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미안하다, 후박나무 - 강민숙

석전碩田,제임스 2021. 12. 29. 06:44

미안하다, 후박나무

- 강민숙

미안하다
미안하다는 말조차 하지 못하고
살아온 내가 미안하다
너의 이름을 몰라
그저 나무라고만 부르고 다녔던
내가 미안하다
학교에 가서
네가 후박나무라는 걸 알았을 때
너를 호박나무라 부르며
마구 놀려먹었던 것이 미안하다
동네 사람들이
뜨락에 후박나무 심어져 있다고 하여
어머니를 후박 댁이라고 부를 때
나무를 베어 버리자고
억지투정을 부려 미안하다
후박이 얼마나 좋은 이름이고
후박나무가 나무 중에
나무인 줄도 모르고
껍질 벗겨 엿 만든다고
발로 툭툭 차고 다닌 내가 미안하다
변산 마실 길 오르다
후박나무 군락을 이룬 너희들 앞에서
미안하다고 말 할 적에
너는 바람결에
괜찮아, 괜찮아
괜찮다는 그 말만 들려주었지

- 시집, <채석강을 읽다>(실천문학사, 2021. 9)

* 감상 :  강민숙 시인.

1962년 전북 부안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숭의여대 문예창작과,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를 거쳐 동국대학교에서 석사, 그리고 명지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92년 <문학과 의식> 시 부문 신인상으로 등단하였고 1993년에는 <아동문학> 동시 부문 신인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시집으로 <노을 속에 당신을 묻고>(나라원, 1994), <노을 속에 당신을 묻고 1>(문학수첩, 1997), <그대 바다에 섬으로 떠서>(문학수첩, 1997), <꽃은 바람을 탓하지 않는다>(문학수첩, 2005), <둥지는 없다>(실천문학사, 2019), <채석강을 읽다>(실천문학사, 2021) 등이 있습니다. 허난설헌문학상, 매월당문학상, 서울문학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동강문학 발행인 겸 주간, 몽골 울란바타르대학교 초빙교수, 동학농민혁명 백산대회 역사공원 추진자문위원장, 그리고 아이클문예창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3 년 전, 부안의 월명암에 얽힌 재미난 글 하나를 제 블로그에 올린 적이 있었습니다.(https://blog.daum.net/jamesbae/13410628 ) 그 당시, 그 글을 마무리 하면서 ‘올 해 첫 눈이 오는 날, 눈발이 휘날리는 부서울 마을과 그 인근에 있는 부설거사의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망해사, 월명암, 그리고 동진 나루 등을 둘러보고 서해 낙조를 구경하는 나들이를 한번 해 봐야겠습니다’라고 썼습니다. 그런데 삶이 바쁘다는 핑계로 그 해 첫 눈이 온 날도, 또 그 다음 해 첫 눈이 온 날도 부안을 다녀올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지난 해와 올 해엔 코로나19 때문이라는 핑계거리가 하나 더 생기다 보니 이렇게 한 해를 넘기는 12월 마지막 주간이 되면 미처 하지 못한 숙제 때문에 고민하는 불쌍한 학생이 되곤 합니다. 오늘 감상하는 강민숙 시인의 최근 발행된 시집, <채석강을 읽다> 첫 페이지에 나오는 이 시의 제목을 읽는 순간 마치 내 마음을 들키고 만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미안하다’는 마음 말입니다. 지난 주, 올 겨울 첫 눈이 온 날에도 부안을 찾지 못한 미안한 마음에, 또 한 해를 보내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보려고 이 시를 꺼내 보았습니다.

 

마도 시인은 어릴 적에는 ‘후박나무’를 ‘호박나무’라고 잘못 듣고 그렇게 불렀나 봅니다. 이 시를 읽으면 시인이 나무 앞에 서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죄목’들을 일일이 고백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우선 엄연히 멋진 이름이 있는데도 그저 ‘나무’라고만 불렀던 것 뿐 아니라 ‘호박나무’라고 잘못 불렀던 것을 미안해합니다. 사실, 울릉도 ‘호박엿’도 이름과 관련하여 잘못 전해져 내려오는데서 기인한 엉뚱한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후박나무 껍질을 넣어 약용으로 후박 엿을 만들어 먹었는데, 언젠가부터 ‘호박엿’으로 불리면서 후박나무가 껍질 채 벗겨져 없어지는 수난을 면하게 된 것이지요. 시인이 ‘네가 후박나무라는 걸 알았을 때 / 너를 호박나무라 부르며 / 마구 놀려먹었던 것이 미안하다’라고 노래한 것은 아마도 이런 이름과 연관된 상황을 이야기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 뜨락에 후박나무 심어져 있다고 하여 / 어머니를 후박 댁이라고 부를 때 /나무를 베어 버리자고 / 억지투정을 부려 미안하다’는 부분을 보면 시인의 어머니 택호(宅號)는 ‘후박댁’이었나 봅니다. 그런데 이 명칭도 어린 아이가 듣기에는 도대체 상큼한 말은 아니어서, 시인은 아예 나무를 베어버리는 게 좋겠다고 투정을 부렸다는 것입니다.

저 평범한 후박나무 앞에 서서 미안해하는 목록이 이렇게도 많은 걸 보면 참 신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행간을 읽으면 시인의 이런 태도가 공감이 갑니다. 이제 '부안의 마실 길'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전국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명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마실 길’ 가운데서도 가장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장소가 ‘후박나무 군락지’라고 하니 시인에게는 감개가 무량할 뿐입니다. 그렇게 유명해진 후박나무 군락지에서 이토록 미안해하는 시인에게 후박나무는 ‘바람결에 / 괜찮아, 괜찮아 / 괜찮다는 그 말만’ 들려주었다고 시인은 노래하며 시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는 이렇게 끝나지만 시인과 후박나무와의 화해의 역사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많은 사람이 찾아오는 변산 마실 길의 주인공이 된 후박나무가 괜찮다고 했으니, 그 ‘멋진 이름의 나무’를 이제는 시인인 내가 지켜주겠다는 '약속이 포함된 화해'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축사였던 남편의 갑작스런 교통사고, 그리고 뱃 속에 있던 아이의 탄생 등 남편의 사망 신고와 아이의 출생 신고를 같이 해야 했던 기구한 사연을 담은 첫 시집이 화제가 되어 공중파 매스컴의 주목을 받았던 시인. 그래서 첫 시집이 30 만 부나 팔리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그것이 화근이 되어 해당 방송사와 보험회사와 긴 법정 소송으로 이어졌고 지난(至難)한 시간 끝에 결국 승소하는 과정들은 시인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은 시집에 실린 월명암과 관련된 시 하나를 더 감상하려고 합니다. 비록 첫 눈이 오는 날은 아니지만 월명암에서 바라보는 낙조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곳에서 자란 동심의 마음으로 노래한 시가 지금 당장이라도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합니다.

 

월명암 낙조대

 

- 강민숙

 

어릴 적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낙조를 본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아무 대답이 없는 우리들에게
선생님은 낙조를 보러 수학여행을 떠나자고 했다
나는 동물원으로 가
타조도 보고 낙조도 보는 줄만 알았다
선생님은 토요일 아침
편지 봉투에 쌀 한 봉지씩 담아오라고 했다
나는 낙조에게 줄 모이가 쌀인 줄 알고
두 봉지나 넣어 학교로 갔다
선생님은 버스에서 내려
2킬로만 가면 된다고 하셨다
낙조라는 새는 어떻게 생겼고
어떻게 우는 것일까
선생님은 낙조는 정말 아름답다며
계속 산을 오르고 계셨다
그때 눈앞에 나타난 것은
낙조가 아니라 월명암이라는 절이었다
절에서 스님이 낙조를 키우고 계실까
절간 어디에도 새장은 보이지 않았다
낙조의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선생님은 가지고 온 쌀 봉투를
대웅전 시주함 위에 올려놓고
낙조가 나타날 수 있게 절을 하라고 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공손히 절하고
대웅전 마당에 서니
멀리 보이는 것은 산뿐인데
선생님은 눈을 감고 낙조가 어떤 새인지
마음속으로 그리다 눈을 뜨라고 할 때
뜨면 낙조를 볼 수 있다고 하셨다
눈, 떠! 바로 그 순간
내 눈 앞에 펼쳐진 것은 노을이었다
노을 속으로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 시집, <채석강을 읽다>(실천문학사, 2021)

해를 마무리하는 주간입니다. 시인이 한 그루 나무 앞에 서서 ‘미안함의 목록’을 속죄하듯 나열했던 것처럼, 한 해 동안 나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힘들어 했을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며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 볼 일입니다. 그리고 기왕이면 한 해를 마감하는 마지막 날 ‘노을 속으로 해가 떨어지고’ 노을의 황홀한 눈부심이 사라지기 전이었으면 더 좋겠습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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