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라
길 밖에서 길을 바라보면
길 아닌 길 없다.
- 시집, <서울에서 다시 사랑을>(실천문학, 1998)
* 감상 : 이흔복 시인.
1963년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나 청소년기를 이천과 여주에서 보냈습니다. 경기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1986년 문학 무크지 <민의>에 ‘임진강’외 5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습니다. 시집으로 <서울에서 다시 사랑을>(실천문학사, 1998), <먼 길 가는 나그네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솔, 2007), <나를 두고 내가 떠나간다>(솔, 2014), <내 생애 아름다운 봄날>(도서출판 b, 2021.10) 등이 있습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국장을 역임했습니다.
단 두 줄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이 시를 읽으면 제목은 분명 ‘눈보라’인데 시어들 중에 눈을 나타내는 어떤 단어도 보이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인은 눈보라가 휘날려 앞을 가눌 수 없는 화이트 아웃(White Out) 현상을 보면서 아마도 은유적으로 자신이 걸어 온 인생길을 문득 떠올린 듯합니다. 폭설이 바람에 휘날리면서 내리는 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자연현상을 ‘백시(白視)현상’, 즉 '화이트 아웃'이라고 합니다. 바로 그런 상황을 시인은 ‘길 밖에서 길을 바라보는’ 경험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눈보라 때문에 어디가 길인지 모르는 현상과 삶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길’을 연결 고리 삼아 멋진 시로 완성해냈다는 말입니다. ‘길’을 찾아 평생을 헤매다가 어느 날 문득 뒤돌아보았더니 ‘자기가 묵묵히 걸어 온 길’도 하나의 길이었다는 고백이니 이 시는 어쩌면 시 속의 시적 화자가 다름 아닌 시인 자신을 말하는 자서전적인 시라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나 혼자만 눈보라 속에서 헤매고 있는 건 아닌지 절망할 때도 있었지만, 지나 온 길을 뒤돌아보면 걸어 온 길이 길이 아니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길도 역시 길이었음을 알게 되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지난 11월 말 제주를 방문했을 때, 모든 일정이 끝난 후 조천에 있는 ‘시인의 집’에 잠시 들렀습니다. 그 때 그 집 주인인 손 세실리아 시인은 읽을 책들을 추천해 달라는 저의 주문에 이흔복 시인의 최신 시집 <내 생에 아름다운 봄날>(b, 2021)을 포함하여 몇 권의 귀한 책들을 흔쾌히 추천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알게 된 시인이 바로 이흔복 시인입니다. 지난 해 10월에 발간된 그의 시집에 실린 서문을 읽으면서 시인이 지금 삶의 길에서 예기치 않은 복병을 만났다는 사실도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이흔복 시인은 2015년 9월 24일 아침에 뇌출혈이 발생하여 투병을 시작했다. 6년이 흐른 지금, 초기의 상황보다 현저히 좋아지기는 하였어도 가혹한 투병의 시간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이흔복 시인은 급작스레 인사도 없이 투병의 시간 속으로 들어갔지만 그는 우리에게 이미 항상 따뜻한 마음을 건네고 있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삶의 깊은 내부에서 들끓는 고통으로 힘들어하는 우리에게 전해주는 위로의 시편들로써 말이다. 그 시편들을 모아 이흔복 시인의 새 시집을 한 권 펴낸다. 여기 실린 시들은 이흔복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이후에 씌어진 것들을 모은 것이다.
시집을 펴내는 일이 시인 자신의 힘과 지혜로 마련해야 마땅하지만 그럴 날이 속히 도래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가족의 양해를 구하여 펴내게 된 것이다. 이흔복 시인이 지난한 투병의 시간 속에서 절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삶에 대한 의지와 용기를 지켜보며 동료 시인들의 우정을 모아 격려를 보낸다. - 이흔복 시인을 대신하여, 조기조]
이렇게 발간된 그의 최신 시집에 실린 시 중에서 오늘 감상하는 ‘눈보라’와 비슷한 시적 은유가 전해져 오는 시 한 편을 더 감상해보겠습니다.
바다
- 이흔복
바다에 사는 사람들은
바다를 닮는다
바다에 사는 사람들은
바다의 길을 걷는다.
- 시집, <내 생애 아름다운 봄날>(도서출판 b, 2021.10)
결국 인간의 삶이란 나침반도 비상식량도 없이 망망한 모래사막 혹은, 격랑의 어두운 바다를 떠도는 것으로,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세계를 인식하고 있는 시인입니다. 목숨을 담보해 앞으로 걸어도, 있는 힘을 다해 노를 저어도 결국은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의 고향‘이 시인이 추구했던 곳이라니, 그런데 지금은 몸져 누워있으면서 소통도 어려운 삶의 길을 걷고 있다고 하니 눈물 겹도록 서럽기까지 합니다.
그의 시집을 추천하면서 손 세실리아 시인은 ‘눈으로 출발했다가 성에 차지 않아 나중엔 소리를 내어 읽기도 했다, 때론 세레나데 같다가도 때론 그레고리안 찬트로 돌변하는 매료의 정도가 어찌나 강렬한지 적잖은 시편은 절로 외워졌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자신이 시집의 추천사에서 밝혔던 그 말을 한번 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는데, 이 시집을 읽는 내내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습니다.
마침 내일은 전국적으로 큰 폭설이 예보되어 있습니다. 이 폭설이 행운이 되어 동료 문인들의 간절한 바람이 담겨 있는 그의 시집 제목처럼 2022년 봄은 '내 생에 아름다운 봄날'이라고 노래하는 시인을 다시 건강하게 만날 수 있길 기대합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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