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라니에게 몸살을 옮다
- 박승민
메밀밭이 있던 눈밭에서 고라니가 운다.
희미한 비음이 눈보라에 밤새도록 쓸려온다.
나는 자는 척 베개에 목을 괴고 누웠지만
다시 몸을 뒤척여 민물새우처럼 등을 구부려 돌아누워 보지만
눈바람에 실려오는 울음소리가 달팽이관을 자꾸 건드린다.
바람소리와 울음소리가 비벼진 두 소리를 떼어내 보느라 눈알을 말똥거린다.
눈밭에 묻힌 발이 내게 건너오는지 흘러내리는 찬 콧물이 옮겨오는지 머리가 지끈거리고 코가 맹맹하고 팔다리가 자꾸 쑤신다.
어떤 생각만으로도 몸살은 오는지
몸살은 몸속의 한기를 내보내서 몸을 살리라는 뜻인데
나도 모르는 어떤 응달이 아직 살고 있는지 귀를 쫑긋한다.
아내에게는 고라니에게 몸살을 옮았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혼자 약 지으러간다.
- 시집 <슬픔을 말리다> (실천문학사, 2016)
* 감상 : 박승민 시인.
1964년생 경북 영주에서 태어났으며 숭실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했습니다. 2007년 <내일을 여는 작가>를 통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시집으로 <지붕의 등뼈>(푸른사상, 2011), <슬픔을 말리다>(실천문학사, 2016), <끝은 끝으로 이어진>(창비, 2020) 등이 있습니다. 박영근작품상, 가톨릭문학상 신인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작가회의 대구경북지회장을 역임하였습니다.
고등학생 시절 막연히 시인이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을 때, 교내 백일장에서 입상을 한 경험은 시인으로 하여금 그 때부터 ‘시인이 되겠다’는 꿈으로 몸살을 앓게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후 대학에 진학하고 싶었던 국어국문학과는 부모님의 반대 때문에 정작 가지 못하고 불문학과에 입학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대학 재학 시절에는 불문학 과목 보다는 국문학과의 과목을 더 많이 수강하였고 또 대부분의 시간은 시문학 동아리에서 보냈습니다. 또 졸업 후에는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 위해서 국어학원을 운영하는 생업에 전념하다보니 본격적인 시업(詩業)에 뛰어 든 건 불혹의 나이를 훨씬 넘긴 후에야 가능했습니다.
오늘 감상하는 시는 시 때문에 몸살을 앓을 정도로 꿈을 가졌지만 먼 길을 돌아야했던 시인의 삶의 과정을 빗대어 읽을 때 더 애틋하게 다가오는 듯합니다. ‘아내에게는 고라니에게 몸살을 옮았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혼자 약 지으러 간다’는 시의 마지막 한 문장이, 본격적으로 시업에 뛰어 들어 시인의 길을 가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아내에게는 늘 미안한 마음이 있다는 이야기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혼자 약 지으러’ 간다는 표현은 이 시가 시가 되도록 하는 ‘시적 은유’라는 말입니다.
한겨울 하얗게 눈이 덮인 산야에서 고라니가 홀로 거니는 풍경을 그저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모습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그 속사정을 잘 모르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나무뿌리나 새싹들을 먹고 연명하는 고라니가 겨울을 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큰 눈이 내려 발목까지 눈이 쌓여 있으면 먹이를 찾아 민가 근처로 내려가야 겨우 목숨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눈 밭에 묻힌 발’이 시려 슬피 우는 고라니의 울음소리는 어쩌면 시인이 부르는 노래(시)처럼 온 몸이 쑤셔오는 몸살과 같습니다. 시인은 눈 덮인 메밀밭에서 울고 있는 고라니에게 자신의 감정을 이입시켜 이 시를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자는 척 베개에 목을 괴고 누웠지만 / 다시 몸을 뒤척여 민물새우처럼 등을 구부려 돌아누워 보지만 / 눈바람에 실려오는 울음소리가 달팽이관을 자꾸 건드린다. / 바람소리와 울음소리가 비벼진 두 소리를 떼어내 보느라 눈알을 말똥거린다.’ 한 겨울 눈 쌓인 눈밭에서 밤새도록 들려오는 고라니 울음소리에 전전반측 잠을 설치고 있는 시인은 ‘눈밭에 묻힌 발이 내게 건너오는지 흘러내리는 찬 콧물이 옮겨오는지 머리가 지끈거리고 코가 맹맹하고 팔다리가 자꾸 쑤’시는 반응으로 화답하고 있습니다. 내 몸 속에 이미 있어 왔던 ‘나도 모르는 응달’과 ‘고라니 울음소리’가 서로 화답하면서 끙끙 몸살을 앓으면서, 시인에게 찾아온 시의 목소리에 귀를 쫑긋하고 있는 시인의 모습이 애틋합니다.
2016년 시집 <슬픔을 말리다>로 가톨릭 문학상 신인상을 수상한 시인을 당시 심사위원들은 ‘슬픔이라는 감정을 개인을 초월해 사회의 여러 문제들과 폭넓게 연결하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평했습니다. 시집 제목인 <슬픔을 말리다>를 [‘말리다’라는 단어는 ‘Dry’, 즉 슬픔이 자연스럽게 ‘마르다’라는 뜻도 있지만, 이중적으로 우리가 싸움을 ‘말리다’와 같이 어떤 상황을 중재하는 뜻도 있다]고 시인은 설명했습니다. 말하자면 이 땅을 살아가는 시인의 본분은 사회가 당하는 슬픔을 싸움을 말리듯이 적극적으로 말려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누가 뭐라하더라도 '혼자 약 지으러'갈 것이라는 결단이기도 합니다.
연일 영하의 날씨가 계속되고 또 엊그제 내린 눈이 채 녹지 않고 있지만 동장군의 기세도 곧 꺾일 것입니다.그러면 온 천지가 파릇파릇 새싹들이 돋아날 것이고 눈밭 속에서 희미한 비음의 울음으로 한겨울을 견딘 고라니들도 제 세상을 만나 힘차게 뛸 것입니다. - 석전(碩田)
'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설날 아침에 / 우리네 새해 아침은 - 김종길 (0) | 2022.02.01 |
---|---|
고쳐 말했더니 / 지우개 엄마 - 오은영 (0) | 2022.01.26 |
눈보라 / 바다 - 이흔복 (0) | 2022.01.12 |
내꺼 - 김선우 (0) | 2022.01.05 |
미안하다, 후박나무 - 강민숙 (0) | 2021.12.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