을 감상할 수 있었으니 참으로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매주 수요일마다 시 감상문을 나누면서 글 때문에 ‘오프’에서도 귀한 인연이 이어진 건, 지난 해 고(故) 박찬 시인의 시를 소개한 후 올해 초 그의 1주기 때 발행된 <시인 박찬 평전> 책을 특별 선물로 받게 된 일 이후 두 번째입니다. 허 시인은 제가 그녀의 시를 감상하면서 ‘오래 전 떠난 친구 때문에 밤을 새워 울었던 자기 자신의 그 때 그 일을 정면으로 맞닥뜨리고 있다’고 표현한 부분을 바로 잡아 주었습니다. ‘여고 1학년인 딸을 잃고 쓴 詩이지요....’라는 간단한 댓글로 말입니다.
그 때 소개했던 허향숙 시인의 ‘울음통’ 전문을 다시 전재해 봅니다.
‘매미의 몸은 죄다 울음통이에요 울음을 쏟아 내지 않고는 이 여름을 건너갈 수 없어요 울고 또 울다 보면 빈껍데기만 남겠죠 // 오래전 떠난 그녀 때문에 밤을 도와 울었어요 우는 일이 천직인 양 소낙비처럼 퍼붓다가 가랑비처럼 가랑대다가 폭풍우처럼 몰아치다가 매미의 최후처럼 텅 빈 몸이 되었지요 // 8월의 바람은 뜨겁다 못해 하얘요 울음이 다 빠져나간 매미의 사체를 하얗게 태우고 있어요’ 시집 <그리움의 총량>(천년의 시작, 2021)
급성 백혈병으로 끝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2010년 3월, 열여섯 번째 봄을 뒤로하고 와병 백일 만에 생을 벗어 놓은 채' 딸 ‘수야’는 ‘그러니까 엄마, 울지마!’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 날 이후 울음이 전염병처럼 창궐하듯 시인의 삶을 슬픔이 지배했지만, 그 슬픔이 제 발로 시인을 나서는 그 날까지 기다렸고 그녀는 첫 시집을 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이 시집을 딸에게 바친다고 담담하게 말하며 서문에 이렇게 쓸 수 있었습니다.
‘그 날 이후, 옷처럼 생을 벗고 입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했다. 어쩌면 나는 밤마다 생을 벗어 옷장에 걸어 두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다가, 십여 년 전에 벗어 놓은 생 꺼내 입으면 소원이 없겠다 생각하다가, 갑자기 복받쳐 오르는 설움 한 채 토해 내다가, 그 집에 들어 풀피리처럼 울다가, 다 해지고 헐거워진 생 무슨 미련을 두나 생각하다가, 네가 남기고 간 마지막 말 때문에 석회질에 뻑뻑해진 발목 끌며 날마다 산에 오른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 ‘수야’가 떠난 지 벌써 11년. 아마도 그동안 시인의 삶에는 큰 변화의 사건이 있었던 듯합니다. 오늘 감상하는 시에 다시 태어날 정도로 ‘눈이 번쩍 떠’지는 새로운 탄생의 사건이 있었음을 귀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새로운 눈을 뜨게 해 준 그 사건은 바로 ‘시’였음을, ‘시인이 그랬어’라는 첫 문장으로 시가 시작이 되는 것에서 눈치 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로 인해서 바로 그런 ‘낯설고 경이로운’ 세계를 알게 된 것이 자신에게는 ‘탄생’과 같은 기적이었음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셋째 시집을 상재하며 내 영혼의 무게만 가벼워지는 것이 아니라 시를 읽는 모든 지친 영혼들이 함께 가벼워지는, 삼색나물 같은 시를 지으며 계속 정진해 나갈 수 있길 응원합니다. 시인으로 살아가는 그녀의 삶의 모습이 살짝 엿보이는 시 하나를 더 읽으며 오늘 글을 맺습니다. - 석전(碩田)
문장을 먹는다
- 허향숙
꼭두새벽부터 식탁에 앉아 문장을 먹는다
어떤 문장은 국수처럼 후루룩 단숨에 들이켜고
어떤 문장은 오징어처럼 질겅질겅 곱씹고
또 어떤 문장은 질긴 갈빗살 뜯듯 물어뜯는다
어떤 문장은 비위에 거슬려 게워 내고
어떤 문장은 너무 맵거나 짜 눈살을 찌푸리고
또 어떤 문장은 더 깊이 발효시키기 위해 저장한다
음식처럼 양념을 많이 친 문장은
소화가 안 되고 머릿속도 더부룩해진다
삼색나물 같은 슴슴한 문장을 먹고 난 날은
내 영혼의 무게가 가벼워진다
- 시집 <그리움의 총량>(천년의 시작,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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