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 김지희
노을이 여자를 읽고 있는 저녁 어스름
언제부터 그 여자
도서관에 꽂혀 있었는지 몰라
세상 어디쯤에 꽂아 둔지도
언제 끼워 둔지도 몰라
세상, 성게처럼 헤매던
한 여자
몇 페이지 넘기지도 못했는데
아무도 그 여자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적 없고
자신조차 다 읽어내지도 못했는데
폐관 시간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네
- 시집, <토르소>(시와문화, 2015)
* 감상 : 김지희 시인.
경북 성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를 수료하였습니다. 2006년 <사람의 문학>을 통해 등단하였으며, 2014년에는 인터넷신문 일간제주와 영주일보사가 주최한 신춘문예에서 시 부문에 ‘가을, 낯선 도시를 헹구다’가 당선되었습니다. 계간 <시와문화> 편집장을 맡고 있습니다. 시집으로 <토르소>(시와문화, 2015)가 있고 에세이집 <사랑과 자유의 시혼 –세계의 문제 시인을 찾아>(시와문화, 2017)가 있습니다.
이 시를 읽으면서 갑자기 기드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이라는 장편 소설이 생각난 건 왜 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저녁 어스름, 노을이 읽고 있는 시 속의 그 책이 혹시 그 소설책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서관에 꽂혀 있는 책을 ‘한 사람 여자’로 의인화하여 은유적으로 풀어낸 시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맞습니다. 시를 가만히 정독을 하면 이 시의 제목인 ‘책’은 다름 아닌 한 여자를 은유적으로 이야기하고 있고 또 그 책의 내용은 그녀가 살아온 삶 전체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아마도 시인이 묘사하고 있는 시 속의 ‘그녀’는 인생의 황혼기에 있든지, 아니면 불치의 병으로 인해서 시한부 인생 선고를 받은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그동안 사람들의 관심은 별로 받지 못한 인생을 살았던 듯합니다.
‘아무도 그 여자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적 없고/ 자신조차 다 읽어내지도 못했는데’라는 표현이라든지 ‘몇 페이지 넘기지도 못했는데’라는 시어들이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세상, 성게처럼 헤매던/ 한 여자’로 살다보니 자기 자신이 왜 사는지 또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질문에 답할 틈도 없이 그저 열심히만 살아 왔습니다. 하루해가 저물어 가는 때, 저녁노을이 서가에 꽂혀 있는 책을 비추는 시간은, 지금은 ‘폐관 시간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인생의 말년임을 은유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이 시 때문에 모파상의 소설, <여자의 일생>을 다시 한번 리뷰해 보았습니다. 앙리 르네 알베르 기 드 모파상(Henri Rene Albert Guy de Maupassan)은 1850년 8월, 프랑스 노르망디 미로메닐에서 태어났습니다. 1893년 7월, 43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길지 않은 인생을 살았지만 300여 편의 단편 소설과 6편의 장편 소설을 남길 정도로 다작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1883년 발표한 장편 소설 <여자의 일생>은 원제목이 <Une Vie> (어느 인생)으로 ‘조그마한 진실’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 될 때 소설 속의 여주인공 잔느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고 해서 ‘여자의 일생’으로 번역이 되는 바람에 그 이후에 줄곧 <여자의 일생>이라는 제목으로 굳어지고 만 소설입니다.
순진하고 착하게 성장한 여주인공 잔느는 라마르 자작(이하 ‘줄리앙’)과 결혼하였으나 바람기 가득하고 품행이 난잡한 남편 줄리앙에게 버림을 받아 어두운 인생길을 걷게 됩니다. 남편은 식모인 로자리에게 임신을 시키고 그런 바람기 때문에 끝내는 죽음을 당하고 맙니다. 그런 남편이 죽자 잔느는 혈육인 아들 폴에게 집착에 가깝게 천착하지만 결국 그 아들로부터도 버림을 받습니다. 자택도 남에게 넘어가고 형편이 궁색해질 대로 궁색해 진 잔느 앞에 어느 날 갑자기 로자리가 나타납니다. 25년 만에 나타난 그녀는 늙고 초라해진 젖형제이자 옛 여주인인 잔느에게 아낌없는 사랑과 헌신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녀의 얼마 남지 않은 재산을 정리해주기도 하고 더 이상은 아들 폴에게 필요 이상의 돈을 보내는 것을 막습니다. 파리로 폴을 만나러 갔다가 헛걸음 하는 잔느를 물심양면으로 도울 뿐 아니라, 폴이 죽어가는 창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갓난아기를 데리고 잔느 앞에 나타나 희망의 메시지가 되어 주기도 합니다.
1세기 전에 이 소설 속의 ‘어느 인생’을 통해서, 또 오늘 감상하는 시에서 ‘아직 몇 페이지 넘기지도 못했는데’ 어스름 인생의 말년을 맞은 한 여자를 통해서 작가들이 말하려고 한 ‘조그마한 진실’은 무엇일까. 시인의 또 다른 시를 읽어보면 100년의 간극, 그리고 지리적으로 지구의 반대편에 떨어져 있지만 오늘 날 이 땅에서의 ‘여자의 일생‘은 그리 많이 달라져 있지 않은 듯합니다.
여자의 시간을 통째로 넣고
- 김지희
잘 만져지지 않는 겨울 끝자락
설핏한 해 달래며 만두를 빚는다
허기진 저녁을 채울 만두 빚으려면
각각 따로 노는 것들이 없도록
제 살 여미듯 다듬은 육류며
어둠을 마시는 풀잎
달의 큰 통 안에 있는 여자,
그림자 애인까지 모두 잘 여며
피 속으로 끌어안아야 한다
자칫 봉재선이 뜯어지면
자식들 환한 이마 돌보느라
책 한 권 읽을 수 없는 시간이 잘려 나간다
찬바람 숭숭 새는 문풍지,
거친 파도 목젖까지 차오르던 삶
잘 여며 주시던 어머니 보자기처럼 꽉 싸매야 한다
껍질과 속을 구분해서 먹으면
고비고비 넘어온 사람살이 맛까지 없어진다
영혼을 채워주지도 못한다
구멍 난 양말 같은 시대에
계산하고 재는 연인들 가슴 속 열어 보면
깨진 유리조각처럼 상처가 알알이다
유리에 새겨진 모자이크 사랑보다
통째로 쏟아 내는 사랑을 위해
온몸 사르는 불을 지핀다
꿰매진 사랑 그 조각보를 볼 때마다
봉재선 사이사이 한 여자의 살점이 묻어나는 것 같다
온몸 조각조각 붙여진
아내 어머니 며느리 딸… 그 모든 모습들을 녹여
온전한 한 사람을 빚는다
난파된 구름 조각 같은
꿈을 한데 모아 만두를 빚는다
꽃샘추위로 풀리는 여자의 시간을 통째로 넣고
캄캄한 가슴 적셔주는 별빛으로 속을 채운다
한 남자와 아이들이
꿈의 풍선 터질 때까지 힘껏 불어
여자의 속 부풀고 부풀다 결국 울음 되어 터질까봐
겨울 밤 흩어진 여자들을 모아
훈훈한 향기 가득한 만두를 빚는다
무수한 달의 이야기 품은 온전한 여자를 빚는다
- 시집, <토르소>(시와문화, 2015)
추석 명절이 들어 있는 9월의 첫 날입니다. 이번 추석에는 ‘아내 어머니 며느리 딸...그 모든 모습들을 녹여/ 온전한 한 사람을 빚고’ ‘훈훈한 향기 가득한 만두를 빚는’ 이 땅의 여자들이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그들이 품고 있는 ‘무수한 달의 이야기’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주는 시간을 가져볼 일입니다. 또 여자이든 남자이든,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을 외부의 그 무엇에 맡길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결정하며 살아갈 수 있길 응원합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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