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롱나무의 안쪽
- 안현미
마음을 고쳐먹을 요량으로 찾아갔던가, 개심사, 고쳐먹을 마음을 내 눈앞에 가져와 보라고 배롱나무는 일갈했던가, 개심사, 주저앉아버린 마음을 끝끝내 주섬주섬 챙겨서 돌아와야 했던가, 하여 벌벌벌 떨면서도 돌아와 약탕기를 씻었던가, 위독은 위독일 뿐 죽음은 아니기에 배롱나무 가지를 달여 삶 쪽으로 기운을 뻗쳤던가, 개심사, 하여 삶은 차도를 보였던가, 바야흐로 만화방창(萬化方暢)을 지나 천우사화(天雨四花)로 열리고 싶은 마음이여, 개심사, 얼어붙은 강을, 마음을 기어이 부여잡고 안쪽에서부터 부풀어 오르는 만삭의
- 시집, <사랑은 어느 날 수리된다>(창비, 2014)
* 감상 : 안현미(安賢美) 시인.
1972년 강원도 태백에서 태어나 서울과기대(서울 산업대)를 졸업했습니다. 2001년 <문학동네> 신인상에 ‘곰곰’ 외 4 편의 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불편’ 동인으로 활동 중입니다. 시집으로 <곰곰>(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이별의 재구성>(창비, 2000), <사랑은 어느 날 수리된다>(창비, 2014), <곰곰>(걷는사람, 2018 복간), <깊은 일>(아시아, 2020, 시선집) 등이 있습니다. 제28회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오늘 감상하는 이 시를 안도현 시인이 <이 시를 그 때 읽었더라면>이라는 시선집에 소개하며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이 글만 읽어도 이 시가 무엇을 노래하려고 했는지 금방 알 수 있을 듯해서 전문 그대로 옮겨봅니다.
[속세의 일 때문에 주저앉은 마음을 추스르고 싶어 개심사에 갔나 보다. 그래도 마음은 쉽게 열리지 않았나 보다. 죽음과도 같은 어떤 고통스러운 일이 그의 몸과 마음을 훑고 지나갔으리라. 개심사는 배롱나무가 유명하다고 한다. 이 나무는 표피가 유난히 매끈하다. 여름날 백일 동안 꽃을 피운다고 해서 백일홍으로 부르기도 한다. 화자는 꽃을 달고 서 있지 않은 겨울 배롱나무가 안쪽에서부터 부풀어 오르고 있음을 직감한다. 아픔을 견디면 언젠가는 만물이 생동하고 꽃들이 사방에 비 오듯 내리는 날이 올 거라고 믿는다. 세상을 한 바퀴 휘돌아 나온 자의 성찰이 느껴지는 시다. 그래서 산문시인 데도 묵중한 리듬이 느껴진다.]
오늘 이 시를 특별히 꺼내서 읽어보고 싶었던 것은 배롱나무꽃이 한창인 요즘에 감상하기에는 이 시가 제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말 특별한 축제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고향 마을을 다녀오면서 뒷산에 있는 선영을 일부러 들렀습니다. 3년 전, 선영 주변에 배롱나무 몇 그루를 심었는데 그동안 한 번도 그 꽃들이 활짝 핀 모습을 보지 못해 마침 그 꽃이 피는 시절이라 그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역시 근사하게 연분홍 꽃을 만발하고 있더군요. 아직 서산 해미에 있는 개심사나 담양 명옥헌의 배롱나무 만큼은 성장하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선영 주변을 환히 밝히면서 그곳을 찾는 후손들에게 멋진 쉼터를 제공하는 나무가 될 것을 확인하고 왔습니다. 마치 시 속의 화자가 겨울이지만 여름철에 터져 나올 배롱나무꽃이 안쪽으로 만삭이 되어 부풀어 있는 것을 마음의 눈으로 본 것처럼 말입니다.
제가 어린 시절에는 ‘배롱나무’라는 말은 별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백일홍’이라고 불렀고 또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정식 명칭이 ‘배롱나무’라는 사실을 안 지는 그리 오래지 않습니다. ‘백일홍’이라고 부를 땐 ‘목백일홍’ 또는 ‘나무백일홍’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배롱나무는 원래 중국에서 들여 온 나무로, 자미화(紫微花)라고 불렸으며 예전에는 글 꽤나 읽는 사대부 집안에만 심어야 했던 나무여서 이 꽃나무가 있는 집안과 그렇지 않은 평민의 집을 구별하는 가늠자 역할을 했다고도 합니다. 말하자면 중국에 유학을 다녀 온 식자층만이 독점했던 꽃이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유래를 가진 꽃나무는, 지난 몇 개월간 한창 만발했다가 이제 거의 다 져 가고 있는 ‘능소화’도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주저앉아버린 마음을 끝끝내 주섬주섬 챙겨서 돌아와야 했던가, 하여 벌벌벌 떨면서도 돌아와 약탕기를 씻었던가, 위독은 위독일 뿐 죽음은 아니기에 배롱나무 가지를 달여 삶 쪽으로 기운을 뻗쳤던가,’
이 부분을 읽으면, 아마도 시 속의 화자는 지금 다른 사람에게는 얘기할 수 없는 지병을 지닌 듯합니다. 그리고 배롱나무가 특효라는 이야기를 듣고 일부러 개심사를 찾았고 그곳을 다녀오면서 그 약효가 있다는 배롱나무 뿌리를 구해 와 달여 기운을 차려보고 싶었던 듯합니다. 사실, 배롱나무 뿌리는 부인 질환인 방광염, 냉증, 대하증, 불임증 등에 효험이 있다고 예로부터 전해내려 온다고 하니 말입니다.
각설하고, 이제는 시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안현미 시인의 시를 읽으면 마치 시집 전체가 시인의 자서전(自敍傳) 한 권을 읽는 느낌이 들 정도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마치 시인이 화자가 되어 자신의 이야기인 것처럼 활달하고 감각적인 언어로 노래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물론 자신의 이야기와 전혀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여상(서울여상)을 졸업하고, 직업 전선에 뛰어들었고 결혼을 한 후 뒤늦게 대학 문예창작과에 진학하여 문학의 길을 걸으며, 계약직을 거듭하다 지금은 정규직으로 일선에서 일하고 있는 ‘사무직 시인’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시집 <사랑은 어느 날 수리 된다>로 신동엽 문학상을 수상할 때, 시인을 두고 평론가들은 ‘진솔함의 미덕과 상상력의 힘을 합체하는 타고난 언어감각을 지닌 시인’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어둠 속의 불우한 현실을 감싸 안으며 시와 삶을 아우르는 진지한 성찰의 세계를 보여주는 시인의 시 중에서 눈에 와 닿는 한 편을 더 읽어보겠습니다.
거짓말을 타전하다
- 안현미
여상을 졸업하고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아현동 산동네에서 살았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사무원으로 산다는 건 한달치의 방과 한달치의 쌀이었다 그렇게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 살았다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도 슬프지 않았다 가끔 대학생이 된 친구들을 만나면 말을 더듬었지만 등록금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던 날들은 이미 과거였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비키니 옷장 속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출몰할 때도 말을 더듬었다 우우, 우, 우 일요일엔 산 아래 아현동 시장에서 혼자 순대국밥을 먹었다 순대국밥 아주머니는 왜 혼자 오냐고 한 번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 고마웠다 고아는 아니지만 고아 같았다 여상을 졸업하고 높은 빌딩으로 출근했지만 높은 건 내가 아니었다 높은 건 내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 꽃다운 청춘을 바쳤다 억울하진 않았다 불 꺼진 방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나 대신 잘 살고 있었다 빛을 싫어하는 것 빼곤 더듬이가 긴 곤충들은 나와 비슷했다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불 꺼진 방 번개탄을 피울 때마다 눈이 시렸다 가끔 70년대처럼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고 싶었지만 더듬더듬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내 이마를 더듬었다 우우, 우, 우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꽃다운 청춘이었지만 벌레 같았다 벌레가 된 사내를 아현동 헌책방에서 만난 건 생의 꼭 한번은 있다는 행운 같았다 그 후로 나는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진짜 가족이 되었다 꽃다운 청춘을 바쳐 벌레가 되었다 불 꺼진 방에서 우우,우,우 거짓말을 타전하기 시작했다 더듬더듬, 거짓말 같은 시를!
- 시집 <곰곰>(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감각적인 언어유희(言語遊戱), 그리고 삶의 구석구석을 들여다보는 세밀한 관찰과 그것을 마치 내 이야기처럼 풀어내는 시적 재치가 읽는 이로 하여금 감동을 불러일으키며 따뜻한 위로가 되게 하는 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은 재개발이 되어 흔적조차 없어져 버린 그 시절의 아현동과 그곳 헌책방에서 화자가 만난 시집은 누구의 시집이었을까. 그리고 그 행운 같은 만남 덕분에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진짜 한 가족 벌레가 된 그녀가 타전하는 우우, 우, 우 거짓말들은 시가 되어 오늘 나에게 전달되어 오고 있습니다.
부디 올해의 배롱나무꽃이 지기 전 그 꽃그늘 아래서 긴 더듬이로 더듬거리며 가을을 노래하는 시들을 맘껏 만나 보시길, 그래서 이 독서의 계절을 그저 흘려보내지 마시길.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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