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옷감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내게 금빛 은빛으로 수놓아진
하늘의 옷감이 있다면
밤의 어두움과 낮의 밝음과 어스름한 빛으로 된
푸르고 희미하고 어두운 색의 옷감이 있다면
그 옷감을 그대 발밑에 깔아드리련만,
나는 가난하여 가진 것은 꿈 밖에 없으니
그대 발밑에 내 꿈을 깔아드리오니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그대가 밟는 것은 내 꿈이기에.
- 김억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광익서관, 1921)
The Cloth of Heaven
- William Butler Yeats
He wishes for the Cloths of Heaven
Had I the heavens' embroidered cloths,
Enwrought with golden and silver light,
The blue and the dim and the dark cloths
Of night and light and the half-light,
I would spread the cloths under your feet:
But I, being poor, have only my dreams;
I have spread my dreams under your feet;
Tread softly because you tread upon my dreams.
* 감상 : William Butler Yeats(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시인, 아일랜드 독립운동가, 극작가, 노벨문학상 수상자, 작가 출신 정치인 등 그를 소개하는 직함은 다양하지만, 20세기 영문학과 아일랜드 문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데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1865년 6월 더블린 샌디마운트가에서 출생하여 1939년에 사망했습니다.
변호사이자 화가의 아들로 태어나 더블린 및 런던에서 화가가 되려고 공부하였으나 결국 시인이 된 예이츠. 그에게 모드 곤(Maud Gonne)이라는 여인은 평생 그가 그리워했던 마음속의 연인이면서 또 그의 작품 세계에서 끊임없는 에너지를 제공했던 존재이기도 합니다.
1889년 어느 날, 큰 키의 빼어난 미모를 지닌 한 여성이 당시 더블린에서 명망 있는 변호사로 개업하고 있던 예이츠의 아버지를 찾아왔습니다. 아일랜드 독립운동 지도자의 편지를 들고 협조를 요청하기 위해서 찾아온 여인이 모드 곤이었습니다. 그녀를 본 예이츠는 첫 눈에 반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후 청혼을 했지만 보기 좋게 거절당하고 말았습니다. 예이츠의 온 인생을 흔들어 놓았던 그녀에 대한 연정은 평생을 그로 하여금 그녀의 주위를 맴돌게 했습니다. 모드 곤은 시와 시인보다는 아일랜드의 독립을 더 사랑하여 예이츠의 사랑 고백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1903년 모드 곤이 아일랜드 독립을 위해서 투사로 활동하고 있던 존 맥브라이이드라는 청년과 결혼했을 때, 예이츠는 ‘잠시 눈도 보이지 않고 귀도 들리지 않았다’고 고백할 정도로 넋이 나가버렸습니다.
1916년, 영국의 식민 지배에 저항하여 부활절 대 봉기가 일어났고 그 봉기는 이내 진압되면서 당시 봉기의 주동자로 체포된 모드 곤의 남편 존 맥브라이드는 교수형으로 죽게 됩니다. 이에 예이츠는 다시 모드 곤에게 청혼을 했지만, 그녀는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예이츠의 부인’으로 사는 것보다는 ‘투사의 미망인’으로 사는 것이 더 좋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 얼마 후, 예이츠는 결혼을 하지만 죽을 때까지 모드 곤을 잊지 못했습니다. 그가 쓴 작품들에서 이런 연정의 마음이 곳곳에 스며있는 것을 읽을 수 있으며, 예이츠의 작품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힌트’임에 틀림없습니다.
예이츠와 모드 곤, 이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연정의 관계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훗날 예이츠는 아일랜드인으로 최초의 노벨 문학상(1923년)을, 그리고 모드 곤의 아들인 숀 맥브라이드는 아일랜드의 평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 받아 1974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오늘 뜬금없이 예이츠의 이 시를 소개하는 것은 엊그제 월요일 저녁, 예정되었던 생명의 전화 소그룹 모임이 취소되면서 아내가 ‘영화 한 편을 봤는데 그 영화 속의 주인공이 꼭 당신같더라’는 말 한 마디에, 예정에도 없이 갑자기 감상했던 영화 속에서 만난 시이기도 하고 또 가을이 깊어가는 즈음에 감상하기에는 최고의 시가 될 듯해서입니다.
먼저 오늘 감상하는 이 시에 대해서 간략하게 한 마디를 해야 할 듯합니다. 이 시는 우리 한국 사람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김소월의 ‘진달래꽃’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던 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진달래꽃이 발표되기 한 해 전, 소월의 스승이었던 김억이 우리나라 최초로 외국시 번역 시집을 하나 냈는데, 그 시집에 바로 이 시가 멋지게 번역되어 수록되었고, 그 시어들을 소월이 그대로 차용하여 썼다는 사실입니다.
이제부턴 영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뉴욕에 사는 가난한 무명 작가 헬레인 한프(영화에서는 앤 밴트로프트 역)가 쓴 베스트셀러, 원제 <84 CHARING CROSS ROAD>는 편지 글들을 모아 놓은 책입니다. 이 책이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우리나라에 소개될 때 뜬금없이 제목을 ‘84번가의 연인’으로 번역하는 바람에 마치 이 영화가 연인들 간의 플라토닉 한 연애를 다룬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었지만, 그보다는 문학을 사랑하고 또 글 쓰기, 책 읽기의 묘미를 아는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그려낸 이야기입니다.
1949년 10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헬레인 한프는 영국 런던의 채링 크로스街 84번지에 있는 마크스 중고서점에 자신이 찾고 있는 ‘권 당 5달러가 넘지 않는 저렴한 중고책’ 리스트와 함께 주문을 하는 편지를 보냅니다. 그 편지를 받은 마크스 서점의 관리인인 프랭크 도엘(영화에서는 앤소니 홉킨스 역)은 리스트에 적힌 책 일부와 답장을 보냈고 이같은 편지 교환은 그 후 20여 년 동안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이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서점의 다른 직원 다섯 명도 자연스럽게 그녀와 편지를 주고 받게 됩니다. 헬레인 한프는 마크스 서점의 모든 직원들과 펜팔이 되지만 프랭크 도엘이 세상을 뜨고 마크스 서점이 문을 닫을 때까지 이런 저런 이유로 단 한번도 그렇게 가고 싶었던 영국 런던을 방문하지는 못했습니다.
아내가 ‘당신 닮은 면이 있다’고 한 말이 생각이 나서, 영화를 다 본 후에 뭐가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느냐고 물었더니, 같이 사는 아내와 아무런 문제는 없었지만 중년인 남편 프랭크 도엘이 ‘알지 못하는 낯선 여자’인 헬레인 한프와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자신의 내면세계를 소통할 때 그 곁에서 느끼는 아내의 기분에 공감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그 느낌을 물어보고 싶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도엘의 아내는 묵묵히 아무것도 모르는 척 평범한 일상의 삶을 꾸려갔지만 그 모든 것을 알고 소외감을 느끼고 있었음을 프랭크 도엘이 갑자기 죽은 후, 그녀가 직접 헬레인 한프에게 편지로 말하는 대목에서 밝혀집니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너무도 행복해하였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헬레인 한프에게 그동안 고마웠다는 말도 아끼지 않았지요. 항상 예의 바르고 정중하며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영국 신사 도엘이 나를 닮은 것 같다는 말에는 기분이 좋았지만, 아내와는 내면의 소통이 아니라 그저 일상의 소통만 하고 낯선 여자와는 진정한 소통을 하고 있다는 말로 들리기도 해서 미안한 마음도 없지 않았습니다.
영화 속에서 오늘 감상하는 예이츠의 시는 런던을 방문하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생활에서 닥치는 여러 사정들 때문에 결국은 직접 가서 만나지 못하는 아쉬운 마음을, 가난한 헬레인 한프가 도엘을 포함한 마크스 서점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표현할 때 인용되었습니다. 그것도 그들이 하나 둘 회사를 떠나거나 또 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 말입니다. ‘나는 가난하여 가진 것은 (런던을 방문하고 싶은 희망)꿈 밖에 없으니 / 그대 발밑에 내 꿈을 깔아드리오니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 그대가 밟는 것은 내 꿈이기에.’ 영화는 20여 년이 지난 후, 드디어 84번가에 도착한 헬레인 한프가 아무 것도 없이 텅 비어 있는 마크스 서점이 있었던 공간을 둘러보며 지난날을 회상하는 장면으로 시작되고, 또 끝마무리도 바로 그 장면이 이어지면서 페이드아웃 됩니다.
뜻하지 않게 수작의 영화 한 편을 감상하면서 영문학사에서 길이길이 기억될만한 예이츠의 시까지 만나게 되었으니 행복한 가을입니다. 잔잔한 마음의 여유, 그리고 책을 사랑하고 또 문학을 이야기 할 최소한의 시간이 있다면, 이 가을에 영화 ‘84번가의 연인’을 한번 만나보시길 조심스럽게 추천해 봅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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