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沙浦小集次杜韻[사포소집차두운] - 정약전

석전碩田,제임스 2021. 9. 22. 10:53

沙浦小集次杜韻[사포소집차두운](사포에 몇 명이 모여 두보의 시에 차운하다)

- 손암 정약전

三兩客將秋色來[삼양객장추색래]
詩因遺興未論才[시인유흥미론재]
凉颷在樹蟬猶響[양표재수선유향]
淸月盈沙鴈欲回[청월영사안욕회]
小屋靑山侵席冷[소옥청산침석냉]
四隣白酒捧杯催[사린백주봉배최]
樵兒釣叟懽成友[초아조수환성우]
恣意家家笑語開[자의가가소어개]

서너 나그네가 가을 빛 따라와
시 지으며 흥을 돋우니 재주는 따지지 않네
서늘한 바람 나무에 있건만 매미는 아직 울고
맑은 달빛 모래밭에 가득하자 기러기 돌아오려네
푸른 산 오막집에 추위가 스며들자
사방 이웃들이 막걸리 잔을 건네네
나무꾼에 고기잡이까지 기쁘게 친구가 되니
집집마다 마음껏 웃음꽃 피었구나

- 다산 정약용이 자신의 저술을 정리한 필사본 문집 <여유당집(與猶堂集)>에 실린 시. 여유당집은 그의 사후 신조선사가 1938년 <여유당전서>로 편집 간행하였음.

* 감상 : 손암(巽菴) 정약전(丁若銓).

1758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서 1816년에 사망하였습니다. 본관은 나주(羅州). 다산 정약용의 둘째 형으로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났으며 당시 실학의 대가였던 이익의 제자였던 천주교인 권철신으로부터 학문을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그의 온 집안이 천주교에 귀의하였습니다. 그의 영세명은 안드레아. 23세였던 1783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에 올랐고, 30세가 되던 해인 1790년 증광문과에 응시하여 병과로 급제하여 전적, 병조좌랑(현재의 사무관에 해당하는 벼슬)의 관직을 역임하였습니다.

1800년, 정조 대왕이 승하하자 다음 해 1801년 신유년에 일어난 박해에 휘말리게 되었고 정약종은 순교를, 그리고 정약전, 정약용 형제는 순교 대신에 배교를 택해 다산 정약용은 경북 포항을 거져 전남 강진으로, 손암 정약전은 흑산도로 귀양을 갔습니다. 정약전은 유배지인 흑산도에서 16년 귀양살이를 했으며 죽기 전 유배지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결국 그곳에서 사망하였습니다. 그가 유배지에서 남긴 글 <자산어보(玆山魚譜)>와 <송정사의(松政私義)> 등은 전해졌으나 그의 시는 다산의 필사본 유고(遺稿) 여유당집을 정리하는 중, 그 뒷 쪽에 실려 있던 40여 편이 최근에서야 발견되었습니다.

난 봄, 정약전의 <자산어보>에 나오는 한 구절을 모티브 삼아 제작된 멋진 영화가 개봉된다는 광고를 보고 꼭 봐야겠다고 벼르고 있었지만 코로나19가 심상치 않게 번져나가는 바람에 영화관에서 미처 감상하지 못했던 영화가 있었습니다. 바로 정약전이 저술한 책 <자산어보>와 이름이 같은 영화. 어제 영화관이 아닌 거실에서 온 가족이 함께 모여 Wavve(웨이브)를 통해서 감상할 수 있었는데 역시 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수작(秀作)의 영화였습니다. 정약전이 흑산도에 유배되어 와서 만난 ‘장창대’라는 청년이 <자산어보> 서문에 언급되어 있는 한 줄을 근거로 이만한 멋진 영화를 만들어 낸 상상력에 박수를 맘껏 보내고 싶어지는 영화였습니다. 마침 추석 연휴 ‘보고 싶은 영화’로 마지막 날인 오늘 밤 공중파 TV에서도 방영을 한다고 하니 못 보신 분들은 놓치지 말고 꼭 감상해보시길 강력 추천합니다.

늘 감상하는 시는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기약 없는 유배 생활을 하면서 그곳 사람들과 어울려 살았던 소탈한 삶의 모습을 시로 노래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를 강진에서 역시 유배 생활을 하고 있던 동생 정약용과 주고받았는데 그 시편들이 다산의 유고인 <여유당집>에 실려 있다가 최근 발견되어 알려지게 된 시입니다. 영화를 감상하고 난 후, 정약전이 남긴 시가 없을까 검색을 해 봤더니 역시 이런 시가 있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어제같이 한가위 밝은 달이 흑산도의 모래 해변 위에도 어김없이 내리비췄을 것이고, 그 곳 고향을 찾은 사람들도 정약전이 살았던 그 때처럼 한데 모여 가족의 정을 나누었을 것입니다. ‘사방 이웃들이 막걸리 잔을 건네네 / 나무꾼에 고기잡이까지 기쁘게 친구가 되니 / 집집마다 마음껏 웃음꽃 피었구나’라고 노래한 이 시가 바로 한가위 보름달이 둥실 뜬 어제 추석날의 흑산도 풍경을 노래한 것은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화는 다산 정약용과 손암 정약전 두 형제가 학문과 신앙, 그리고 정치를 통해서 추구했던 차이점이 있음을 전제로 하여, 그것을 긴장감 있게 풀어내고 있는데 영화를 지루하지 않게 하는 장치로 충분한 역할을 한다고나 할까요. 그리고 영화의 전개는 그 차이가 무엇인지를 흑산도 현지에서 손암의 제자가 된 창대라는 한 청년이 서서히 깨달아가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우리가 아는 정약용은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등 수많은 책을 남긴 실학파의 이론가요 위대한 문장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그와 그의 형 정약전이 추구했던 세계는 무엇이 달랐고 어떤 점에서 서로 교감할 수 있는 공통점이 있었을까. 바로 이것을 따라잡을 수 있다면 영화 감상은 물론 오늘 감상하는 시의 맛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한시(漢詩)에 등장하는 난해한 몇 글자 한자(漢字)를 찾느라 수년동안 한 번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옥편을 찾아 뒤적거리면서 한시를 읽는 재미를 덤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록 그가 당대 권력을 잡은 사람들 앞에서 ‘배교(背敎)’라는 부끄러운 선택을 하여 ‘사형에서 유배’라는 낮은(?) 판결을 받았지만, 유배지에서 사망하기까지 그가 살아냈던 그의 삶은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높은 학문이었으며, 또 문학과 시였으며, 한 편의 최고의 드라마였습니다. 그리고 그 삶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과 또 그가 살았던 흑산도는 임금도 필요없고, 백성 위에 군림하는 탐관오리는 더더욱 없는, 사랑이 넘치고 ‘마음껏 웃음꽃 피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 바로 ‘자산(玆山)’이었습니다. 정약전이 날마다 기도하면서 꿈을 꿨으며 또 실제 삶으로 살아냈던 '그 세상' 말입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