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목욕탕에서 / 문학시간 - 김은숙

석전碩田,제임스 2021. 6. 2. 06:46

목욕탕에서

                                  - 김은숙

목욕탕에서
옛 친구 정화를 만났네
몇 년 전 유방암 수술을 했다며
검정 비닐로 왼쪽 가슴을 애써 감추고 있는 정화
가슴을 싸안고 있는 오른팔의 거리만큼
가까이 다가서면 안될 것 같아
나 또한 제대로 눈길을 줄 수 없었네
정화야 착하고 따뜻한 내 친구야
네 몸에 깊게 패인 상처가
네 마음의 그늘까지 만든 건 아닌지 모르겠구나
누구에게도 완전히 열리지 못하는
보이지 않는 마음의 빗장까지 만든 건 아닌지
네 그 넉넉한 마음까지 움츠려들게 한 건 아닌지 모르겠구나

착한 친구 정화야
네가 내 친구로 다가올 때 그러했듯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도
너의 그 깊고 따뜻한 마음으로
그의 소중한 사랑이 되었음을 기억해
네가 빛나는 건 그 크고 깊은 눈에 담긴
넉넉하고 깊은 사랑임을 생각해
깊고 고운 마음의 따뜻한 친구 정화야
이 세상 누구보다도 빛나는 너의 참 아름다움을
내가 느끼는 만큼
너는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
네 예쁜 등을 꼼꼼히 밀며 어느 순간 팔에 힘이 빠지고
안타까이 떨리던 내 눈빛을 너는 보았는지 모르겠구나

안타까운 내 마음을 너는 느꼈는지
옷을 입어야 편안해지는 친구가 아니라
목욕탕에서도 네게 편안한 친구가 되고 싶다는
내 마음의 소릴 들었는지 모르겠구나
착하고 따뜻한 내 친구야

- 시집 <창밖에 그가 있네> (다층, 2001)

* 감상 : 김은숙 시인.

1961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충북대학교 국어교육과와 인하대 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중등학교 교사로 30여년 재직하면서 학생들과 문학 및 독서캠프, 시집 발간, 창의 융합 캠프, 휴먼 라이브러리, 독서 동아리 운영 등 다양한 활동을 하다가 2020년 교직 생활을 마감하였습니다. 현재는 문학을 통한 소통을 꿈꾸며 충북 지역에서 ‘책방 통통’ 등 독서 및 인문 문학관련 활동을 꾸준히 전개하며 활동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문학> 신인 작품상으로 등단하였으며 현재, <충북작가> 편집위원, 여성시동인 ‘시천(詩泉)’ 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집으로 <그대에게 가는 길>(오늘의문학사, 1998), <창 밖에 그가 있네>(다층, 2001), <아름다운 소멸>(천년의시작, 2003), <손길>(천년의시작, 2007), <부끄럼 주의보>(문학의전당, 2017)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갈참나무 숲으로>(고두미, 2013)가 있습니다.

국의 문단에서 일정한 배경 없이 스스로 문학 행위를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또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 ‘시인’으로 살아가기는 더더욱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은숙 시인은 제도화된 등단의 경로를 밟지 않고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며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 사회에서 따뜻한 손길로 열심히 사랑과 생명의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는 시인입니다.

늘 감상하는 시는 목욕탕에서 오랜만에 옛 친구 정화를 만난 일을 일기장에 쓰듯이, 아니 그녀에게 보내지는 않았지만 편지글처럼 써 내려가듯이 쓴 생활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친구 정화'는 유방절제수술을 한 몸으로 공중목욕탕에 혼자 왔다가 뜻하지 않게 시인을 만났습니다. 친한 친구였지만 ‘수술한 사실’을 그동안 전혀 얘기하지 않고 지냈다가 이렇게 발가벗고 목욕탕에서 만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감출수도 없는 상황에서 ‘검정 비닐로 왼쪽 가슴을 애써 감추고’ ‘몇 년 전 유방암 수술을 했다’고 말하는 정화를 보면서 느낀 것을 시인이 애틋한 마음으로 풀어낸 시입니다. 평소 마음이 깊고 사랑이 많았던 착한 친구 정화였는데, 그동안 엉거주춤 ‘가슴을 싸안고 있는 오른팔의 거리만큼’ 연락이 없이 멀어 진 이유도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깊게 패인 상처가/ 네 마음의 그늘까지 만든 건 아닌지 모르겠구나 / 누구에게도 완전히 열리지 못하는/ 보이지 않는 마음의 빗장까지 만든 건 아닌지’ 시인은 못내 안타까워 당사자인 정화보다 더 힘이 빠지고 눈의 초점을 잃을 정도였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가면서 우리는 예기치 않는 불행한 일들을 겪게 됩니다. 특히, 가장 가까운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내는 사별의 슬픔이나, 또 현대 의학으로도 힘들다고 하는 중한 병을 진단받고 나면 사람들은 상처나 허물을 안고 자꾸만 자기 안으로 움츠러들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자기 안에 성을 쌓고 그 속으로 숨어들어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년 전의 일입니다. 학생들을 인솔하여 필리핀 해외봉사를 갔다가 현지에서 안면이 마비되는 예기치 않는 사고를 당한 적이 있습니다. 도착한 지 사흘이 지난 날 새벽, 왼쪽 귀에 대상포진이 생기면서 안면 신경에 바이러스가 침범하여 생긴, 예후가 썩 좋지 않은 심각한 안면마비 증후였습니다. 철인 3종 경기를 할 만큼 건강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안면의 반쪽이 마비가 되고 입이 돌아가 왼쪽 눈이 제대로 감겨지지 않는 대형 사고가 났으니 자신감은 물론 삶의 의욕마저 완전히 상실되었습니다. 결국 남들은 눈치 채지 못하는 심각한 우울증상까지 몰려왔지요. 나의 이런 모습을 보고 위하는 마음에서, 좋은 말을 해 주는 사람들의 말조차도 당시에는 내 귀로 들어올 때에는 완전히 180도 뒤틀려서 들렸습니다. 가령, ‘강남에 있는 어느 어느 한의원에 가 봐라, 그 곳에서 똑같은 증상의 사람이 침을 맞고 나았다’라는 말을 해 준 사람의 말이 내 귀에는 이렇게 들리는 것입니다. ‘네가 안 아파봐서 그런 말을 하는구나. 그래 너도 그렇게 교만하고 잘 난체를 하니 앞으로 너랑 내가 연락을 하고 지내나 봐라.’

당시 나 스스로 주변의 사람들과 얼마나 많이 절교를 선언했는지 모릅니다. 모두가 아니꼽고, 모두가 다 교만하고 잘 난체 하는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건, 그 며칠이 지나서 내 안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야, 너는 입이 돌아간 병신인데, 네가 다른 사람과 절교를 선언할 자격이라도 있어? 너는 병신이야. 입이 돌아간 병신.’ 그리곤 한없이 눈물만 흐르면서, 내 속에 있는 컴컴한 동굴 속으로 숨어 들어갔습니다.

인이 표현한 이 부분 - ‘누구에게도 완전히 열리지 못하는 / 보이지 않는 마음의 빗장까지 만든 건 아닌지/ 네 그 넉넉한 마음까지 움츠려들게 한 건 아닌지 모르겠구나’ - 을 읽으면서 격한 공감이 갈 수 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그러나 다행스런 것은 그 아픈 경험을 통해 삶의 폭풍우를 통과하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이런 저런 충고나 조언, 평가나 판단이 아니라, 그저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조용히 함께 그 곁에 있어 주는 것임을 머리와 지식으로가 아닌, 몸소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같은 아픔을 겪는 친구에게 동병상련의 처지가 되어 다가갈 수 있게 된 것이 오히려 감사의 조건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근 며칠 사이에 들려 온 슬픈 소식들이 있었습니다. 예기치 않는 어려운 병 진단을 받고 요양병원에 입원했다는 친구, 그리고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갔다가 수술하기에는 시기를 놓쳐버린 암 진단을 받은 후배도 있었습니다. 비록 공간적으로 함께 있어주지는 못하지만 마음으로 응원을 보내고 싶습니다. 목욕탕에서 만나 서로의 아픔을 보면서 ‘친구끼리 연민의 깊은 정’을 교감한 ‘은숙’과 ‘정화’의 그 따뜻한 마음을 이 시간 친구와 후배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옷을 입어야 편안해지는 친구가 아니라/ 목욕탕에서도 네게 편안한 친구가 되고 싶다는 / 내 마음의 소릴 들었는지 모르겠구나’ 노래했던 시인의 마음을 빌어 이 순간 어려운 삶의 구간을 달려가고 있는 친구와 후배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냅니다. 힘내라 ‘착하고 따뜻한 내 친구야’

쯤에서, 30여년 중등학교 교사 생활을 했던 시인이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느꼈던 것을 소재로 삼아 평범한 시어로 풀어 낸 시 한 편을 더 읽고 글을 마무리해야 아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동안 어린 학생들에게 문학과 삶을 가르친다고 하면서도 아직 문학이 뭔지, 또 인생이 뭔지 그 질문에 ‘흡족하지 못한 내 대답’이 못내 부끄럽다고 고백하는 시인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겠다는 결심도 엿보이는, ‘진솔함’이 느껴지는 시입니다. - 석전(碩田)

문학시간

                                          - 김은숙

며칠 후로 2 학기 중간고사가 다가오고
공부는 하지 않겠다던 일민이까지
'선생님 규장전이 뭐예요?' 하며 질문을 해오는 문학 시간
곧이어 장난처럼 해온 질문
'선생님 문학이 뭐예요?'
아 문학이 뭐냐고 물었구나
문학을 가르치는 시간
문학을 배우는 시간
갑자기 나는 그 질문이 날카롭구나
예리하게 파고들어 내 말문을 막는구나
그래 너희들과 나 이렇게 함께
우리네 삶의 모습 담긴 작품들 기웃거리며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삶의 모습을 생각해보는 것
내 살아가고 있는 모습도 한 번 되짚어 보는 것
다양한 사람살이 속 담긴 빛과 어두움, 설움과 즐거움
온갖 감정의 양면의 언저리나마 함께 느끼며 따라가보고
내게 드는 느낌과 생각들 마음 한 귀퉁이에 갈무리해 보는 것
여러 모습의 사람살이 모두
진지하게 존중하는 마음으로 세상 바라보는 것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이며
내 안의 강한 울림 들으려 하는 것
다른 이들의 삶의 애환 들여다보며
내 살아온 길 제대로 짚어보고
내 살아갈 길 마음 속 깊이 새겨보는 것
혹 그것이 문학이 아닐까 생각되는구나
아니 흡족하지 못한 내 대답이 부끄럽구나
문학이 무엇인가 다시 내게 되묻는 시간
고등학교 2학년의 문학(文學) 시간

- 시집, <아름다운 소멸>(천년의시작,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