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청
- 정현종
불행의 대부분은
경청할 줄 몰라서 그렇게 되는 듯.
비극의 대부분은
경청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는 듯.
아, 오늘날처럼
경청이 필요한 때는 없는 듯.
대통령이든 신(神)이든
어른이든 애이든
아저씨든 아줌마든
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내 안팎의 소리를 경청할 줄 알면
세상이 조금은 좋아질 듯.
모든 귀가 막혀 있어
우리의 행성은 캄캄하고
기가 막혀
죽어가고 있는 듯.
그게 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제 이를 닦는 소리라고 하더라도,
그걸 경청할 때
지평선과 우주를 관통하는
한 고요 속에
세계는 행여나
한 송이 꽃 필 듯.
- 시집 <견딜 수 없네>(시와시학사, 2003.10)
- 2004년 제12회 공초문학상 수상작
* 감상 : 정현종 시인.
1939년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대광고와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했는데, 대학 재학 중 대학신문인 <연세춘추>에 발표한 시가 당시 연세대 국문과 박두진 교수의 눈에 띄어 1965년 <현대문학>에 시 '독무'와 ‘여름과 겨울의 노래’ 등으로 추천을 완료하고 등단했습니다. 한국 문학작가상, 연암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산문학상, 대산문학상, 미당문학상, 경암학술상(예술)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1965년부터 1977년까지 서울신문과 중앙일보 기자로 일했으며 1977년 퇴직 후,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시 창작 강의를 했습니다. 1982년부터는 연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2005년 정년퇴임했습니다.
그의 시는 TV 드라마나 영화 등에서 가끔씩 소개되었기 때문에 이 시인의 시라는 건 몰랐지만 아마도 한번 쯤 들어봤을 것입니다. 대표적인 그런 시로, 딱 두 줄로 된 ‘섬’이라는 제목의 그의 시는 이러합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또, 광화문 교보문고 빌딩에 계절마다 걸렸던 현수막 좋은 글귀에 이 시인의 <방문객> 시어가 설문조사에서 사람들이 좋아 했던 역대 글 2위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그의 시집과 산문집, 그리고 등단 50년 동안 쓴 시들을 묶어 놓은 시선집 등은 일일이 다 쓰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습니다. 시집으로 <사물의 꿈>(민음사, 1972), <나는 별 아저씨>(문학과지성사, 1978),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문학과지성사, 1984),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세계사, 1989), <한 꽃송이>(문학과지성사, 1992), <세상의 나무들>(문학과지성사, 1995), <갈증이며 샘물인>(문학과지성사, 1999), <견딜 수 없네>(시와시학사, 2003), <광휘의 속삭임>(문학과지성사, 2008), <그림자에 불타다>(문학과지성사, 2015) 등이 있는데, 오늘 감상하는 시는 시집 <견딜 수 없네>에 수록된 시로, 2004년 제12회 공초문학상 수상작으로 뽑힌 시입니다.
당시 이 시를 공초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을 했던 심사위원인 이근배, 김종해, 임헌영 시인이 공동명의로 쓴 심사평을 읽으면 이 시를 감상하는데 다른 글이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前略) ‘경청’은 이 시대의 갖가지 소음을 진공흡입기로 빨아들이는 신기한 힘을 지니고 있다. 통신 수단이 첨단화되고 커뮤니케이션이 활발해지고 있음에 비해 사람들의 귀는 점점 절벽이 되고 눈도 어두워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불행의 대부분은 / 경청할 줄 몰라서 그렇게 되는 듯’의 말문부터가 매우 직설적이면서 심상치 않은 경구를 담고 있다.
‘대통령이든 신(神)이든 / 어른이든 애이든 / 아저씨든 아줌마든 / 무슨 소리이든 간에 / 내 안팎의 소리를 경청할 줄 알면 / 세상이 조금은 좋아질 듯’은 아주 귀에 익은 듯하면서도 새삼 아프게 우리의 폐부를 찌른다. 특히 ‘내 안팎의 소리’에 귀를 귀울이게 된다. 밖의 소리를 받아들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내 안의 소리를 듣는 것은 더욱 어렵다.
얼핏 보면 쉬워 보이는 ‘경청’의 세계는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현종만이 뽑아낼 수 있는 수월경화(水月鏡花)가 숨어있다. 즉 ‘지평선과 우주를 관통하는 / 한 고요 속에 / 세계는 행여나 / 한 송이 꽃 필 듯’에 부딪치면 아하 저 공초선생의 무위이화(無爲而化)의 시법을 얻었구나 하는 울림을 받는다. 공초문학상의 빛을 더해 준 정현종 시인께 경의를 보낸다.]
세계 제 2차 대전은 잘 알다시피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 그리고 독일과 소련의 전쟁, 즉 <독소전쟁>으로 확대되면서 인류에게 엄청난 참극을 불러 온 세기의 전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큰 전쟁이 지도자가 ‘경청’만 잘 했어도 막을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고 합니다.
1941년부터 독일의 히틀러는 호시탐탐 소련을 침략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고 그 징후는 서방 세계와 곳곳에 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영국에서는 독일 측 암호를 해독해 내서 윈스턴 처칠 당시 영국 총리가 스탈린에게 직접 경고하기도 했고, 1941년 봄에만 180건이 넘는 독일 항공기의 소련 영공 침범 사례도 있었으며, 일본 제국에 상주하던 전설적인 간첩 리하르트 조르게가 구체적인 수치까지 들어가며 소련에 독일의 침공이 곧 개시될 것을 알렸지만, 스탈린과 소련 방첩국, 정보국은 경청하지 않고 그 모든 첩보와 정보들을 무시했습니다. 소련과 독일은 불가침조약에 서명을 한 돈독한 우방이었다는 것을 스탈린은 대내외에 과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독일의 한 인쇄업자가 독일군에 납품한 숙어집을 소련 영사관에 보냈는데 여기에는 ‘항복하라’, ‘손들어’, ‘집단농장 의장이 어디 있나’, ‘공산주의자냐?’, ‘발포한다’ 등의 러시아어 번역문이 실려 있었다는 것을 알렸는데도 전혀 경청하지 않았습니다.
그 해 6월 16일, 베를린에 파견된 소련 측 간첩들도 독일의 공격이 임박했음을 지속해서 알리고, 심지어 작전 개시 하루 전인 6월 21일 독일군 탈영 병사였던 알프레트 리스코프(Alfred Liskov)는 독일군 내 숨어 있던 공산주의자였는데, 그가 ‘독일이 내일 공격할 것이다’라고 털어놓았지만 스탈린은 오히려 이 독일군 탈영병을 역정보 제공 혐의로 사형시키라는 명령을 내린 기록이 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영공을 침범하는 독일 항공기에 대해서는 공격하지 말고 특별한 지시가 있기 전까지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말라고 강력한 명령까지 시달했습니다. 시에서 시인이 표현한 것처럼, ‘모든 귀가 막혀 있어 / 우리의 행성은 캄캄하고 / 기가 막혀’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전쟁 초기, 소련 공군은 독일군의 공습이 임박했음에도 손 놓고 있다가 항공기들은 이륙조차 해 보지 못한 채 대거 궤멸되는 참극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불행과 비극의 대부분은 경청할 줄 몰라서,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경청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인간주의 상담이론으로 유명한 칼 로저스(Carl Rogers)의 이론을 요약하면 바로 ‘경청과 공감’, 그리고 ‘무조건적인 긍정적인 배려’임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심각한 문제가 있는 내담자라 할지라도 그의 말과 마음에 귀 기울이고 경청하고 또 공감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치유가 일어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고, 그 이후 반세기 동안 상담 현장에서 그 이론의 효과가 실제로 드러나고 있음을 우리는 확실히 경험하고 있는 증인들입니다.
시나브로 가을이 깊어 가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제 이를 닦는 소리라고 하더라도,/ 그걸 경청할 때 / 지평선과 우주를 관통하는/ 한 고요 속에/ 세계는 행여나/ 한 송이 꽃 필 듯’이라고 우리 모두가 경청하는 사람이 되길 간절히 소망했던 시인의 ‘바로 그 마음’으로 이 좋은 계절, 온 통 만발하는 가을 국화꽃이 피는 소리에도 귀 기울여 볼 일입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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