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편지
- 곽재구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고통과 쓰라림과 목마름의 정령들은 잠들고
눈시울이 붉어진 인간의 혼들만 깜박이는
아무도 모르는 고요한 그 시각에
아름다움은 새벽의 창을 열고
우리들 가슴의 깊숙한 뜨거움과 만난다
다시 고통하는 법을 익히기 시작해야겠다
이제 밝아 올 아침의 자유로운 새소리를 듣기 위하여
따스한 햇살과 바람과 라일락 꽃향기를 맡기 위하여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를 사랑한다는 한마디
새벽 편지를 쓰기 위하여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희망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 시집, <전장포 아리랑>(민음사, 1985)
* 감상 : 곽재구 시인.
1954년 1월 1일 광주에서 출생하였고, 광주 제일고를 거쳐 전남대학교 국문학과와 숭실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하였습니다.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였습니다. 시집으로 <사평역에서>(창작과비평사, 1983), <전장포 아리랑>(민음사, 1985), <서울 세노야>(문학과지성사, 1990), <참 맑은 물살>(창작과비평사, 1995),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열림원, 1999), <우리가 별과 별 사이를 여행할 때>(이가서, 2011), <와온 바다>(창작과 비평사, 2012), <푸른 용과 강과 착한 물고기들의 노래>(문학동네, 2019), <꽃으로 엮은 방패>(창비, 2021)등이 있고, 기행 산문집으로 <곽재구의 포구기행>(열림원, 2002), <내가 사랑한 사람 내가 사랑한 세상>(한양출판, 1993)이 있습니다. 대학 졸업 후 광주 서석고등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지만 이내 그만두고 전업 작가로 13년을 지내다가 2001년 순천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임용되었고 지난 2021년 2월 정년퇴임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난 8월 18일, 순천시 옥천동에 들어선 창작의 집 '정와(靜窩)'에 곽 시인은 시민 대상 문학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운영자로 선정되어 입주하였습니다. 1992년 제10회 신동엽창작기금을 수혜하여 1995년 시집 <참 맑은 물살>을 펴냈으며, 동서문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시 ‘사평역에서’로 유명해 진 곽재구 시인의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그의 유년 시절로 한번 거슬러 올라가 볼 이유가 있는 듯합니다. 관계가 좋지 않았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주 아들이 보는 앞에서 싸움을 했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격렬한 부부 싸움 끝에 위험한 고비에 처한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부엌에 놓여 있는 삽으로 아버지의 등을 내리쳤습니다. 그리고 그 싸움은 영원히 끝났습니다. 가정은 깨졌고, 얼마 뒤 그는 먼 친척집으로 보내졌으며 그 이후 학교에 다니는 대신 그 집의 꼴머슴으로 소도 먹이고 똥 장군도 져야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유년의 추억은 이렇듯 외로움과 그리움, 그리고 절박감이 깃든 가난한 풍경으로 마감이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한 번도 포근한 가정과 따뜻한 공간에서 새로운 아침을 맞는 순간을 갖지 못했습니다. 이 집 저 집 떠돌며 버럭 잠을 잔 뒤 아침에 집을 나서서 치열하게 삶의 현장에서 버텨내야 하는 삶이 그의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였고, 이러한 상황은 정처없이 길 위에서 쓴 그의 기행문들이 많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행이라고 하면 다행인 것은 이런 절박한 처지에서 그에게 운명처럼 다가온 ‘시’가 삶의 희망이었고 유일한 위로와 치유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고교 동창인 나해철 시인의 집에서 한 동안 그의 부모님의 보살핌 속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습니다. 심한 결핵을 앓고 있던 나해철은 끔찍이도 친구 곽 시인을 챙겨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때 받은 친구와 그 부모의 사랑은 시인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다가온 시를 어떻게 써야 할지를 생각하게 했다고 합니다. 제 집에서 따뜻하게 잠을 잔 뒤 맞이하는 아침 햇살과 떠돌이 잠을 잔 뒤 마주치는 아침 햇살은 눈부심의 정도가 다르듯이 그는 그의 팔과 어깨와 이마 위에 쏟아지는 아침 햇살을 보며 앞으로 자신이 써 내야 할 시들이 얼마나 따스하고 또 눈부셔야 하는지를 다짐했던 것입니다. 또 밤이 되면 초롱초롱 빛나는 별들을 보며 그는 하염없이 길을 걸었는데 그 때마다 그는 앞으로 자신이 써야 할 시들이 얼마나 영롱한 눈망울을 지녀야 하는지, 또 얼마나 많은 이야기와 신비한 꿈을 지녀야 하는지를 생각했습니다.
눈시울이 붉어진 채 새벽을 맞는 시인은 늘 일어나자마자 하는 일이 ‘새벽 편지’를 쓰는 일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시인에게 있어 새벽 편지를 쓰는 일은 따뜻한 ‘시’를 쓰는 일과 다름없었다는 말입니다. 시인은 ‘이제 밝아 올 아침의 자유로운 새소리를 듣기 위하여/ 따스한 햇살과 바람과 라일락 꽃향기를 맡기 위하여 /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를 사랑한다는 한마디’가 담긴 가슴 뜨거운 ‘새벽 편지를 쓰기 위하여’ ‘다시 고통하는 법을 만나야겠다’고 역설적인 표현도 스슴치 않습니다. 아마도 이 표현은, 그런 편지를 자신이 써야겠다는 다짐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그렇게 떠나가버린 어머니가 언젠가는 포근하게 ‘사랑한다’고 말해주며 안아주는 그런 새벽을 맞고 싶은 간절한 꿈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 시는 ‘새벽에 깨어나 /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희망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는 표현을 시의 제일 앞과 뒤에 배치하는 수미상관법(首尾相關法)을 적용하여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줌과 동시에 시인이 말하고 싶은 내용을 강조하며 담아내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시인에게 별빛, 특히 새벽에 바라보는 별은 특별한 시적 은유를 지니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곁에서 함께 잠들었던 그곳에서 바라보는 별이 아닌, 항상 낯 선 곳, 외롭고 고독한 잠자리에서 깨어나 바라보는 별 빛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고통과 쓰라림과 목마름의 정령들은 잠들고’ 희망의 샘이 출렁이고 있는 새벽을 간절히 소망하면서 이 구절을 노래했을 것입니다. 시인이 새벽에 써 내려갈 새벽 편지의 내용은 아마도, 여기 소개하는 또 다른 그의 시, ‘그 길 위에서’ 노래하고 있는 내용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시는 그의 유년 시절 그리움의 추억들이 사랑의 아름다운 새벽 편지로 승화되어 읽는 독자들에게 애절한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그 길 위에서
- 곽재구
산을 만나면 산을 사랑하고
강을 만나면 강을 사랑하지.
꽃이 많이 핀 아침을 만나면
꽃향기 속에서 너에게 편지를 쓰지.
언덕에선 노란 씀바귀 꽃 하모니카를 불고
실눈썹을 한 낮달 하나 강물 속 오래된 길을 걷지.
별을 만나면 별을 깊게 사랑하고
슬픔을 만나면 슬픔을 깊게 사랑하지.
그러다가
하늘의 큰 나루터에 이르면
작은 나룻배의 주인이 된
내 어린 날의 바람을 만나기도 하지.
아침마다 새벽 묵상 글을 써 온 지 다음 주 9월 5일이면 벌써 만 3년이 되었습니다. ‘1분 묵상’을 위한 짧은 글이지만 이 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누군가가 ‘이 세상 깊은 어디에’ 있다는 사실은 ‘마르지 않는 희망의 샘’이 되어 나로 하여금 새로운 에너지가 넘치게 했음을 이 시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늘의 큰 나루터에 이르면/ 작은 나룻배의 주인이 된/ 내 어린 날의 바람을 만나기도 하지’라고 노래했던 시인처럼, 내가 쓴 묵상 편지 속의 기도가 주렁주렁 탐스런 열매로 영글어 있는 것을 어느 날 하늘의 큰 나루터에 이르면 만나게 될 것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그 날까지 ‘산을 만나면 산을 사랑하고/ 강을 만나면 강을 사랑하지. / 꽃이 많이 핀 아침을 만나면/ 꽃향기 속에서' 새벽마다 편지 쓰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을 스스로 다시 한번 다짐해 봅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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