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나팔꽃 / 당신과 살던 집 - 권대웅

석전碩田,제임스 2024. 5. 22. 06:00

나팔꽃

 

- 권대웅

 

문간방에 세 들어 살던 젊은 부부

단칸방이어도 신혼이면

날마다 동방화촉(洞房華燭)인 것을

그 환한 꽃방에서

부지런히

문 열어주고 배웅하며 드나들더니

어느새 문간방 반쯤 열려진 창문으로

갓 낳은 아이

야물딱지게 맺힌 까만 눈동자

똘망똘망 생겼어라

여름이 끝나갈 무렵

돈 모아 이사 나가고 싶었던 골목집

어머니 아버지가 살던

저 나팔꽃 방 속

 

- 시집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문학동네, 2017)

 

* 감상 : 권대웅 시인.

1962년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서 시 ‘양수리에서’가 당선, 등단하였습니다. 시집으로 <당나귀의 꿈>(민음사, 1993), <조금 쓸쓸했던 생의 한 때>(문학동네, 2003),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문학동네, 2017)가 있고, 산문집 <당신이 사는 달>(김영사ON, 2014), <그리운 것은 모두 달에 있다>(예담, 2015), 장편동화 <돼지 저금통 속의 부처님>(국민서관, 1997), <마리이야기>(이레, 2002) 등이 있습니다.

 

을 소재로 달 시를 쓰는 시인으로, 그리고 달 그림과 함께 시화전을 여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때 가난한 달동네에서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냈습니다. 언덕을 꼬불꼬불 올라 산동네 꼭대기에 자리한 가난한 '달동네'의 고단한 삶의 기억은 대부분 숨기거나 지우고 싶은 과거이지만 달 사랑에 푹 빠진 시인에겐 '달동네'의 추억도 달빛처럼 고운 빛깔일 뿐입니다.

 

레 출판사에서 편집주간으로 오랫동안 근무할 때 류시화의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법정 스님의 <오두막 편지>, 소로우의 <월든> 등을 펴냈습니다. 광고 카피라이터, 불교방송국의 작가 등으로 잠시 외도(?)를 했지만 결국 마흔 중반에 독립, 도서 출판 <마음의 숲> 대표가 되어 자연과 영성, 그리고 문학을 지향하는 내용의 책들, 말하자면 시인 자신을 닮은 책들을 발간하고 있습니다.

 

늘 감상하는 시 ‘나팔꽃’은 달동네 골목집 문간방에서 살던 젊은 부부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젊은 부부의 이야기가 그저 제삼자의 신혼집 단칸방 이야기가 아니라, 실상은 나팔꽃을 보며 유년 시절을 보냈던 시인 자신이 살았던 문간방의 추억을 소환하여, 그곳에서 신혼 방을 꾸려 자신을 낳았던 어머니 아버지를 떠올린 시라고 이해하면 더 정감있게 다가오는 시입니다. 시인도 그 효과를 노려 시의 말미(末尾)에 ‘어머니 아버지가 살던 / 저 나팔꽃 방’이라는 시어를 친절하게 배치(配置)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록 단칸방이지만 ‘날마다 동방화촉인 것을 / 그 환한 꽃방에서 / 부지런히 / 문을 열어주고 배웅하며 드나들’던 부부는 어느 날 갓 낳은 아이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야물딱지게 맺힌 까만 눈동자’에 ‘똘망똘망’하게 생겼습니다. 이제 그 단칸방이 비좁아진 가족은 나팔꽃이 지고, 까만 열매를 맺히는 여름이 끝나갈 무렵, 돈을 모아 이사 나가고 싶었다고 시의 화자는 그때 그 당시를 살았던 아버지 어머니의 꿈을 대변해 주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단칸방이 ‘어머니 아버지가 살던’, 그리고 시인 자신이 살았던, 아름다운 아련한 추억이 있는 ‘나팔꽃 방’이기 때문입니다.

 

‘문간방’ ‘단칸방’ ‘젊은 부부’ ‘신혼’ ‘동방화촉’ ‘환한 꽃방’이라는 시어들은 시인의 기억 속에 있는 행복을 소환해 내는 특별한 느낌이 있는 단어들임에 분명합니다. 아마도 시인은 여름 끝에 피는 나팔꽃만 보면 그 골목집 ‘단칸방’이 생각났던 모양입니다.

 

은 시집에 수록된 시로, 그 골목에 있던 바로 그 집을 묘사함 직한 시 한 편을 더 읽어보겠습니다. 여름날, 줄기를 타고 올라가서 보라색 나팔꽃을 올망졸망 피우고 있는 모습을 보기만 하면 ‘순간, 불현듯, 화들짝’ 생각나는 그 집 말입니다.

 

당신과 살던 집

 

- 권대웅

 

길모퉁이를 돌아서려고 하는 순간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지려고 하는 순간

햇빛에 꽃잎이 열리려고 하는 순간

기억날 때가 있다

 

어딘가 두고 온 생이 있다는 것

하늘 언덕에 쪼그리고 앉아

당신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어떡하지 그만 깜빡 잊고

여기서 이렇게 올망졸망

나팔꽃 씨앗 같은 아이들 낳아버렸는데

갈 수 없는 당신 집 불쑥 생각날 때가 있다

 

햇빛에 눈부셔 자꾸만 눈물이 날 때

갑자기 뒤돌아보고 싶어질 때

노을이 붕붕 울어댈 때

순간, 불현듯, 화들짝,

지금 이생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기억과 공간의 갈피가 접혔다 펴지는 순간

그 속에 살던 썰물 같은 당신의 숨소리가

나를 끌어당기는 순간

 

- 시집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문학동네, 2017)

 

난주 월요일, 우리 가정에도 야물딱지게 맺힌 나팔꽃 씨 같은 까만 눈동자를 가진, 똘망똘망하게 생긴 손녀가 드디어 태어났습니다. 아들 내외가 심혈을 기울여 이름을 ‘수빈(秀彬)’으로 정하고 사흘 뒤 출생신고까지 마쳤다고 합니다. 권대웅 시인의 ‘나팔꽃’ 시를 읽는 순간, 수빈이가 태어난 기쁜 소식을 이 시와 함께 나누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도, 지금 막 피기 시작한 올해 나팔꽃 때문일 것입니다.

 

디, 새로 태어난 수빈이가 시인이 가졌던 그런 행복한 나팔꽃 추억들처럼, ‘환한 나팔꽃 방’에서 무럭무럭 성장해 가며 좋은 추억들을 만들어 가길 응원합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