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감자꽃을 따다 - 손택수

석전碩田,제임스 2024. 6. 19. 06:00

감자꽃을 따다

 

- 손택수

 

주말농장 밭고랑에 서 있던 동업자

장철문형이 감자꽃을 딴다

철문형, 감자꽃 이쁜데 왜 따우

내 묻는 말에

이놈아 사람이나 감자나

너무 오래 꽃을 피우면

알이 튼실하지 않은 법이여

꽃에 신경 쓰느라

감자알이 굵어지지 않는단 말이다

평소에 사형으로 모시는 형의 말씀을 따라

나도 감자꽃을 딴다

꽃 핀 마음 뚜욱 뚝 끊어낸다

꽃 시절 한창인 나이에 일찍 어미가 된 내 어머니도

눈 질끈 감고 아까운 꽃 다 꺾어냈으리라

조카 애가 생기고 나선 누이도

화장품값 옷값을 말없이 줄여갔으리라

토실토실 잘 익은 딸애들 등에 업고

형이 감자꽃을 딴다

딸이 생기고 나선 그 좋은 담배도 끊고

술도 잘 마시질 않는다는 독종

꽃핀 마음 뚜욱 뚝 분지르며

한 소쿠리 알감자 품에 안을 날을 기다린다

 

-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2006년 9~10월호)

- 시집 <나무의 수사학>(실천문학사, 2010)

 

* 감상 : 손택수 시인.

1970년 전남 담양 강쟁리에서 출생하였고 어린 시절 부산으로 건너와 부산에서 초.중.고교, 그리고 경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부산대 대학원을 졸업하였습니다.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서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고 국제신문 신춘문예에도 당선되었습니다. 시집으로 <호랑이 발자국>(창작과비평, 2003), <목련 전차>(창비, 2006), <나무의 수사학>(실천문학사, 2010), <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창비, 2014), <나의 첫 소년>(창비교육, 2017), <붉은빛이 여전합니까>(창비, 2020), <어떤 슬픔은 함께 할 수 없다>(문학동네, 2022) 등이 있습니다.

 

주문학상 대상(2001), 현대시 동인상(2003), 신동엽창작상(2004), 육사 시문학상 신인상(2005), 애지문학상(2005), 이수 문학상(2007),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2007), 임화문학예술상, 노작 문학상(2013), 문학과 의식 문학상(2018), 조태일 문학상(2020), 오장환 문학상(2023) 등을 수상했습니다. 2018년 7월부터 경기도 화성시 노작로 206에 자리 잡은 [노작 홍사용 문학관]의 관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아오는 일요일, 행주산성 텃밭에서 매년 그랬듯이 가족들이 모여 감자를 캐기로 했으니 꼭 오라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해마다 감자 캐는 날이면 잊지 않고 초청해 주는 조카 덕분에 도회지에 살면서도 유년 시절 농촌에서 겪었던 아름다운 추억들을 소환해 낼 수 있어 얼마나 행복한지요. 초청을 받은 날부터 마치 소풍 가는 날처럼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감자꽃과 관련된 시를 함께 감상해 보려고 합니다.

 

택수 시인의 시는 3년 전 ‘냉이꽃’과 ‘냉이꽃 한 송이 때문에’ 등 두 편을 감상했던 기억이 납니다.(https://jamesbae50.tistory.com/13411090) 냉이꽃이 지고 난 후 맺히는 하트 모양의 열매를 노래한 그의 시를 읽고 난 이후, 냉이꽃을 만나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꼭 ‘하트 모양’의 열매를 확인하기도 하고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하트 모양을 보여주는 ‘이상한 버릇’이 생겼을 정도로 그의 시는 제게 큰 울림이 있었지요.

 

늘 감상하는 시는 동업자인 ‘장철문’이라는 사형(師兄)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철문형과 시적 화자가 나눈 살가운 대화를 먼저 슬쩍 던지며 시작하고 있습니다.

 

‘철문형, 감자꽃 이쁜데 왜 따우 / 내 묻는 말에 / 이놈아 사람이나 감자나 / 너무 오래 꽃을 피우면 / 알이 튼실하지 않은 법이여 / 꽃에 신경 쓰느라 / 감자알이 굵어지지 않는단 말이다’

 

의 전반부이면서 제1연에 해당하는 이 대화를 읽으면서, 감자꽃을 왜 따줘야 하는지에 대해서 그동안 몰랐던 사람이라면 어김없이 철문형의 욕이 섞인 꾸지람을 고스란히 함께 듣는 처지가 되는 것도 참 희한한 발상입니다. 사실, 시골 출신인 저도 이 시를 읽기 전까지는 감자꽃을 따줘야 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주말농장’을 동업하는 사람인데도 감자꽃을 따야 한다는 사실을 시인도 몰랐다는 사실에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고나 할까요. 시인은 그 감자 밭고랑에서 있었던 짧은 대화 – 감자꽃은 피는 즉시 따줘야 하며, 또 왜 그것이 필요한지에 대한 설명 - 를 하고 난 후 어머니와 누이, 그리고 형의 삶까지 줄줄이 소환하여 한 편의 시를 길어 올렸으니 대단한 ‘시적(詩的) 통찰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러고 보니 일찍 시집와서 자식들을 낳은 어머니는 당신의 청춘을 다 바쳐 자식들을 키워냈습니다. 조카 애를 낳은 시인의 누이 역시 자신을 가꾸기 위해서 화장품값을 아껴 조카들을 키워냈습니다. ‘독종’이라는 이야길 들어가면서도 딸을 위해 담배를 끊고 술을 줄인 형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꽃을 따야 하는 이유를 알게 된 시인은 젊은 시절 홀로된 어머니의 처지를 이해하게 되었고, 누이와 형이 살아온 삶의 모습을 속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자식들을 위해 개인의 욕망을 포기한 것 말입니다. 그리고 시인은 그것을 ‘꽃 핀 마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뚜욱 뚝 끊어’내고 ‘분지르며’ 튼실한 알감자 한 소쿠리 품에 안을 날만 기대하며 그들은 개인적인 ‘꽃 핀 마음’을 끊어냈다고 시인은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래서일까, 감자꽃만 보면 서럽고 슬픈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지 감자꽃의 이미지를 ‘불임의 여자’로 비유하여 노래한 시인도 있는가 하면, 감자를 뜻하는 제주도 방언 ‘지슬’이라는 제목으로 독립 영화를 만들어 ‘당신과 나의 뜨거운 감자’라는 부제를 달아 제주 4.3 사건을 처음 세상에 이야기했던 영화감독도 있습니다. 그만큼 감자와 감자꽃의 시적 이미지는 특별한 것이 분명합니다.

 

는 감자꽃 피는 이 계절이 다가오면 소 먹이러 다니던 어린 시절이 가장 먼저 떠오르곤 합니다. 멀리서 뻐꾸기 소리 들려 오고 산들바람에 찔레꽃 향기가 실려 오는 이맘때쯤의 유년 시절 제 삶이 가장 평화로운 계절이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리움’이라는 서정과 버무려 노래한 도종환 시인의 ‘유월이 오면’이라는 시에서도 ‘감자꽃’이라는 ‘시적 이미지’는 유감없이 그 역할이 빛나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유월이 오면

 

- 도종환

 

아무도 오지 않는 산속에

바람과 뻐꾸기만 웁니다

바람과 뻐꾸기 소리로 감자꽃만 피어납니다

이곳에 오면 수만 마디의 말들은 모두 사라지고

사랑한다는 오직 그 한마디만

깃발처럼 나를 흔듭니다

 

세상에 서로 헤어져 사는 많은 이들이 있지만

정녕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이별이 아니라 그리움입니다

 

남북 산천을 따라 밀 이삭 마늘 잎새를 말리며

흔들릴 때마다 하나씩 되살아나는

바람의 그리움입니다

 

당신을 두고 나 혼자 누리는 기쁨과 즐거움은

모두 쓸데없는 일입니다

떠오르는 아침 햇살도 혼자 보고 있으면

사위는 저녁노을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 사는 동안 온갖 다 이룩된다 해도

그것은 반쪼가리일 뿐입니다

 

살아가며 내가 받는 웃음과 느꺼움도

가슴 반쪽은 늘 비워둔 반평생의 것일 뿐입니다

그 반쪽은 늘 당신의 몫입니다

 

빗줄기를 보내 감자순을 아름다운 꽃으로 닦아내는

그리운 당신 눈물의 몫입니다

 

당신을 다시 만나지 않고는

내 삶은 완성되어지지 않습니다

당신을 다시 만나야 합니다

살아서든 죽어서든 꼭 다시 당신을 만나야만 합니다.

 

- 시집 <접시꽃 당신>(실천문학, 2005)

 

인이 해마다 감자꽃 피는 유월이 오면, ‘바람과 뻐꾸기 소리로 감자꽃’을 피워낸 것과 같은 그런 사랑을 하지 못하고 먼저 보낸 ‘당신’을 그리워하게 된다는 시입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감자꽃의 시적 이미지는 ‘꽃 핀 마음’이 뚜욱 뚝 분질러진, ‘눈 질끈 감고 아까운 꽃 다 꺾’여진 꽃입니다. 시인은 그런 슬픈 이미지의 감자꽃과 ‘빗줄기를 보내 아름다운 꽃으로 닦아내는 / 그리운 당신 몫의 눈물’과 동일시하며 그리움을 절절히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번 주 일요일 감자 캐는 시간이 더욱 기다려집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