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플라워 다방 보들레르, 나를 건져주다 / 존재와 말 - 김규동

석전碩田,제임스 2021. 9. 8. 06:06

플라워 다방 보들레르, 나를 건져주다

                       - 김규동

1948년 여름에
소공동 "플라워다방"에 들렀다

정월달에 남으로 온 나는
남쪽 문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하고
그곳을 찾았다

"플라워다방"에는
"문예" 잡지 필진들이 모인다 했다
과연 그곳에는
김동리 조연현 곽종원 조지훈
서정주의 아우 서정태, 이정호, 이한직
등이 모여 있었다

안쪽 구석 테이블에서
한창 원고를 갈기고 있는
베토벤같이 헝클어진 머리를 한 이는
중국서 온 소설가 김광주라 했다
처음에 나는 저 사람이야말로
남쪽 큰 작가가 아닌가 하고
그쪽만 주목했다

김동리는 수인사 끝나자
이태준의 안부를 묻고
북에서 "농토"를 발표했는데
어떤 내용이냐고 물었다
서울 물정에 어두운
초면의 문학청년에게
김동리는 비교적 친절했다
그의 경상도 말씨는
여기가 과연 `남조선`이구나 싶은
감명을 안겨줬다

내과의사 같은 인상을 한
깡마른 조연현은
콧등에 밴 땀방울을  
훔칠 생각도 않고
임화 안박 최승희는
어떻게 하고 있느냐
호기심을 갖고 물었다

내가 학교시절 김기림 선생한테 배웠다니까
그분은 지용과 함께 문학가동맹을 해서
요즘은 활동 못하게 됐다고
잘라 말했다
다른 테이블로 옮겨 가더니
두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누구보곤지
경주 갈라나? 나 안 갈란다 마
하고 소리쳤다
아마 조지훈보고 건네는 말이 아니었던가 싶다

곽종원은
오늘도 서울역에 나가
우리 쪽이 좌익 네댓명 잡았다고
무용담을 비쳤다
그가 쓰는 평론은 읽은 적이 없으나
네모반듯한 얼굴이 아주 건장해 보였다

미쓰 윤이라는 자칭 시인이
머리를 올 백으로 곱게 빗어 올린 이정호를
사모하는 모양으로 애교를 한창 떨었다
서정태는 윗저고리에
장미꽃 한 송이를 꽂고 좋아했다
과연 문예파들이구나 싶은 감흥이 솟았다

검은 안경테가 유난히 굵어 보이는
조지훈의 턱은 고고하게 긴데
창백한 얼굴의 지식인 시인 이한직이
그와 다정스레 담소했다

촌놈이
다방이 무엇인지 알기나 했으랴
두어 시간 땀을 흘리며
이 사람 저 사람

두루 인사 나누며
된 소리 안된 소리 지껄인 후에
카운터에 가 접대한 분들 커피 값을 계산하니
일금 900원이라
수중에 단돈 100원밖에 없는
이북내기는 참으로 큰일이었다

아리땁게 생긴 마담이
향수냄새를 확 풍기며
다방이 처음이신 모양이지 하고
비웃는 눈치로 살짝 웃었다

창졸지간에 무슨 궁린들 나겠나
겨드랑에 끼고 갔던
책을 꺼내놓으며
이걸 맡기고 내일 돈 갖고 와
찾아가겠노라는 궁색한 사정을 하고
겨우 다방 문을 나섰다
그 책은
보들레르의 호화 양장 "악의 꽃" 시집이었다

내무부 들어가는 골목 "문예빌딩"에서
(박종화 김영랑 모윤숙 유치환
이분들이 하는 시낭송회를 보러 갔다
처음 보기는 했으나
생각하면 태반의 글쟁이들이 월북하고
남은 문인이 얼마 안 되는구나
하니 절로 쓸쓸해졌다
어두워지는 거리에 발을 옮기며
하나 나는 이제 여기서 살아야만 한다
라고 멋없는 한마디 중얼거려 보았다)

이 "남조선"  첫 체험담을  
김기림 선생한테 얘기하니
김군 친구를 아무나 사귀면 안돼요
차차 내가 좋은 친구를 소개할 테니
너무 서둘지 마시오
라고 훈계하였다

- 시집  <느릅나무에게>(창비,  2005)

* 감상 : 김규동 시인. 호는 문곡(文谷).

1925년 2월 함경북도 종성군 행영읍에서 태어났으며, 2011년 9월 28일, 향년 87세로 급성 폐렴과 노환이 겹쳐 작고하였습니다. 1948년 스승 김기림 시인을 찾아 단신 월남하여 교사, 언론인(연합신문 문화부장, 한국일보 문화부장), 출판인(삼중당 주간)으로 활동하였으며 모더니즘 경향의 시를 썼습니다. 함북의 경성고보를 거쳐 연변의대와 평양종합대학(현 김일성대학교) 조선어문학과에서 수학했으며 경성고보 시절 영어교사였던 시인 김기림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당시 경성고보 동문으로 영화감독 신상옥, 시인 이활, 시인 이용악의 동생이었던 이용해, 소설가 김한길의 아버지이며 사회당 당수가 된 김철, 의사 김규천 등과 교류했습니다.

1948년 <예술조선> 신춘문예에 시 ‘강’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951년 피난지인 부산에서 박인환, 김차영, 조향, 이봉래, 김경린 등과 함께 ‘후반기’ 동인을 결성, 새로운 문학시대를 의미하는 시,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닌 우리는 모더니즘이다’를 선언하며 문단의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1955년 <한국일보>에 시 ‘우리는 살리라’와 <조선일보>에 시 ‘포대가 있는 풍경’이 당선되기도 했습니다, 1963년 10월, <영화잡지>를 발간하기도 하였으며, 70, 80년대에는 군사 독재에 저항하는 민주화 운동에 가담한 이후 민주의식에 근거한 리얼리즘과 민족 통일을 지향하는 시를 통해서 재야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스승 김기림 시인의 시가 추상적이고 본질적인 것이었다면, 김규동 시인의 시적 모색은 좀 더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관찰을 통해 분석적으로 다루면서 예리하고 독특한 감성이 짙은 시를 쓰는 특징이 있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집으로는 <나비와 광장>(산호장, 1955), <현대의 신화>(덕연문화사, 1958), <죽음 속의 영웅>(근역서재, 1977), <오늘 밤 기러기 떼는>(동광출판사, 1989), <느릅나무에게>(창비, 2005) 등이 있고, 시선집 <하나의 세상>(자유문학사, 1987), <길은 멀어도>(미래사, 1991) 등이 있습니다. 2011년 시인의 타계 몇 개월 전, 그의 시 432편을 모은 <김규동 시전집>이 창비에서 발간되었습니다. 평론 활동을 병행하여 <새로운 시론>(산호장, 1959), <지성과 고독의 문학>(한일출판사, 1962), <어두운 시대의 마지막 언어>(백미사, 1979) 등의 저술을 냈으며, 산문집 <어머님전 상서>(한길사, 1987), <시인의 빈 손>(소담출판사, 1994)과 만년 병상에서의 구술을 통해 작성된 자전 에세이 <나는 시인이다>(2011)도 발간되었습니다. 1960년 자유문인협회상, 1996년 대한민국은관문화훈장, 2006년 만해문학상, 2011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규동 시인의 시를 읽으면 작고한 문학인, 예술인들의 실명 이름이 자주 등장합니다. 특히 정지용, 박태원, 이태준, 김유정, 채만식 같은 북으로 넘어간 선배 문인들의 이름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이들 시편들을 통해서 작고 시인들의 부음을 거슬러 언급함으로써 그들을 오늘에 되살려 놓으려는 그만의 의도, 즉 ‘부활의 언어’를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잡설 – 박인환’, ‘인사 - 맹문재 씨에게’, ‘정지용의 서울 나들이’ ‘주례사(송건호)’, ‘고무신(박봉우)’, ‘시인은 숨어라(정지용)’, ‘거지 시인이 온다(천상병)’ 등의 시는 직접 실명을 제목으로 한 경우이거나 아니면 시 속에 실명을 넣어 그들을 현재 시점으로 소환해 내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늘 감상하는 시는 시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문인들의 이름도 이름이거니와, 당시 좌우의 극명한 대립 속에서 시인이 ‘모더니즘’을 주창하며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닌 작품을 쓰겠다고 했던 이유까지 어렴풋이 눈치 챌 수 있는 시이기도 합니다. 시의 제목에서 보는 것 같이, 결국 자신을 그런 난처한 상황에서 구해 준 건, 스승의 뒤늦은 조언도 아니고 ‘호화 양장으로 제본된 시인 보들레르의 <악의 꽃> 시집 덕분’이었다는 말이 마치 시적 은유처럼 다가옵니다. 그리고 ‘이 "남조선"  첫 체험담을 / 김기림 선생한테 얘기하니 / 김군 친구를 아무나 사귀면 안돼요 / 차차 내가 좋은 친구를 소개할 테니 / 너무 서둘지 마시오 / 라고 훈계하였다’는 마지막 연의 표현은 왠지 시를 읽고 나서 씁쓸한 여운이 가득 남게 만듭니다.

달 28일이면 그가 이 땅을 떠난 지 벌써 10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그가 떠나는 날에도 오늘처럼 가을비가 내렸습니다. 그를 기리기 위해 장례식장을 찾은 수많은 사람들은 떠나는 그를 아쉬워하면서 그를 일컬어 ‘시대를 배반하지 않은 선비’라고 입을 모아 칭송하였습니다. 실제로 시인은 ‘시대를 배반하지 않는 선비’로 살았습니다. 어릴 땐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아픔을 가슴 깊숙이 새겼고, 청년 땐 한국전쟁과 분단을, 아버지가 되었을 땐 군사독재에 항거하며 민주화운동이란 깃발을 들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는 물질만능주의에 허우적거리는 사람들 모습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그대로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그것을 시로 써냈던 것입니다. 말을 통해 자신을 표현해 내는 시인이 어떻게 삶을 살아내야 하는지 그의 자세와 생각을 살짝 엿볼 수 있는 시 한 편을 더 감상해 보겠습니다. 사라져버린 과거의 수많은 시간들을 그저 회한으로만 기억하는 게 아니라, 그 속에서 가냘픈 존재의 떨림을 느낀다고 노래한 이 시를 읽으면 문득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고 말한 사도 바울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합니다.

존재와 말

                - 김규동  
 
최서해가
상허에게
이형이 냉수맛을 알려면
술이 좀 늘어야 할 텐데 하고
안타까워했다
 
이상은
폐병 말기의 김유정보고
김형이 꼭 한 달만 술을 끊는다면
병이 깨끗이 나을 텐데 하고 한숨지었다
 
6.25전쟁 때
오장환이 서울로 나와
제일 먼저 찾은 건
시인 김광균이었다
숨어 사는 옛 친구에게
그가 내민 것은
탱크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자신의 시집이었다
 
김광균이 한마디 했다
여보게 그건 자네 주머니에 넣어두게
내가 지금 그런 걸 읽을 형편이 못 되네
하고 쓸쓸히 웃었다
 
5.16 군사반란 때
까만 색안경 끼고
시청 앞에 선 박정희 장군을 두고
김수영과 나는 내기를 걸었다
수영은 미8군이 곧 나와
저 사람들을 진압할 것이라 장담하고
나는 미군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라고 점을 쳤다
지는 사람이 술을 사기로 했으나
내기에 진 수영이 종내 술은 사지 않고
박정희만 무서워하다가
먼저 가버렸다
 
사라진 시간 속에서
고개를 치켜드는 건
언제나
가냘픈 존재의 떨림이다.

- 시집, <느릅나무에게>(창비, 2005)

번 주말엔 1박 2일 일정으로 내가 나고 자란 선비의 고장 성주에 내려갈 계획이 있습니다. 나라가 위태롭게 되어 풍전등화와 같은 때 시골의 선비이지만 가만히 앉아만 있지 않고 3대가 ‘의병’으로 창의(倡義)하여 혁혁한 공을 세운 직계 선조들의 이름을 시인처럼 일일이 불러보는 행사가 고향 마을 특설무대에 마련되었기 때문입니다. 의병장 서암 배덕문과 그 삼 형제 아들 경상 좌우수사 서강 배설, 배건, 배즙, 또 배설의 아들 등암 배상룡과 괴재 배상호....모두 ‘시대를 배반하지 않은 선비’들입니다. 이들 자랑스런 나의 할아버지 이름들을 기억하며 ‘부활의 언어’로 소환해 내어 그들의 정신을 기리는 첫 번째 축제여서 기대가 됩니다. 축제 행사를 기획하고 준비하기 위해서 고향 마을에 사는 분들의 각고의 노력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기 위해 타지에 사는 후손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열심히 동참하는 것 밖에는 없다는 심정으로 다녀올 예정입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