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안개는 힘이 세다 - 우대식

석전碩田,제임스 2021. 12. 15. 06:20

안개는 힘이 세다

- 우대식

안개 속에서,
사회주의 옹호자가 나온다
조금 있다가 자본주의자가 나온다
안개 속에는 많은 주의자들이 산다
안개 속에서
사회주의자인 체하는 자본주의자가 걸어 나온다
교회주의자인 체하는 완전 자본주의자가 걸어 나온다
안개가 걷히면 자본주의자만 남았다
그게 뭐 대수냐고 누군가 중얼댔다
나는 자본주의는 힘이 세냐고 물었다
자본주의자들은 슬그머니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눈이 쏟아지고 앞을 볼 수 없었다
눈도 자본으로 만들 수 있다고 안개 속에서 히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개는 고맙다

―시집 <베두인의 물방울>(여우난골, 2021)

* 감상 : 우대식 시인.

1965년 강원도 원주에서 출생하여 숭실대학교를 졸업하고 아주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하여 시집 <늙은 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다>(천년의 시작, 2003), <단검>(실천문학사, 2008), <설산 국경>(문예중앙, 2013), <베두인의 물방울>(여우난골, 2021) 등이 있으며, 요절시인들의 삶을 취재한 산문집 <죽은 시인들의 사회 –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천재 시인들의 시와 청춘>(새움, 2006), <시에 죽고, 시에 살다- 요절한 천재 시인들을 찾아서>(새움, 2014), <비극에 몸을 데인 시인들 – 요절한 천재 시인들을 찾아서>(새움, 2020) 등이 있습니다. 평택에 살면서 현재 숭실대 문예창작과 강사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준익 감독의 영화 <자산어보>를 감상하면서 아직도 긴 여운이 남는 대사 하나를 꼽으라면 ‘주자는 참 힘이 세구나’라는 정약전의 말입니다. 아마도 영화의 두 군데 장면에서 이 대사가 등장하는 것으로 기억을 합니다. 당시 모든 백성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던 고착된 규범인 성리학을 한탄하면서 약전이 내뱉듯이 한 말입니다. 성리학이 정확하게 뭔지도 모르면서 무조건적으로 그것을 신봉하고 지키려고 하는 당시의 사람들이나 사회를 향해 냉소적이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내뱉었던 대사였습니다.

늘 감상하는 시의 제목을 읽는 순간 그 영화 속의 ‘바로 그 대사’가 생각이 났습니다. 아마도 ‘힘이 세다’는 표현 때문일 것입니다. ‘나는 자본주의는 힘이 세냐고 물었다 / 자본주의자들은 슬그머니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는 두 줄 표현을 통해, 힘이 센 것을 찾고 있는 시인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힘이 센 것이란 끝까지 살아 남는 것임을 말하고 싶은 듯, 수많은 주의자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지만 여전히 자욱하게 사위를 덮고 있는 ‘안개는 고맙다’로 시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안개가 뭐가 그리도 고마울까 하는 호기심이 발동하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리가 사는 이 세상은 온통 안개 속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안개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자본주의자인 척, 사회주의자인 척 살고 있습니다. 시인은 ‘안개가 걷히면 자본주의자만 남았다’라고, 겉으로 드러나는 건 온통 자본주의자들뿐이라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사회주의자들은 안개 속에 숨어 있을 뿐입니다. 숨어 있던 사회주의자들이 드러나는 때는 ‘안개 속에서’일 뿐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자본주의는 힘이 세냐’고. 그랬더니 그제야 ‘자본주의자들은 슬그머니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고 말합니다. 결코 힘이 세지 않으면서 그동안 힘이 센 척 했을 뿐이라는 말인가요. 갑자기 눈이 쏟아지고 앞을 볼 수 없을 지경에 이르자, 이젠 사라졌던 자본주의자들이 그 어지러운 눈 속에서 나타나지도 않은 채 ‘눈도 자본으로 만들 수 있다'고 히덕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눈조차도 자본으로 만들 수 있다는 그들의 말이 섬뜩하기까지 해서, 안개라도 끝까지 남아 있으니 고맙다는 말이 시적 화자의 안도의 한숨같아 묘하게 공감됩니다.

리는 지금 모호한 세상에서 모호하게 ‘~인척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어쩌면 내 자신이 그렇게 척하면서 사는 존재라는 사실을 나 스스로도 눈치재지 못하게 온통 자욱한 안개가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이쯤에서 ‘안개 속에서’ 결국 이 세상에 나 홀로 외로이 살아가는 존재임을 노래한 헤르만 헷세의 시를 떠 올리는 건 사치인가요?

안개 속에서

- 헤르만 헤세

기이하여라, 안개 속을 거니는 것은!
모든 나무 덤불과 돌이 외롭다.
어떤 나무도 다른 나무를 보지 못한다.
누구든 혼자이다.

나의 삶이 아직 환하였을 때
내게 세상은 친구들로 가득했다.
이제 안개가 내려
더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어둠을,
떼어놓을 수 없게 나직하게
모든 것으로부터 그를 갈라놓는
어둠을 모르는 자
정녕 그 누구도 현명치 않다.  

기이하여라, 안개 속을 거니는 것은!
삶은 외로이 있는 것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을 알지 못한다.
누구든 혼자이다.

- 주(註) : Herman Hesse , 독일 시인(1877-1962)

회주의자가 되었건 완전 자본주의자가 되었건, 아니면 교회주의자가 되었건 그 모두가 ‘신 앞에서 외로운 단독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안개’는 참으로 힘이 셉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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