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
- 이인구
별들은 한 번도
줄을 맞춰 선 적이 없지만
하늘이 우왕좌왕 혼란스런 날이 있었던가
우린 늘
줄을 맞춰 서 왔지만
순서대로 무엇을 한 일이 없다
그저,
줄을 서지 않는 일을 두려워만 했을 뿐.
-시집 <달의 빈자리>(천년의 시작, 2021)
* 감상 : 이인구 시인.
1958년 원주에서 태어났습니다. 2007년 <예술세계>를 통해 작품을 시작하였습니다. 그의 나이 50이 넘었을 때 시 쓰기를 시작했으니 만학도인 셈입니다. 30여년 공직(국정원 지부장) 생활을 하였고, 퇴직 후에는 민간 기업에서도 일했던 그가 본업을 하면서 두 권의 시집을 냈고 퇴직 후 본격적으로 시업에 전념하면서 또 두 권의 시집을 냈는데, 오늘 감상하는 시는 최근에 낸 신작 시집에 실린 시입니다. 시집으로 <늦은 고백>(2006), <그대의 힘> (월간문학, 2013), <거기, 그곳에서>(천년의 시작, 2017), <달의 빈자리>(천년의 시작, 2021) 등이 있습니다.
시인은 하늘의 별들이 수없이 많이 있지만 그 별들이 줄을 맞추느라 우왕좌왕 혼란스러웠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는 말로 노래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시는 단도직입적으로 그 다음 연에서 우리네 삶의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우린 늘 / 줄을 맞춰 서 왔지만 / 순서대로 무엇을 한 일이 없다’는 표현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게 합니다. 무엇을 하든 줄을 서야 했고, 또 줄을 섰지만 순서대로 된 일이 없는 ‘현실의 삶’을 서글프게 고백하는 말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내가 발 딛고 살아가는 현실의 삶을 은근슬쩍 고발하는 말 같기도 합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늘 줄을 맞춰 서 왔지만’ 정작 왜 줄을 서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깊이 해보지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런 우리의 모습에 정곡을 찌릅니다. ‘그저 / 줄을 서지 않는 일을 두려워만 했을 뿐’이라고 말입니다. 주위의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하니까 나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저 불안하니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에서 서글픔을 느끼게 되는 시입니다.
며칠 전 어느 일간 신문에 소개 된 이 시를 읽으면서 평생 직장생활을 했던 게 ‘줄 서는 일’로 생각이 되면서 이 시가 훅 나에게 다가왔습니다. 조그만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름대로 매진했던 지난 30여년의 직장 생활이 ‘줄서기’에 다름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나의 ‘줄서기 인생’도 이제 정년퇴직이 얼마 남지 않아 곧 끝나겠지만, 시인이 두려워했던 것처럼 퇴직을 한 후에도 내 삶의 주체자로 떳떳하게 살지 못하고, 그저 줄을 서지 않는 게 두려워진다면 큰일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딘가에 소속되지 않으면 불안을 느끼는 우리 인간의 모습을 심리학자 아브라함 매슬로는 [욕구 5단계 이론]을 통해서 명쾌하게 설명한 적이 있지요. 어떤 줄이든 그 속에 내가 서 있어야 불안을 느끼지 않는 것을 그는 제 3단계인 ‘애정과 소속의 욕구’로 분류했습니다. 그러니까 시인이 이 시를 통해서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매슬로의 설명을 빌어 말한다면 제 4단계인 ‘자기 존중의 욕구’나 그 다음 단계인 제 5단계 ‘자아실현의 욕구’ 충족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되어, 당당히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줄밖의 인간되기’라고나 할까요.
늦깎이 시인의 시들을 검색하다가, 소소한 일상의 삶 속에서 길어 올린 공감이 가는 시 한 편을 더 발견했습니다. 같은 연배의 시인이어서 그런지 가슴에 와 닿는 표현들이 쉽게 읽혀집니다. 아내가 왜 집에 없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지만 갑자기 덩그러니 혼자 집에 있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받을 수 있는 느낌을 노래한 시입니다. 시인의 시선은 평범하지 않습니다. 아내가 없는 집은 '참 넓고' 어떨 때는 귀찮게 여겨졌던 것들까지 아내가 다 쓸어 담아 가버린 것 같은 느낌을 그는 이렇게 정겨운 시로 담아낸 것입니다. 그에게서 딱딱한 공직 생활의 흔적은 깔끔하게 없어진 듯합니다. 그래서 시를 통해 자기 자신은 물론 세상과 소통하고 있는 그의 정년 후 자유인의 삶이 부럽습니다. - 석전(碩田)
그대의 힘
- 이인구
아내가 없는 집은 참 넓다
늘 나란히 앉았던 소파에서
식탁 너머 창까지
무료해진 시선 가는 길
수 헤아릴 만큼 길다
언제나 환할 줄만 알았던 집 안도 어둡다
아내가 없으면
불을 켤 필요가 없다는 것
처음 알았다
그리고 또 아주 고요하다
아내가 없으면
전화도 울리지 않고
티브이도 떠들지 않는다
귀찮던 아이들 노는 소리
세탁 외치는 소리
타박하던 내 목소리까지
다 쓸어 담아 아내가 데려갔을까
있어도 들리지 않는다
아내가 없으니
나 갑자기 밖에서 온 자로
있어야 할 것들이 있을 자리를
하나도 채우지 못해
망연히 홀로 된 느낌
아내가 없으니
여태 산 것이
다 남의 집살이였던 듯하다
이렇듯 몰랐던
그대의 힘
- 시집, <그대의 힘>(월간문학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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