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을 낚는 거미는 배가 고프다
- 권경업
아침 산책길 숲 속 거미줄에
이슬이 걸려 있다
다들 눈부셔라, 눈부셔라 하지만
이슬이 마를 동안
눈먼 먹잇감도 걸리지 않을
다 드러나 버린 거미줄
안개 낀 삶의 막막함에, 때로는
밥보다 시가 더 필요한 날도 있겠지만
허공의 어둠을 훑어 이슬을 낚으면
틀림없이 배가 고프다
- 계간 <전망> 2005년 봄호
* 감상 : 권경업 산악시인, 사회사업가, 산악인.
1952년에 태어나 경남공업전문대를 졸업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시인을 소개해 온 방식으로 그를 소개한다면 앞에 쓴 것과 같이 딱 한 줄 밖에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산과 관련하여 그를 소개하면 몇 페이지를 할애해도 부족할 정도로 이야기할 게 많은 사람입니다.
그는 이 땅 최초로 백두대간을 종주한, 1970년대 부산 지역을 대표하던 산악인이었습니다. 1977년 설악산 토왕성 빙폭을 국내 두 번째로 등반하고 1982년 부산지역 최초의 히말라야 원정대 등반 대장을 맡았습니다. 그 이후 국내의 많은 암벽과 빙벽 길을 개척했으며 40여 차례에 걸쳐 히말라야를 탐사했습니다. 그리고 1987년부터 시작한 결식노인을 위한 무료 급식소는 지금까지 34년 째 운영 중이며, (사)아름다운 사람들과 1983년에 설립된 ‘부산등반연구소’의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한국 최초로 백두대간을 종주한 그는 산악운동의 문화적 위상을 높였다는 찬사를 받고 있기도 한데 산을 오르면서 느끼는 것을 글로 표현하여 ‘산악시’라는 독보적인 장르를 개척한 선구자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백두대간 종주는 일제(日帝)가 역사 속에서 지워버린 우리 산줄기 이름들을 되찾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2005년에는 남측 대표단의 일원으로 평양을 방문, 삼지연을 거쳐 백두산을 오르기도 했습니다. 2011년 4월에는 ‘세상 가장 낮은 히말라야 원정대’를 결성하여 7 년 간의 노력 끝에 에베레스트의 길목 체불룽에 자선병원인 ‘히말라야토토 하얀병원’을 건립하기도 했습니다. 가장 최근 그의 행적은 국립공원관리공단 이사장을 맡아 그 임무를 다한 후 2021년 1월, 3 년간의 임기를 무사히 마친 것이었습니다.
정식으로 시인으로 등단한 적은 없지만 1990년 백두대간 연작시 60 여 편을 월간 <사람과 산>에 연재하면서 조금은 낯선 ‘산악시인’이라는 명칭도 얻었고 그 이후 ‘산악시’라는 새로운 장르를 열었습니다. 저서로는 시선집 <달빛무게>, <하늘로 흐르는 강> 등이 있고, 시집으로는 <뜨거운 것은 다 바람이 되었다>, <날개 없이 하늘에 다다른<, <녹아버린 얼음보숭이>, <별들이 쪽잠을 자고 간>, <오래 전, 그대도 꽃다운 누군가의 눈부신 눈물이었습니다>, <사랑이라 말해보지 못한 사랑이 있다면>, <잃어버린 산>, <자작 숲 움 틀 무렵>, <내가 산이 될 때까지>, <어느 산 친구의 젊은 7월을 위해>, <산정로숙>, <삽당령>, <백두대간1> 등 모두 15권을 상재하였습니다. 행동하고 실천하는 산악시인, 그리고 가장 낮은 곳에서 함께 하는 봉사자로 살아가고 있는 그는 젊음을 산에서 바친 산행 경험을 이 땅과 더불어 나누며 살고자 오늘도 열심히 산악시 작업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오늘 감상하는 시는, 시인이 산길을 걷다가 영롱한 이슬이 내려앉은 눈부시게 빛나는 거미줄을 보고 노래한 시입니다. ‘다들 눈부셔라, 눈부셔라 하지만’ 정작 거미입장에서 생각하면 이슬이 끼어 있는 동안에는 먹이 활동도 할 수 없으니 ‘이슬이 마를 동안/ 눈먼 먹잇감도 걸리지 않을/ 다 드러난 거미줄’일 뿐이니 황당한 일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바로 그 점을 놓치지 않고 그 다 드러나 버린 거미줄을 보는 순간 자신이 그동안 열심히 달려 온 지난 인생길을 떠 올렸던 것입니다. ‘안개 낀 삶의 막막함에, 때로는/ 밥보다 시가 더 필요한 날도 있겠지만/ 허공의 어둠을 훑어 이슬을 낚으면/ 틀림없이 배가 고프다’는 노래는 다름 아닌 자신의 그것과 너무도 닮았다는 고백의 다름 아닙니다. 그동안 그의 삶이 녹록치 않았음을 시인은 ‘안개 낀 막막한 삶’이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달픈 삶의 길처럼 멀고 긴 산 길 자체도 힘들었지만, 그 길에서 허공의 어둠을 훑어 이슬을 낚는 작업은 더 ‘배고픈’ 작업이었다는 말입니다.
그가 쓴 시편들을 읽으면 산행의 미학이 그대로 드러나는 주옥같은 시들로 가득 차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자신의 시들을 두고 그는 ‘허공을 훑어 이슬을 낚는’ 행위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남는 것은 ‘틀림없이 배가 고픈’ 것 뿐이라는 것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때는 눈부신 이슬 같은 시보다는 밥을 위해 스스로 자신의 체중을 이용해서 이슬을 털어내기도 하고, 또 미세한 진동으로 이슬을 제거해보려고도 해 봤지만 이내 그 길에서 벗어나 또 이슬을 낚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을 것입니다. 산행 길에서 만나는 시의 소재들 때문에 불쑥불쑥 쳐들어오는 시어들이 그를 배고픈 길로 인도했다고나 할까요.
이 시를 읽으면서 오래 전에 읽었던 책 한 권이 갑자기 생각이 난 건 왜일까요. 당시 조기 축구를 마치 새벽기도 하듯이, 열심히 하는 제게 어느 지인 분께서 한번 읽어보라고 슬쩍 건넸을 때 그 제목이 특이해서 분명히 기억이 되는 책입니다. 아마도 교회에서 중직을 맡은 사람이 새벽 기도는 등한히 하면서 너무도 열심히 축구를 하고 있으니 딱해서 그 책을 건넸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책 제목은 <축구와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그 책의 저자는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영국에서 신학 계통과 교육계에서 탁월한 이야기꾼으로 인정받고 있는 축구 매니아입니다. 책의 서론에 그가 책을 쓰게 된 동기에 대해서 쓴 부분을 저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출석하고 있는 교회에서, 자신이 영국 프리미어 리그 경기를 빼놓지 않고 시청할 뿐 아니라 응원하는 팀의 경기가 있는 날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축구 경기를 우선해서 본다는 말을 했다가 한 여자 성도에게 엄청난 무안을 당했던 일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그 말을 듣고 책의 저자를 ‘세속적인 크리스천’이라고 정죄하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그녀와의 좋았던 관계마저 깨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책에서 축구라는 수준 높은 운동 자체에 대해서 엄청난 열정으로 이야기를 전개할 뿐 아니라, 현대 사회의 모든 면을 총체적으로 망라하고 있는 영국 프리미어 리그의 완벽한 시스템을 소개하면서 진짜 세속적인 게 무엇이며 또 거룩한 것이 무엇인지를 이야기 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 열정이 그로 하여금 책을 한 권 쓰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배고픈 열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억이 뚜렷하진 않지만, 책의 저자가 말하려고 했던 핵심은 현대인의 삶에서 우리는 그저 ‘허공의 어둠을 훑어’ 이슬을 낚아내는 일만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눈부신 이슬이 묻어 있으면 그것을 적극적으로 흔들어 털어내기도 하고 또 필요하다면 그저 해가 뜨기만을 기다리지 않고 거미들이 미세한 진동으로 물기를 없애는 일을 하듯, 적극적으로 현실에 뛰어들어 시스템을 만들어 가는 노력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했던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뜬금없이 이 시를 읽으면서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이 생각 난 게 서로 연결고리가 없는 듯 생뚱맞게 들리지만, 자기와 같지 않으면 모든 게 ‘세속적’이라거나 ‘배고픈 일’이라고 판단해 버리고 자기만 고고한 척 하기 보다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다양한 생각들과 시각, 해석들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열린 자세가 필요한 듯합니다. 시인도 그 일이 배고픈 일이고, 또 사람들 눈에 확연히 드러나는 거미줄 같은 일이지만, 앞으로도 계속 어두운 허공에서 이슬을 낚는 일을 계속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듯이 말입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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