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 문인수
파죽지세의 응원이 계속 끓어오르고 있다. 옆의 사람을 와락, 와락, 껴안고 폭발적으로 낳는 열광이 '붉은 악마'다. 대∼한민국 대∼한민국이 지금∼ 오 천 년 만에 처음 그늘진 데가 없다.
가을날의 내장산이나 설악의 바람같이 번지는 춤, 우는 이도 많다. 저런 표정에도 곧 바로 마음이 건들리는, 불의 뿌리가 널리 동색이다. 다스리지 않았으나 눈물이 기름이어서 잘 타오르는 것이다.
그 힘이 쏘아 올린 작은 공, 저 흰 출구.
전국의 인구가 모처럼 다 몰려나와 있다. 뜨겁게 펼쳐지는 씻김굿 한 판이, 해방이 참 광활한 대륙이다.
- 시선집, <풀잎의 말은 따뜻하다> (한국시인협회, 2002)
* 감상 : 어제 들려 온 슬픈 부음 소식이 둘 있었습니다. 하나는, 2년 전 그의 시를 함께 감상하면서 소개했던 저의 고향인 경북 성주(星州) 출신 문인수 시인의 별세 소식이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긴 머리를 휘날리며 그라운드를 종횡무진 달렸던 유상철 축구 선수의 타계 소식이었습니다. 특히, 유상철 선수는 지난 2019년 췌장암으로 투병한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가 병마를 이기고 다시 일어서기를 마음으로 응원했기에, 그의 죽음을 알리는 이번 뉴스에는 먹먹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2년 전 감상했던 문인수 시인의 ‘축구’라는 제목의 시를 다시 꺼내서 읽어보려고 합니다.
문인수 시인.
1945년 6월 2일 경북 성주군 초전면에서 태어났고 초전초, 성주중, 성주농고 입학 대구고 전학 후 졸업을 한, 순종 성주 출신 시인입니다. 동국대학교 국문과를 중퇴하고, 1985년 <심상>에 시 '능수버들' 등 4 편이 당선되어 신인상을 수상함으로써 등단하였습니다.
시집으로 <늪이 늪에 젖듯이>(심상, 1986), <세상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문학아카데미, 1990), <뿔>(민음사, 1992), <홰치는 산>(만인사, 1999), <동강의 높은 새>(세계사, 2000), <쉬!>(문학동네, 2006), <배꼽>(창작과비평, 2008), <적막소리>(창작과 비평, 2012), <그립다는 말의 긴 팔>(서정시학, 2012), <달북>(시인동네시인선, 2014), <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창작과 비평, 2015), 동시집 <염소 똥은 똥 그랗다>(문학동네, 2012) 등이 있으며, 1996년 대구문학상, 2000년 제11회 김달진 문학상 수상, 2003년 노작문학상, 2007년 미당문학상, 2016년 동리목월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습니다.
문인수 시인은 마흔이 넘어 등단한 늦깎이 시인입니다. 그가 스스로 고백했듯이, 30대 후반까지 자신의 삶은 ‘백수의 삶’이었다고 자책합니다. 그리고 그런 인고의 긴 시절이 그의 시에 녹아들다보니 대부분의 그의 시들이 외부의 사물을 내면으로 끌고 들어와 그것을 내 것으로 풀어내는 순도 높은 서정시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감상하는 시도 제목에서 말해 주듯, 축구에 관한 시이지만 다 읽고 나면 어느 새 마음속에 켜켜이 쌓여 있는 한(恨)과 만나 한편의 서정시로 바뀌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시는 2002년 한.일 월드컵 경기에서 온 나라 국민이 떼 지어 모여 응원을 하는 모습을 그려 낸 시입니다. 온 국민이 열광하는 이런 모습을 보고, 시인은 그 현상 자체만을 본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 국민 한 사람 한 사람, 아니 시인 본인의 마음속에 내재 되어 있는 한(恨)이라는 정서를 이야기합니다.
모르는 사람인데도 한 골이 터지는 순간, 옆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지만 와락 껴안고 울기까지 하는 장면이 시인에게는 마치 씻김굿 한 판을 보는 것 같았던 듯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곳 한 장소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가을 날 내장산, 설악산을 거쳐 한반도 전체로 붉게 물들어 가는 단풍 색깔과 동색이 되어 전국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시인은 내면의 눈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밤에도 국가대표팀의 축구 경기가 벌어집니다. 2022 카타르 월드컵 대회의 지역 2차 예선전입니다. 다행스런 것은 이번 경기는 우리나라에서 치르지기 때문에 새벽이나 한 밤 중에 경기를 관람하지 않아도 됩니다. 온 가족이 모여 앉아 편안하게 응원할 수 있는 시간이라 오늘 밤 응원은 그동안 코로나19로 우울했던 마음을 맘껏 날려버리는 ‘씻김굿’ 같은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문 시인을 마지막으로 떠나보내면서, 그의 시 하나를 더 감상하는 것이 시인에 대한 마지막 예의인 듯합니다. 저는 이 시를 읽으면서 오래 전부터 모든 인사를 ‘굿모닝’으로 대신하는 내 말을 시인이 엿들은 건 아닌가 잠시 착각을 할 정도였습니다.
굿모닝
- 문인수
어느 날 저녁 퇴근해오는 아내더러 느닷없이 굿모닝! 그랬다. 아내가 웬 무식? 그랬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 후 매일 저녁 굿모닝, 그랬다. 그러고 싶었다. 이제 아침이고 대낮이고 저녁이고 밤중이고 뭐고 수년째 굿모닝, 그런다. 한술 더 떠 아내의 생일에도 결혼기념일에도 여행을 떠나거나 돌아올 때도 예외없이 굿모닝, 그런다. 사랑한다 고맙다 미안하다 수고했다 보고 싶었다 축하한다 해야 할 때도 고저장단을 맞춰 굿모닝, 그런다. 꽃바구니라도 안겨주는 것처럼 굿모닝, 그런다. 그런데 이거 너무 가벼운가, 아내가 눈 흘기거나 말거나 굿모닝, 그런다. 그 무슨 화두가 요런 잔재미보다 더 기쁘냐, 깊으냐. 마음은 통신용 비둘기처럼 잘 날아간다. 나의 애완 개그, '굿모닝'도 훈련되고 진화하는 것 같다. 말이 너무 많아서 복잡하고 민망하고 시끄러운 경우도 종종 있다. 엑기스, 혹은 통폐합이라는 게 참 편리하고 영양가도 높구나 싶다. 종합비타민 같다. 일체형 가전제품처럼 다기능으로 다 통한다. 아내도 요즘 내게 굿모닝, 그런다. 나도 웃으며 웬 무식? 그런다. 지난 시절은 전부 호미자루처럼, 노루꼬리처럼 짤막짤막했다. 바로 지금 눈앞의 당신, 나는 자주 굿모닝! 그런다.
- 시집, <배꼽>(창비, 2008)
유교적인 전통과 보수적인 분위기가 가득한 별 고을 성주에서 한 줄기 빛 같이 살아온 시인 문인수. 저 개인적으로 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내 고향 성주에도 이런 멋진 시인이 있다는 사실에 그동안 참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먼발치에서 관심을 가지고 응원하고 있었지만 작년 이맘때 쯤 갑자기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결국 다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서울 혜화동 경신중고등학교 정문을 들어서면 커다란 돌 비석에 이사야서 60장 1절의 말씀, ‘일어나 빛을 발하라’는 구절이 모든 경신인(儆新人)들을 먼저 맞이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후배 유상철 선수도 그 언덕을 오르내리며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서 중고등학교 6년의 학창시절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리고 청소년대표, 국가대표로 승승장구하면서 자기가 있는 그 자리에서 49년 동안 그 빛을 맘껏 발산했음은 우리 모두가 증인입니다.
오늘, 아픔도 없고 슬픔도 없는 그곳으로 먼 길을 떠나는 문인수, 유상철 두 고인은 이 땅에서 일어나 빛을 발했던 것처럼 이제는 하늘의 영롱한 별이 되어 영원히 잠드소서.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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