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목계장터 / 나목(裸木) - 신경림

석전碩田,제임스 2024. 6. 5. 06:00

목계장터 *

 

- 신경림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려

민물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 註 - 목계장터 : 1910년대까지 중부 지방의 각종 산물의 집산지로, 남한강안(南漢江岸)의 수많은 나루터 중 가장 번창했으나, 1921년 일제의 식민지 수탈 정책의 일환으로 충북선이 부설되자 그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 註 - 박가분(朴哥粉) : 1920~30년대 박승직이 만들어 판매한 우리나라 최초의 공산품 화장품, 두산그룹의 모태

 

- 시집 <새재> (창비시선 18, 1979)

 

* 감상 : 신경림 시인, 평론가, 교수.

1936년 4월, 충북 충주 노은면 연하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충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습니다. 동국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1956년 <문학예술>에 ‘갈대’, ‘낮달’, ‘석상’ 등의 시를 발표함으로써 등단하였습니다.

 

때 건강이 나빠져서 대학 졸업 후 고향에 내려와 낙향 후 별다른 대안이 없어 선택은 오직 하나, 먹고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막 일을 해야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농사며 광산 일, 등짐장수, 학원 강사, 공사판 일 등 안 해본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무릎까지 차오르는 눈길 백 리를 걸으며 장사꾼들 길 안내하는 일을 하기도 했고, 댐 공사판에서 밀차에 흙을 실어 나르는 일을 하기도 했는데 열 번을 실어 날라야 점심 한 그릇 값을 받을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일이 끝나고 주막에 들러 장화를 벗으면 발은 늘 벌겋게 부어있었습니다. 이때 경험했던 가난은 그가 평생 시인으로서 1970년대 한국 민중문학의 새 지평을 열고 오랜 시간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삶을 오롯이 살아낼 수 있도록 삶의 좌표를 잡을 수 있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그의 시의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에게 다시는 시를 쓸 기회가 영영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시간이 계속될 1965년, 동료이자 절친인 시인 김관식의 손에 이끌려 무작정 서울로 다시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그는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1973년 첫 시집 <농무(農舞)>를 내면서 활발한 시작(詩作)을 하였고, 시 해설서인 <신경림의 시를 찾아서> 등을 통해서 한국 현대 시를 대표하는 시인들을 심층적으로 소개하는 작업을 여러 해에 걸쳐 시도했습니다.

 

1981년 동국대학교 석좌교수로 부임하여 대학에서 후학들을 가르쳤으며, 2024년 5월 22일, 암 투병 끝에 일산 국립암센터에서 향년 88세로 별세하였습니다.

 

집으로 <농무(農舞)>(창비, 1973), <새재>(창비, 1979), <달넘세>(창비, 1985), <남한강>(창비, 1987), <가난한 사랑노래>(실천문학사, 1988), <길>(창비, 1990), <쓰러진 자의 꿈>(창비, 1993),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창비, 1998), <뿔>(창비, 2002), <신경림 시전집>(창비, 2004), <낙타>(창비, 2008), <사진관집 이층>(창비, 2014) 등이 있습니다. 산문집으로 <바람의 풍경>(문이당, 2000), <민요기행 1, 2>, <강따라 아리랑 찾아>,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1, 2>(우리교육, 1998, 2002) 등이 있습니다. 특히, 그의 책 <시인을 찾아서>는 제1권에는 이미 작고한 시인, 제2권은 당시 생존해 있던 시인을 찾아 인터뷰하고 취재한 글과 그들의 시를 소개하는 글들로 채워져 있는데, 한 방송사에 실시한 조사에서 가장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은 도서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지난 주 수요일, 신경림 시인이 별세했을 때 모든 언론은 일제히 그의 죽음을 알리면서 다양한 수식어들을 쏟아냈습니다.

 

‘농무’ ‘가난한 사랑노래’ 쓴 대표 민중 시인 신경림 별세(연합뉴스), ‘시로 민중 어루만진 신경림 시인 잠들다’(경향신문), ‘농무’ 신경림 시인 별세...민중 시로 우리의 마음 울리고(한겨례신문), ‘가난한 사랑노래’ 신경림 시인 별세...향년 88세(세계일보), ‘한국 문단의 거목 신경림 시인, 잠들다’(MSN), ‘가난하다고 사랑을 모르겠는가’ 하늘로 떠난 민중 시인 신경림(동아일보), “이쯤에서 돌아갈까 보다...” ‘민중 시의 거목’ 신경림 시인 별세(한국일보), ‘가난한 사랑노래’ ‘농무’ 원로 시인 신경림 별세(조선일보)

 

를 소개하는 언론의 표현들은 대개 그를 ‘민중 시인으로서 그가 가난한 사람들을 어루만진 한국 문단의 거목’이라는 사실, 그리고 대표 시가 ‘농무’와 ‘가난한 사랑 노래’라는 사실에 일치하는 듯합니다.

 

1973년 출간된 그의 첫 시집에 실린 ‘농무(農舞)’ ‘파장(罷場)’ 등의 시는 당시 소외된 농촌의 열악한 현실과 가난한 농민들의 삶의 애환을 현장에서 체험했던 가난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문단은 물론 사회에도 큰 파란을 일으켰을 정도였습니다. 이 시집으로 그는 이듬해 제1회 만해 문학상(1974년)을 수상했는데, 당시 경쟁작으로는 박경리의 장편 소설 <토지>(문학사상사, 1973), 황석영의 단편 소설 <삼포 가는 길>(신동아, 1973) 등이었습니다. 첫 시집을 낼 때 어떤 출판사도 내주겠다는 곳이 없어 자비로 출간했던 시집 <농무>는 문학상 수상 이후 창작과 비평사에서 재 출간, 지금까지 10만 부 이상이 팔려나갈 정도로 그의 대표 베스트셀러 시집이 되었습니다.

 

해 문학상(1974), 단재문학상, 대산문학상, 호암상(예술 부문), 4.19 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민족예술인 총연합의장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가 신경림 시인을 처음 알게 된 것은 그의 책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제1권으로 기억이 됩니다. 나이가 마흔 살이 막 되던 2000년대 초였을 것입니다. 그저 시 한 편만 달랑 소개하면서 그 시에 밑줄을 그어가면서 분석하고 이해하던 입시 위주의 시 교육을 받아온 저에게, 그의 책은 적지 않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관심도 없었던 시인의 삶 이면을 깊이 들여다보면서, 우리가 알고 있던 유명한 시가 시인의 삶과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또 왜 그런 시가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를 ‘심층 취재하여 써 내려간 책의 내용’에 반해버렸던 것이지요. 한 편의 시를 제대로 감상하는 즐거움, 그리고 한 시인을 심층적으로 알아가는 재미가 너무도 쏠쏠했던 그때의 그 좋은 기억은 그 이후 저로 하여금 서점에 가면 시집 코너 앞을 서성이게 만든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요즘 제가 ‘아침에 읽는 한 편의 시’를 통해 시 감상문을 쓰는 것도, 이 책의 영향을 받아 장황하게 시인의 이력과 경력을 소개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을 쓰기 위해서, 그 당시에 구입했던 바로 그 책을 서가에서 꺼내 ‘여는 글’을 읽으니, 시인이 차분하게 써 내려간 이런 대목이 새삼 뚜렷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땅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좋은 시를 소개하고 싶은 시인으로서의 사명감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전략) 좋은 시와 나쁜 시는 분명히 구별이 있고, 기왕에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좋은 시를 찾아 읽을 수 있다면 얼마나 더 즐겁게 읽을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에서, 나는 몇 차례 독자가 시에 쉽게 다가갈 수 있는 해설서 비슷한 글을 썼었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은 어떤 면에서 감정의 확대라 할 수 있는 시를 가장 잘 이해하려면 그 시인이 어떤 환경에서 자랐고, 어떤 조건 아래서 살았으며, 그 시를 쓸 당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모은 글들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이미 우리 시사(詩史)에서 고전이 된 시들의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쓴 글이다.’(<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우리교육, 1998) 여는 글 중에서)

 

늘 감상하는 ‘목계장터’는 이미 우리에게서 사라져 가버린 것을 소환해 내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덧없음을, 그러나 그 덧없는 인생 속에서 바람처럼, 구름처럼 ‘민물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에서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겠노라 다짐하는 시입니다. 목계장터, 박가분. 이런 것들은 모두 한국 우리 사회가 근대화되기 전 그야말로 번창했던 장소였고 또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상품을 대변하는 용어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도 결국 세월이 흘러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간 존재입니다.

 

만히 자신을 돌아보면, ‘나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시인은 생각한 듯합니다. 한때 이름 날리는 유명한 시인이 되겠다고 욕심부리며 동분서주 뛴 적도 있었지만, 한순간 훅하고 떠나고 나면 그만. 그래서 시인은 그저 구름이 되고 바람이 되라고 하는 자연(신)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살겠노라 노래하고 있습니다. 바람도 거대한 태풍이 아니라 그저 ‘잔바람’이라고 표현하였고, ‘들꽃’, 고물을 갖고 오면 엿으로 바꿔줬던 ‘방물장수’, ‘떠돌이’, ‘잔돌’ 등 그저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찮은 존재로 살고 싶다는 시인의 목소리가 아련합니다.

 

경림 시인을 소개하면서 많은 언론 매체들은 ‘농무’나 ‘가난한 사랑 노래’를 언급했지만, 저 개인적으로 큰 감명을 받고 또 아직도 선명하게 그 ‘시적 은유’를 기억하고 있는 시는 ‘나목(裸木)’이라는 그의 시입니다. 특히, 마지막 부분, ‘알고 있을까 그들 때로 서로 부둥켜 안고 / 온몸을 떨며 깊은 울음을 터뜨릴 때 / 멀리서 같이 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이라는 시어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한겨울, 앙상한 가지로 추운 들판에 두 팔을 하늘로 향해 벌리고 서 있는 나무들을 보면, 낮게 읊조리곤 하는 그의 시입니다.

 

나목 裸木

 

- 신경림

 

나무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서서

하늘을 향해 길게 팔을 내뻗고 있다

밤이면 메마른 손끝에 아름다운 별빛을 받아

드러낸 몸통에서 흙 속에 박은 뿌리까지

그것으로 말끔히 씻어내려는 것이겠지

터진 살갗에 새겨진 고달픈 삶이나

뒤틀린 허리에 배인 구질구질한 나날이야

부끄러울 것도 숨길 것도 없어

한밤에 내려 몸을 덮는 눈 따위

흔들어 시원스레 털어 다시 알몸이 되겠지만

알고 있을까 그들 때로 서로 부둥켜 안고

온몸을 떨며 깊은 울음을 터뜨릴 때

멀리서 같이 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 시집 <쓰러진 자의 꿈>(창비, 1993)

 

5월 24일 금요일 저녁, 서울대학교 병원 장례식장에서 치르진 영결식은 그의 작품과 그가 한국 현대 시와 문단에서 차지하는 높은 위상을 고려하여 한국문인협회, 한국시인협회, 한국소설가협회, 한국평론가협회 등 주요 문인 단체들이 함께하는 ‘대한민국 문인장’으로 치러졌습니다. 그날 이근배 시인이 낭송한 조시처럼, 그의 시와 그의 시 정신이 ‘한 시대를 들어 올린 가난한 사랑 노래가 되어 길이길이 온 누리에 펼쳐지길’ 소원합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