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멀미
- 이정록
삶이라는 열차를 타고
먼 길 가다보면
때론 멀미가 나지.
나만 입석인가?
반대 방향으로 가는 거 아냐?
갈수록 짐은 무거워지고
구두 속 발가락은 이상한 짐승으로 자라지.
함께 떠나온 사람도 뿔뿔이 흩어지고
낯선 말소리에 외롭기도 하지.
굴속처럼 깜깜하기도 하지.
하지만, 이것만은 마음에 새기자.
너를 이정표로 삼고 여행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네가 다른 지도를 찾아 두리번거린다면
차멀미가 사람멀미로 바뀐다는 것을.
사람이 싫어지고, 싫어하면
이번 여행은 끝이란 것을.
- 시집, <동심언어사전>(문학동네, 2018)
* 감상 : 이정록 시인.
1964년 7월, 충남 홍성에서 출생하였으며 공주사범대학 한문교육과와 고려대학교 대학원 문학예술과를 수료했습니다. 1989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서 시 ‘농부일기’가 당선되었고, 1993년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 시 ‘혈거시대’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습니다. 시집으로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 문학동네, 1994>, <풋사과의 주름살>(문학과 지성사,1996>, <버드나무 껍질에 세 들고 싶다>(문학과 지성사, 1999>, <제비꽃 여인숙>(민음사, 2001>,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문학동네, 2004, 개정판>, <의자>(문학과 지성사, 2006>, <정말>(창비, 2010), <어머니 학교>(열림원, 2012),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것들의 목록>(창비, 2016), <동심언어사전>(문학동네, 2018), <아직 오지 않은 나에게>(사계절, 2020) 등이 있습니다. 장편동화로 <귀신골 송사리>, <십 원짜리 똥탑>, 그리고 청소년 시집 <까짓것>, 산문집 <시가 안 써지면 나는 시내버스를 탄다>(한겨레출판사, 2018) 등이 있습니다. 2001년에 김수영 문학상을, 2002년에는 김달진 문학상, 2006년에는 제26회 소월시문학상 우수상, 2017년에는 박재삼 문학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현재 고등학교 한문 교사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이정록 시인은 잊혀질만하면 한 번씩 제 블로그에서 소개했던 기억이 납니다. 2011년 1월에는 그의 시 ‘의자’를, 2019년 4월에는 ‘느슨해진다는 것’, 그리고 작년 3월에는 ‘물뿌리개 꼭지처럼’을 함께 감상했습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존 키팅 선생처럼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영감을 주는 스승이자 친구로 살아가는 그의 생각과 마음이 고스란이 전달되어져 오는 시를 읽다보면, 삶을 통달한 어느 수도자의 가르침을 듣는 것 같기도 하고 그림을 좋아하는 시인의 감성이 묻어 있는 한 폭의 수채화 그림을 보는 느낌도 듭니다.
오늘 감상하는 시를 읽으면서 문득 SNS에 많이 떠돌았던 ‘인생이라는 열차’라는 제목의 이모티 콘 글이 생각이 났습니다.
[열 살 때 탄 열차는 그저 호기심이 가득했습니다. 스무 살 때는 친구들과 함께하는 여행이라 무지개 열차였고, 서른 살 때는 행선지도 묻지 않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데이트 여행이었지요. 마흔 살 때는 어디 한번 가려면 아이, 부모 챙겨야 할 것들이 더 많은 해외여행 같았고, 쉰 살 때는 종착역이 얼마 남지 않아 기차표도 챙겨야 하고 내릴 때 잊지 말아야 할 물건을 챙겨야 하는 기차 여행이었습니다. 예순 살 때는 화려한 장소보다는 유서 깊은 유적지가 더 눈에 들어오는 고적 답사 같은 여행이었고, 일흔 살 때는 학벌 재력 외모 등 모든 게 평준화 된 어릴 적 동무들이 무조건 반가운 수학여행이었다]로 이어지는 글이 그것입니다.
시인도 ‘삶이라는 열차를 타고 / 먼 길을 가다보면 / 때론 멀미가 나지’로 운을 뗍니다. 젊은 시절에는 나만 입석인 것 같았고, 나만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 같아 삶 자체에 대한 의문도 많았음을 표시하기 위해서 물음표(?)를 두 번씩이나 분명하게 찍었습니다. 나 이외에는 모두 편안한 좌석에 앉아 가는 듯하고, 나만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 것 같이 느낄 때 방황 아닌 방황도 했습니다. 그것을 시인은 ‘멀미’라는 복선이 깔린 시어를 선택했습니다. 멀미의 대표적인 증상을 시인은 계속해서 이렇게 나열하고 있습니다.
‘갈수록 짐은 무거워지고 / 구두 속 발가락은 이상한 짐승으로 자라지./ 함께 떠나온 사람도 뿔뿔이 흩어지고 / 낯선 말소리에 외롭기도 하지. / 굴속처럼 깜깜하기도 하지.’
맞습니다. 처음 같이 여행을 출발했던 동료들이 하나 둘 하차를 하기도 하고, 또 너무 멀리 온 듯 들려오는 말투도 내가 늘 사용하던 정겨운 고향 말이 아니라 낯선 말소리로 가득차면서 마치 나 혼자 있는 외로움도 느끼게 됩니다. 가끔씩 캄캄한 터널을 지날 때면 깜깜하고 답답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의 반전은 바로 그 다음 문장에 있습니다. ‘너를 이정표로 삼고 여행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는 문장 말입니다. 만약에 나를 이정표 삼고 있는 사람이 내가 ‘다른 지도’를 가지고 헤매고 있는 것을 보게 되면, '차멀미'가 '사람멀미'로 바뀐다는 표현이 바로 이 시에서는 ‘시적 은유’가 되어 평범했던 문장들이 한 편의 시가 되어 둥실 떠오르게 만드는 마법을 부린다는 것입니다.
사람멀미가 날 정도로 ‘다른 지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친절한 설명도 덧붙여주고 난 후 시가 끝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사람이 싫어지고, 싫어하면 / 이번 여행은 끝이란 것을’ 명심하고, 다른 지도가 아닌 ‘사랑의 지도’, '희망의 지도'를 제대로 보면서, 나를 이정표 삼아 바라보고 달려오는 ‘아직 오지 않은 그 누군가에게’ 등대가 되어야 한다는 시인의 노래가 서늘한 책임감과 더불어 정겹게 다가옵니다.
한 해를 마무리 하는 12월, 종착역에 다다랐습니다. 혹시 내가 들고 있는 것이 '엉뚱한 미움과 증오의 지도'여서 내 주위의 사람들이 ‘사람멀리’를 겪고 있는 건 아닌지, 마지막 달 첫 날을 맞으며 한번 점검해 볼 일입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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