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냉이 꽃 / 냉이 꽃 한 송이 때문에 - 손택수

석전碩田,제임스 2021. 5. 5. 05:42

냉이 꽃

 

- 손택수

냉이 꽃 뒤엔 냉이 열매가 보인다
작은 하트 모양이다 이걸 쉰 해 만에 알다니
봄날 냉이무침이나 냉잇국만 먹을 줄 알던 나,
잘 익은 열매 속 씨앗은 흔들면 간지러운 옹알이가 들려온다
어딜 그렇게 쏘다니다 이 제사 돌아왔니
아기와 어머니가 눈을 맞추듯이
서로 보는 일 하나로 가지 못할 곳이 없는 봄날
쉰내 나는 쉰에도 여지는 있다
나는 훗날 냉이보다 더 낮아져서,
냉이뿌리 아래로 내려가서
키 작은 냉이를 무등이라도 태우듯
들어 올릴 수 있을까

그때, 봄은 오고 또 와도 새
봄이겠다

- 시집, <붉은빛이 여전 합니까>(창비, 2020)

* 감상 : 손택수 시인.

 1970년 전남 담양 강쟁리에서 출생하였고 어린 시절 부산으로 건너와 부산에서 초.중.고교, 그리고 경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부산대 대학원을 졸업하였습니다.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서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고 국제신문 신춘문예에도 당선되었습니다. 시집으로 <호랑이 발자국>(창작과비평, 2003), <목련 전차>(창비, 2006), <나무의 수사학>(실천문학사, 2010), <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창비, 2014), <나의 첫 소년>(창비교육, 2017), <붉은 빛이 여전 합니까>(창비, 2020) 등이 있습니다. 수주문학상 대상(2001), 현대시동인상(2003), 신동엽창작상(2004), 육사시문학상 신인상(2005), 애지문학상(2005), 이수문학상(2007),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2007), 임화문학예술상, 노작문학상(2013), 문학과의식 문학상(2018), 조태일문학상(2020) 등을 수상했습니다. 2018년 7월부터 경기도 화성 노작홍사용문학관 관장을 맡고 있습니다.

의 여러 시집에 실린 저자 소개란을 보면 손택수 시인을 ‘지독한 향수병을 앓은, 서정이 풍부한 시인’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전남 담양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 부산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탓인지 그의 시에는 유난히 가족과 고향에 대한 향수를 노래한 시가 참 많습니다. 콧속으로 들어오는 영산강 강물의 비릿하고 맵고 찡한 느낌을 잊지 않기 위해 세숫대야에 코를 박고 있는 아들을 보다 못한 부모님이 혼자서 귀향하는 걸 허락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고향으로 돌아오긴 하였으나 떠나온 가족 생각에 또 눈물지어야 했던 시인의 표현대로 그는 뭔가를 그리워하는 ‘서러운 짐승’이었습니다. 영산강에서 멱을 감고 놀다 두 번 죽을 뻔하고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습니다. 마라토너가 되고 싶어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항구의 골목길을 뛰어다니다가 이번에는 그만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그 후유증으로 지금도 왼쪽 다리와 오른쪽 다리의 길이가 0.8센티미터쯤 차이가 나 그 이후로 줄곧 기우뚱거리고 있습니다. 별[辰]과 노래[曲]가 하나가 된 농(農)을 업으로 삼고 싶었지만 그 꿈은 좌절되었고 ‘그만 시를 쓰게 되었다고 자신을 소개하는 시인. 그래서인지 유년 시절의 실향과 실패와 실연이 자양분이 된 시들을 통해서 그를 만날 수 있습니다.

늘 감상하는 시 ‘냉이 꽃’은 그가 유년 시절부터 늘 봐 왔던 바로 그 냉이 꽃이었지만, 쉰 살이 되기까지 보지 못했던 걸 이제야 보고 듣게 된 것을, 특유의 재기 넘치는 시적 감각으로 노래한 시입니다. 그저 냉이는 봄이 되면 캐 먹는 봄채소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냉이꽃이 지고 난 후 그 속에서 아기와 엄마가 눈을 맞추듯 씨앗들의 옹알이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으니 참으로 큰 깨달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딜 그렇게 쏘다니다 이제사 돌아왔니’라는 표현 한 마디에, 자신이 그동안 엉뚱한 곳에서 방황하다가 이제야 시업(詩業)의 길에 제대로 들어섰다는 은유도 슬쩍 엿볼 수 있는 시입니다. ‘쉰내 나는 쉰에도 여지는 있다/ 나는 훗날 냉이보다 더 낮아져서,/ 냉이뿌리 아래로 내려가서/ 키 작은 냉이를 무등이라도 태우듯/ 들어올릴 수 있을까’라는 표현을 읽으면 앞으로 시인이 어떤 자세로 시를 써 내려가는 시인이 되겠다는 다짐인 듯 읽혀지기도 합니다.

실, 손택수 시인은 등단 이후 3,4년 만에 한 권씩 꾸준히 시집을 내고 또 그 때마다 굵직굵직한 상을 수상한 중견 시인입니다. 그리고 시집이 나올 때마다 그의 시 세계는 뱀이 허물을 벗듯이 넓어지고 깊어지는 시인으로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그런 그가 이제 쉰이라는 나이가 된 후에야 비로소 보게 되고 듣게 되었다고, 또 지금까지 ‘어딜 그렇게 쏘다니다 이제 사 돌아왔나’는 말을 들을 정도라고 고백하는 게 새삼스럽습니다. 이 시집이 나오기 3년 전에 발행 된 그의 시집에 실렸던 같은 제목의 시 한 편을 읽어 보겠습니다.

냉이 꽃 한 송이 때문에

 

- 손택수

골목 담벼락 아래 어제 못 본 냉이꽃이 피었다
사람들은 꽃이 핀 걸 모르고 그냥 지나간다

애써 피었는데 섭섭하지 않을까
냉이 꽃 때문에 저 무뚝뚝한 담벼락도 조금은 향긋해져서
나비가 날아올 것 같고,
나비 따라 벌도 붕붕거릴 것 같은데

탐험가들이 꼭 이런 마음이겠지
새로 발견한 풍경 앞에서 절로 가슴이 뛰겠지
오늘은 꽃이 나를 탐험가로 만들어주어서
여기가 나의 신대륙, 꿈에만 그린 오지

매일같이 지나치던 골목이 처음 가는 길처럼 두근거린다
저 째그만 냉이 꽃 한 송이 때문에

- 시집 <나의 첫 소년>(창비교육, 2017)

일 지나다니는 골목 담벼락에서 냉이 꽃을 발견하고는 ‘여기가 나의 신대륙, 꿈에 그린 오지’라고 신대륙 발견의 기쁨처럼 감격적으로 노래했던 시인이었는데, 오늘 감상하는 시에서는 이제 그 냉이 꽃이 진 후 하트 모양의 냉이열매도 발견했을 뿐 아니라 그 속의 소리도 듣게 되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냉이보다 더 낮아져서 땅 속에서 냉이의 무등을 태우고 싶다며 시인으로서 자신의 앞으로의 삶의 자세와 방향까지 발견하는, ‘시’의 깊은 세계로 돌아왔다는 고백으로 연결하고 있으니 놀랍습니다.

택수 시인은 노작문학관 관장으로 지난 1월, 문예동인지 <백조(白潮)>를 근 100년 만에 계간지로 복간하는 일의 주역을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백조>(하얀 파도: 흰물결)는 대한민국 근대 낭만주의 문학운동을 선도했던 잡지로 홍사용, 박종화, 나도향, 현진건, 박영희, 이상화 등 근대 문학청년들이 뜻을 모아 1922년 1월1일 창간했던 계간지였습니다. 그러나 재정적인 어려움과 일제 탄압 등에 의해 아쉽게도 그 이듬해인 1923년 9월, 3호를 끝으로 폐간되었습니다.

‘당시엔 나라 잃은 시대의 그늘 속에서도 창조라는 낯선 욕망들이 다양한 문학이념을 가진 문인들을 통해 새롭게 솟아올랐다면, 이제 100년이 지난 2021년의 <백조>는 그런 다양한 시각을 가진 문학 연구자들과 문인들이 마음껏 자기 문장을 펼칠 수 있는 순백의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대한민국의 문단 안에서 ‘선한 영향력’과 ‘공동문학’을 주도하는 중심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백조를 복간하는 포부를 밝히는 그에게서, 한 사람 개인 시인으로서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시 문화 전반을 고민하는 큰 포부도 엿 볼 수 있으니 참 좋습니다.

사람의 시인이 성장해 가는 과정은, 주변의 사물들을 그저 허투루 보는 것에서부터 자세하게 들여다 볼 줄 아는 세계로 점점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표현하면 딱 맞을 듯합니다. 스티브 잡스가 즐겨 읽었다는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가 쓴 시, ‘순수의 전조(Auguries of Innocence)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우주를/ 들꽃 한 송이에서 천국을 보려거든/ 그대 손바닥 안에서 무한을/ 한 순간 속에서 영원을 붙잡으라‘

인이 되었든 세기의 불세출 천재가 되었든, 동일한 원리인 듯합니다. 그것은 바로 남들이 그냥 지나치는 아주 하찮은 작은 것에서 더 소중하고 아름답고 귀한 것을 발견할 뿐 아니라 삶의 방향마저도 바꿔 그렇게 살아가는 것임을. ’그때‘ 매양 봄은 왔다 가고 또 꽃은 피었다 지는 것을 반복하지만, 그 속에서 늘 ’새 봄‘을 발견할 수 있음을.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