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밤 미시령 - 고형렬 / 나무 - 이성선

석전碩田,제임스 2021. 11. 10. 06:14

밤 미시령

-고형렬

저만큼 11시 불빛이 저만큼
보이는 용대리 굽은 길가에 차를 세워
도어를 열고 나와 서서 달을 보다가
물소리 듣는다
다시 차를 타고 이 밤 딸그락,
100원짜리 동전을 넣고 전화를 걸듯
시동을 걸고
천천히 미시령으로 향하는
밤 11시 내 몸의 불빛 두 줄기, 휘어지며
모든 차들 앞서 가게 하고
미시령에 올라서서
음, 기척을 내보지만
두려워하는 천불동 달처럼 복받친 마음
우리 무슨 특별한 약속은 없었지만
잠드는 속초 불빛을 보니
그는 가고 없구나
시의 행간은 얼마나 성성하게 가야 하는지
생수 한통 다 마시고
허전하단 말도 저 허공에 주지 않을뿐더러
-그 사람 다시 생각지 않으리
-그 사람 미워 다시 오지 않으리

- 시집, <밤 미시령>(창비, 2006)

* 감상 : 고형렬 시인.

1954년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났으며, 시인의 말을 빌면 소년 시절 스스로 가출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해남 할머니 집에 보내졌다가 5학년 때 다시 강원도 고성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 무렵 어린 고형렬은 <장자>를 읽다가 거기 나오는 문자들을 카드에 써서 늘 들고 다녔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어느 날엔, 바닷가에 홀로 서서 “유애(有涯)”란 글씨를 한 번 보고 먼 바다를 응시하다가 다시 또 “유애”를 들여다보곤 했었는데, 돌연 아버지가 나타나 물었다고 합니다. “그건 뭐냐?” 안 보이려고 애를 쓰다가 결국은 아버지에게 카드를 보이고 나서, 그는 한동안 부끄러워 아버지를 피해 다녔다고 합니다. 속초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이렇게 어릴 적부터 접한 장자는 어린 소년의 내면을 탄탄하게 키워냈나 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그 해 1974년, 지방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강원도 고성, 대진 등지에서 8년 동안 어업 담당 면서기로 일을 했습니다.

1979년 <현대문학>에 '장자' ‘대청봉 수박밭’ 등의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와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시인이 이십대 중반이 되던 해였습니다. 시인이 되기 위해서 추천을 받은 시가 ‘장자’였다는 사실이 범상치 않습니다. 유년 시절부터 읽었던 장자와의 강렬한 만남, 그리고 첫 직장으로 일했던 곳이 분단 조국의 현실이 몸으로 느껴지는 산하였기 때문일까요. 금강산이 보이는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화진포)을 시작으로 군사 분계선이 맞닿아 있는 16개 부락을 직접 발로 걸으면서 그는 튼튼한 사유의 근력(筋力)을 키워 시의 세계에 뛰어든 것입니다.

시집 <대청봉 수박밭>(1985) 이후, <해청>(1987), <해가 떠올라 풀이슬을 두드리고>(1988), <서울은 안녕한가>(1991), <사진리 대설>(1993), <바닷가 한 아이에게>(1994), <성에꽃 눈부처>(창작과비평, 1998), <김포 운호가든집에서>(2001), <밤 미시령>(창비, 2006),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창비, 2013), <유리체를 통과하다>(실천문학사, 2012), <지구를 이승이라 불러줄까>(문학동네, 2013),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거울이다>(창비, 2015), <오래된 것들을 생각할 때에는>(창비, 2020) 등의 시집과 장시집 <붕새>, <리틀보이>(최측의농간, 1995)가 있습니다. 이밖에도 에세이집, 산문집, 자전 에세이, 동시집 등 다양한 책들을 펴냈습니다.

늘 감상하는 시는 작고한 동향의 시인, 이성선(1941년 1월 ~ 2001년 5월) 시인을 향한 추모의 정을 절절히 노래한 시인데, 2006년에 발행된 자신의 시집 <밤 미시령> 표제 시이기도 합니다. 그의 부음을 듣고 차를 몰아 속초로 향하던 중 미시령 고개에서 고향 속초를 내려다보면서 쓴 시입니다. ‘우리 무슨 특별한 약속은 없었지만 / 잠드는 속초 불빛을 보니 /그는 가고 없구나 / 시의 행간은 얼마나 성성하게 가야 하는지 / 생수 한통 다 마시고 / 허전하단 말도 저 허공에 주지 않을뿐더러 / -그 사람 다시 생각지 않으리 / -그 사람 미워 다시 오지 않으리’

향이라고 하지만 열 세 살이나 많은 시인을 친구 보내듯이 애틋하게 추모하는 시가 이 깊어 가는 가을날에 새롭게 다가옵니다.

제 그가 가고 없는 시간도 어언 20년이 흘러, 2021년 올해가 20주기가 되는 해였습니다. 지난달 22일, 설악문화예술포럼(회장 이상국 시인)은 ‘이성선 문학의 문학사적 조명’이라는 주제로 속초문화예술회관에서 심포지엄을 열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고형렬 시인은 ‘한국 시 형세에서 이성선은 동쪽에 우뚝 서 있다. 그의 시를 조용히 천천히 읽어 가면 무언가 슬프고 아름다운 것들이 치음과 순음 속에서 부딪힌다. 상처 입은 지난한 세월과 싸워 극복해 온 우리 시의 한 모서리가 보인다’라며 그의 ㅡ시 세계를 재조명하며 여전히 아름다운 기억을 소환해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떠난 후 누군가 이렇듯 ‘복 받친 마음’으로 추모의 시를 바칠 정도라면 이성선 시인은 행복한 시인임에 틀림없습니다.

쯤에서 고형렬 시인이 그렇게도 추모했던 이성선 시인의 시 한 편을 함께 감상했으면 좋겠습니다.

나무

- 이성선

나무는 몰랐다
자신이 나무인 줄을
더욱 자기가
하늘의 우주의
아름다운 악기라는 것을
그러나 늦은 가을날
잎이 다 떨어지고
알몸으로 남은 어느 날
그는 보았다.
고인 빗물에 비치는
제 모습을.
떨고 있는 사람 하나
가지가 모두 현이 되어
온종일 그렇게 조용히
하늘 아래
울고 있는 자신을.

- 시집, <산시-이성선 시집>(시와, 2013)

든 잎을 떨구고 알몸으로 서 있는 늦가을 이맘때쯤의 나무를 보면서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깨닫게 되었다는 시입니다. 그동안 잎들이 가려온 푸름의 시간 속에서 나무는 스스로 나무인지, 우주의 악기인지도 모른 채 살아왔습니다. 깊이 자신의 내면을 돌아볼 여유도 없이 달려 온 나무가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참 존재를 깨닫는 순간, 스스로 ‘가지가 모두 현이 되어/ 온 종일 그렇게 조용히 / 하늘 아래 / 울고 있는 자신’, 하늘의 우주의 아름다운 악기가 되어 울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고 노래하는 시어들이 아련하고 처연하기까지 합니다.

밤에 멀리 제주도의 산간에는 폭설이 내렸다는 뜻밖의 뉴스가 전해졌습니다. 어느 시인이 말했듯이 11월은 한 해의 끄트머리로 가기 위해서 이것저것을 준비해야 하는 ‘의붓자식’ 같은 달이기도 한데 올해 11월은 유난히도 자신의 존재를 자꾸 드러내려고 하는 듯합니다. 아마도 그동안 코로나 때문에 꽁꽁 묶여있다가 해방을 맞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12월이 오기 전 '위드 코로나', 즉 '단계적 일상 회복'을 축하하기 위해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옛 친구를 불러 내 뜨끈한 오뎅국물 마시며 정담 나누는 시간을 한번 만들어봐야겠습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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