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이 좋다
- 신진
①처가에서 쌀 한 가마 보내 왔을 때
②산골짝에서 도다리 회를 먹을 때
③술병 마개 딸 때
④벼랑 위에서 혼자 오줌을 눌 때
⑤귤껍질을 벗길 때
⑥까무러친 여자에게 화장지를 줄 때
⑦우리나라 챔피언이 조빠지게 맞고 비길 때
⑧남이 보는 거울의 남을 엿볼 때
⑨방안에 누워서 데모소리 들을 때
⑩이 시대의 학자와 이 땅의 언론인이 시국토론 하는 것을 볼 때
⑪아이들이 TV보고 웃는 것을 볼 때
⑫밥 사먹고 나오다 껌을 얻을 때
- 시집 <江>(시와시학사, 1994)
* 감상 : 신진 시인, 문학평론가.
1949년 5월 21일 부산에서 태어났습니다. 동아대학교와 성균관대학교 대학원(문학박사)을 졸업했으며 1981년부터 동아대학교 국어국문학과(한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학보사 주간, 인문대학장 등을 역임하였고 2016년 2월 정년퇴임 후 현재는 명예교수로 있습니다. 1976년 <시문학>에 ‘유혹’(1974)과 ‘장미원’(1976)이 이원섭, 김남조 시인의 추천으로 추천 완료되었고, 1984년 <세계의 문학> 가을호에 시 12편이 추천되면서 문단에 등단하였습니다. 시집으로는 <장난감 마을의 연가>(아성출판사, 1978), <목적있는 풍경>(태화출판사, 1981), <멀리뛰기>(민음사, 1986), <江>(시와시학사, 1994), <녹색엽서>(시문학사, 2002), <귀가>(신생, 2005), <풍경에서 순간으로>, <미련>(시산맥사, 2014), <석기시대>(해피북미디어, 2017) 등이 있습니다. 풍자적인 남성적 어조로 현실과 신화를 연계시키며 건강한 생명성을 탐구하는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오늘 감상하는 이 시도 다분히 남성의 시각으로 바라 본 ‘기분 좋은 것들의 목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것도 시라고 발표할 수 있나 하는 게 이 시를 접한 사람들의 반응일 듯합니다. 그저 메모장에 번호를 매기면서 ‘내가 기분 좋을 때’가 언제인지 아무렇지도 않게 써내려간 듯 한 시입니다. 어쩌면 여기에서 시적 은유는 무엇인지 찾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라고 시인이 뒤통수를 툭 치고 난 후에, ‘시를 읽고 어쭙잖게 시적인 요소를 찾는 바보 뒤통수를 갈길 때’라고 ⑬번을 추가할 것 같은 느낌도 듭니다. 그런데 이 시는 늘 현대문명을 비판하고 인간성 회복을 꿈꿨던 그의 초기 시 특징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분 좋은 순간’이야 개인 취향이 다 다르기에 시인이 친절하게 번호를 붙여 써내려 간 목록을 읽으면서 공감을 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것에도 기분이 좋다고 느낄 수도 있구나’하면서 고개가 갸우뚱 해지는 것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귤껍질을 벗길 때’라든지 ‘남이 보는 거울의 남을 엿볼 때’ ‘이 시대의 학자와 이 땅의 언론인이 시국토론 하는 것을 볼 때’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그가 기분이 좋다고 느끼는 것들은 그저 시인의 삶 속에서 사소하게 경험하는 것들 중에서, 그 순간 기분이 좋아지는 것들을 물 흘러가듯이 나열한 것임을 금방 눈치 챌 수 있습니다.
굳이 이 시에서 ‘시적 은유’를 찾아보자면, 평범한 일상에 이끌려 좀팽이처럼 그럭저럭 만족하며 살아가는 소시민적 삶, 상투화된 삶에 대한 야유가 담겨져 있는 내용이지만 그 정반대의 뜻이 내포 된 역설적인 제목을 붙인 것일 것입니다. 시인 자신을 포함해서 현대인들이 기분 좋다고 느끼는 것들이 ‘처가에서 쌀 한 가마 보내 왔을 때 / 산골짝에서 도다리 회를 먹을 때 /술병 마개 딸 때 / 벼랑 위에서 혼자 오줌을 눌 때 / 우리나라 챔피언이 조빠지게 맞고 비길 때 / 밥 사먹고 나오다 껌을 얻을 때’와같이 세속화되고 소모적인 것에서밖에 찾을 수 없다는 것이 현대인의 비애이고 시인의 슬픔이며 또 우리 모두가 진솔하게 자기 성찰을 해야 하는 상황임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한편으론 이런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시인은, 세상 사 돌아보면 하나도 기분 좋을 일 없고 또 짜증나는 일만 가득하지만 이 거대한 물결에 휩쓸려 그냥 떠내려가지 말자고 역설적으로 목청을 높이면서 희화적으로 ‘기분이 좋은 목록’들을 열거하면서, 인간성을 회복하는 깨어 있는 삶을 촉구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지난 2014년 4월, 시인은 34년 동안 가르친 대학을 정년퇴직하기 1년을 앞두고 시집 한 권을 냈습니다. 젊은 시절 혈기왕성하게 날카로운 비판과 야유를 서슴지 않았던 모습에서 탈피하여, 이제는 진중하게 삶을 들여다보는 여유가 넘치는 시들을 선보인 그의 시집에 실린 재미나는 시 한 편을 더 감상하면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시인의 말대로 ‘시가 길어지는 이유는 자기 말을 주체하지 못하고 진짜 할 말이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듯이 시집에는 짧은 시들이 여러 편 실려 있는데, 그 중에서 삶의 경륜이 녹아 있어 진국 맛을 느낄 수 있는 시 한 편을 골라봤습니다. - 석전(碩田)
아내와의 여행
- 신진
서로 편히 지내자고 각방 쓴 지 여러 해
잠든 아내의 얼굴
여행길 관광버스에서 모처럼 본다
─ 남자 다 되었구나
눈자위며 목선에서 반짝거리던
앳된 티 사라졌다
턱을 떨어뜨린 채 잠든 모습
죽은 장인어른이다
나더러 여자 됐다 핀잔하더니
헤 벌린 턱선
너에게는 남자 근육이 생겼구나
좀 더 시간 흐르면
이승의 남자 여자 계급장 떼고
햇볕에 몸을 빛내며 돌아다니는
같은 꼴 먼지나 될까?
이승에선 발목이 가렵다고
만날 긁어대던 작은 먼지
- 시집, <미련>(시산맥사, 2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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