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십일월 - 이재무

석전碩田,제임스 2021. 11. 17. 06:16

십일월

-이재무
 
십일월은 의붓자식 같은 달이다.
시월과 십이월 사이에 엉거주춤 껴서
심란하고 어수선한 달이다
난방도 안 들어오고
선뜻 내복 입기도 애매해서
일 년 중 가장 추운 달이다
더러 가다 행사가 있기는 하지만
메인은 시월이나 십이월에 다 빼앗기고
그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허드레 행사나 치르게 되는 달이다
괄호 같은 부록 같은 본문의 각주 같은
산과 강에 깊게 쇄골이 드러나는 달이다
저녁 땅거미 혹은 어스름과 잘 어울리는
십일월을 내 영혼의 별실로 삼으리라

- 시집, <슬픔은 어깨로 운다>(천년의시작, 2017)

* 감상 : 이재무 시인.

1958년 충남 부여에서 출생했습니다. 한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동국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했고 1983년 <삶의문학>, <실천문학>, <문학과사회> 등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시집으로 <섣달 그믐>(청사, 1987), <온다던 사람 오지 않고>(문학과지성사, 1990), <벌초>(실천문학사, 1992), <몸에 피는 꽃>(창작과비평, 1996), <시간의 그물>(문학동네, 1997), <위대한 식사>(세계사, 2002), <푸른 고집>(천년의시작, 2004), <저녁 6시>(창작과 비평사, 2007), <누군가 나를 울고 있다면>(화남, 2007), <경쾌한 유랑>(문학과지성사, 2011), <주름 속의 나를 다린다>(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3),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실천문학사, 2014), <슬픔은 어깨로 운다>(천년의시작, 2017), <데스벨리에서 죽다>(천년의시작, 2020). 그리고 산문집으로 <생의 변방에서>(화남, 2003),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밥>(화남, 2010). <집착으로부터의 도피>(천년의시작, 2016), <쉼표처럼 살고 싶다>(천년의시작, 2019), 공저 <우리시대의 시인 신경림을 찾아서>(웅진닷컴, 2002), <긍정적인 밥>(화남, 2004). 시평 집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핀다면>(화남, 2005)이 있습니다. 제2회 난고문학상(2002), 편운문학상(우수상, 2005), 제1회 윤동주시상(2006), 소월시문학상(대상, 2012), <풀꽃문학상>(2015), <송수권시문학상>(2017), <유심작품상>(2019), <이육사문학상>(2020) 등을 수상하였고, 현재 서울디지털대학교에서 시 창작 강의를 하고 있으며 <천년의시작> 대표 이사입니다.

11월에 읽을 시를 찾고 있었는데 마침 이 시를 보내 주신 어느 지인 분의 소개로 알게 된 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시와 똑 같은 제목으로 다른 내용의 시가 동시에 검색이 되어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몇 주 전,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랑’을 주제로 한 아침 묵상 글을 쓰면서 인용했던 시가 ‘사랑하다 죽어버려라’라는 제목의 시였는데, 이 시가 인터넷에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정호승 시인의 시가 아니라는 것이 확인되어 적잖이 놀란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연은 이렇습니다. 로마서 8장 15절 ‘우리가 다시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말씀을 읽은 후, 이 세상에 범람하는 수많은 사랑이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의 값 싼 사랑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다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내어 준 대속의 사랑’이었으며 그것이 근거가 되어 우리는 아빠 아버지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묵상 글을 썼는데, 이 때 정호승 시인의 시라고 알려진 ‘사랑하다 죽어 버려라’는 제목의 시를 인용했습니다. 그런데, 그 묵상 글을 블로그에 탑재 하고 난 후 채 하루도 지나기 전에, 정호승 시인이 직접 그 글에 댓글을 달아주셨습니다. 자기가 낸 시집의 제목으로 그런 제목이 있지만 그런 시를 쓴 적도 없을 뿐 아니라 자기 이름으로 된 그런 시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잘못된 내용을 빨리 수정해 달라는 정중한 요청을 해 왔던 것입니다. 인터넷에는 사실처럼 떠도는 내용들이 의외로 사실이 아니거나 부정확한 내용들이 참 많다는 말은 들었지만, 멋진 시를 유명한 시인이 쓴 것처럼 둔갑시켜 엉뚱하게 퍼뜨리는 경우는 첨이라 참으로 놀랍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계기로 글을 쓸 때 더 철저하게 사실을 확인하고 또 정확한 글을 써야한다는 다짐을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인이 쓴 시 중에서 ‘십일월’이라는 동일한 제목으로 비슷한 내용의 시 두 개가 검색이 되었으니, 확인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였고 그러다 보니 11월도 거의 다 지난 오늘에서야 이 시를 소개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확인한 결과 오늘 감상하는 시와 함께 검색이 된 아래의 시도 모두 이재무 시인이 쓴 시가 맞습니다.

십일월

- 이재무

십일월을 사랑하리
곡물이 떠난 전답과 배추가 떠난 텃밭과
과일이 떠난 과수원은 불쑥 불쑥 늙어가리
산은 쇄골을 드러내고 강물은 여위어 가리
마당가 지푸라기가 얼고 새벽 들판 살얼음에
별이 반짝이고 문득 추억처럼
첫눈이 찾아와 눈시울을 적시리
죄가 투명하게 비치고
영혼이 맑아지는 십일월을 나는 사랑하리

선, 시인은 십일월을 ‘의붓자식’같다는 말을 먼저 꺼낸 후, 의붓자식이 느낄만한 상황으로 ‘가운데 껴서 엉거주춤 심란한’ 상황에서부터 선뜻 내복 입기에도 ‘애매’한 상황, 또 행사들도 앞 뒤 달에 다 빼앗기고 그저 그만인 ‘허드레’ 행사만 있는 달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엉거주춤’ ‘애매’ ‘허드레’라는 시어들이 ‘일 년 중 가장 추운달이다’는 한 문장과 서로 관통하면서 의붓자식이 느끼는 마음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저 그런 십일월을 노래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비록 ‘괄호 같은 부록 같은 본문의 각주 같은 / 산과 강에 깊게 쇄골이 드러나는 달’이 십일월이지만 ‘저녁 땅거미 혹은 어스름과 잘 어울리는 / 십일월을 내 영혼의 별실로 삼으리라’라면서, 이 땅의 '의붓자식'들의 친구가 되어주고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간적 심리적 공간' 같은 11월을 ‘영혼의 별실’로 삼으리라 다짐하면서 시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같은 제목의 그의 다른 시에서, 시인은 왜 그토록 11월을 영혼의 별실로 삼으리라 노래했는지 그 11월의 시적 이미지를 ‘사랑의 다짐’으로 승화시키며 더 확장해 가고 있습니다.

인들이 11월을 표현한 시어들은 대체로 비슷비슷한 듯합니다. 누구보다도 11월을 좋아했다는 나태주 시인은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고/ 버리기에는 차마 아까운 시간입니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또 한국의 대표적인 농민 시인으로 알려 진 고재종 시인은 ‘십일월’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강변의 늙은 황소가 서산 봉우리 쪽으로 주둥이를 쳐들며 굵은 바리톤으로 운다 / 밀감빛 깔린 그 서쪽으로 한 무리의 고니가 날아 / 봉우리를 느린 사박자로 넘는다 / 그리고는 문득 텅 비어 버리는 적막 속에 나 한동안 서 있곤 하던 늦가을 저녁이 있다/ 소소소 이는 소슬바람이 갈대숲에서 / 기어 나와 마음의 등불 하나 하나를 닦아내는 것도 그 때다’라고 쓸쓸하고 적막한 늦가을의 11월을 노래했지요. 서정춘 시인은 ‘단풍! 좋지만 // 내 몸의 잎사귀 / 귀때기 얇아지는 / 11월은 불안하다// 어디서// 죽은 풀무치 소리를 내면서 / 프로판가스가 자꾸만 새고 있을 11월’이라고 불안한 감정을 여실히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별한 기념일도 없고 또 본격적인 겨울이 찾아오기 전의 엉거주춤한 때이지만, 지금까지 해 온 일을 무던히 계속해야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는 11월도 벌써 가운데입니다. 큰 행사도 앞 뒤 달에 다 빼앗겼다고 시인은 노래했지만, 저는 11월 마지막 주간인 다음 주에 제주도에서 큰 행사 하나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단계적 일상회복’이라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응원해주는 바람에 그동안 행사 준비를 잘 마치고 지금은 ‘진인사대천명’의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만의 하나 엉뚱한 변수라도 생기면 어떡하나 ‘죽은 풀무치 소리를 내면서 / 프로판가스가 자꾸만 새는 것 같은’ 불안이 몰려오는 건 행사를 주관하는 책임자의 마음이겠지요?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