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끝내 하지 못한 질문 / 통사론 / 마트에서 길을 잃다 - 박상천

석전碩田,제임스 2021. 5. 26. 07:47

끝내 하지 못한 질문
- 봄날의 목월 생각 

                                  - 박상천

지금은 윤사월도 아니고,
문설주에 기대어 있는
외딴 집 눈먼 처녀도 보이지 않지만
매년 이 맘 때쯤이면 날리는
당신의 송홧가루.
오늘은 비가 내려
고인 빗물 위에 띠를 이룬
노란 송홧가루가 곱습니다.

송홧가루를 볼 때마다
이제 막 문학개론 수업이 끝난,
70년대 어느 봄날의
행당 언덕이 떠오릅니다.
그 풍경 속에는
맑은 햇살 속에 언덕에 오르는
당신의 구부정한 어깨가 보이고
수업시간에 끝내 하지 못한
질문을 가슴에 품고
당신을 부를까 말까 망설이며,
발자국 소리를 내는 것조차 죄스러운 듯
조심스레 당신 뒤를 따라가고 있는
한 대학 신입생의 모습도 보입니다.

고인 빗물 위에 띠를 이루어 몰려 있는
송홧가루 위로 또 비가 내립니다.
저는 오늘,
내리는 빗줄기를 문설주 삼아 기대어
부드럽고 나직한 목소리의
당신 강의를 다시 듣고 있습니다.
끝내 하지 못한 질문은 아직 남아 있지요.

- 시집 <낮술 한 잔을 권하다>(책만드는 집, 2013. 8월)

* 감상 : 박상천 시인.

1955년 전라남도 여수에서 태어났습니다.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학사), 그리고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198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하였으며 시집으로 <사람을 찾기까지>(민족문화사, 1984), <말없이 보낸 겨울 하루>(둥지, 1988), <5679는 나를 불안케 한다>(문학아카데미, 1997), <한일대역 박상천시집>(역락, 2001), <낮술 한 잔을 권하다>(책만드는 집, 2013) 등이 있으며 1998년 한국시인협회상, 2005년 한국시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한양대학교 에리카캠퍼스 문화콘텐츠학과 재직 중 교무처장, 학장, 부총장을 역임하였고 2020년 8월 정년퇴임하고 명예교수로 있습니다.

늘 감상하는 시는 지난 2013년 8월, 16년 만에 낸 시인의 네 번째 시집인 <낮술 한 잔을 권하다>에 실린 시입니다. 송홧가루가 빗물 위로 떨어져 선을 그으며 흘러가는 모습을 보면서 시인이 ‘당신의 송홧가루’라고 표현한 걸 보면 ‘매년 이 맘 때쯤이면’ 먼저 가신 스승의 자취가 그리워지나 봅니다. 75학번 새내기였던 박상천 시인이 처음 스승인 목월을 만난 건 1학년 문학개론 수업 첫 시간이었습니다. 박목월 교수는 ‘언어란 무엇’인지 설명하면서 맨 앞자리에 앉아서 강의를 열심히 듣고 있던 박 시인의 손을 덥석 잡았습니다. 그러면서 ‘이건 손이다, 그리고 내 손도 손이다. 둘 다 손으로 불리는데 다르지 않느냐’면서 물었다고 합니다. 그가 기억하는 목월은 이렇듯 학생들이 문학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어려운 개념도 쉽게 풀어서 설명할 줄 아는 ‘친절한 선생님’이었습니다. 그의 기억에 의하면 목월은 ‘수업이 끝나고 따라가서 질문을 하면 바삐 걸어가는 중에도 웃으면서 친절하고 사랑스런 표정으로 답해 주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송홧가루가 날리는 이맘때가 되면 스승의 그 부드러운 시학 강의를 들으며 ‘수업시간에 끝내 하지 못한/질문을 가슴에 품고/ 당신을 부를까 말까 망설이며, /발자국 소리를 내는 것조차 죄스러운 듯/조심스레 당신 뒤를 따라가고 있는’, 행당 언덕을 평생 오르면서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스승의 그 나이가 된 자신의 모습을 새삼 생각하게 되는 듯 합니다. 그 때 끝내 하지 못했던 질문이 있다고 시인은 노래하고 있는데 그 질문은 무엇이었을까 문득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상천 시인의 시, ‘통사론‘을 읽으면 친절하게 문학개론 수업을 했던 목월을 빼닮은 제자의 강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합니다. 문장이 주어와 서술어만 있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이제 ’구부정한 어깨’를 가지고 학교 언덕길을 오르시던 스승의 그 나이가 되고 보니, 오히려 최고의 문장은 ‘위기와 절정’, 그리고 ‘눈물과 가슴 설레임, 한바탕 웃음, 고뇌’와 같은 ‘삶의 부사어’가 적당히 섞여 있어야 된다는 것을 시인은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표현합니다. 대강(大綱)이 완벽한 문장을 완성해 본들 그것이 ‘뭐 그리 중요한가’ 되묻는 시 속의 질문은, 바로 자신에게 하는 자문(自問)입니다.

통사론(統辭論) 

                                           - 박상천

주어와 서술어만 있으면 문장은 성립되지만
그것은 위기와 절정이 빠져버린 플롯같다.
'그는 우두커니 그녀를 바라보았다.'라는 문장에서
부사어 '우두커니'와 목적어 '그녀를' 제외해버려도
'그는 바라보았다.'는 문장은 이루어진다.
그러나 우리 삶에서 '그는 바라보았다.'는 행위가
뭐 그리 중요한가
우리 삶에서 중요한 것은
주어나 서술어가 아니라
차라리 부사어가 아닐까
주어와 서술어만으로 이루어진 문장에는
눈물도 보이지 않고
가슴 설레임도 없고
한바탕 웃음도 없고
고뇌도 없다.
우리 삶은 그처럼
결말만 있는 플롯은 아니지 않은가.
'그는 힘없이 밥을 먹었다.'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밥을 먹은 사실이 아니라
'힘없이' 먹었다는 것이다.

역사는 주어와 서술어만으로도 이루어지지만
시는 부사어를 사랑한다.

- 시집, <5679는 나를 불안케 한다>(문학아카데미, 1997)

인은 그간 많은 시집을 상재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몇 권되지 않는 시집 중에서 2001에 발간된 그의 <한일대역 박상천 시집>은 큰 의미가 있는 시집입니다. 시인의 어머니께서 아들의 시를 틈틈이 일본어로 번역한 시들을 모아, 정식으로 일본에 있는 시인에게 감수까지 받아 발간된 시집이기 때문입니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어를 배우고 또 평생 교사로 학생을 가르쳤던 어머니(2001년 작고, 故 이환희 여사, 전 전라남도 교육위원, 전 여수 지역사회연구소 이사장)는 초등학생 때부터 시적인 재능이 있는 아들을 알아보고 그 방면으로 많은 훈련을 했다고 합니다. 시골집 외따로 떨어져 있는 변소 앞 벽면에 국내외 유명한 시인들의 시를 직접 써 놓고 읽도록 한다든지, 아들의 동시를 모아 초등학생 때 동시집을 발간해준다든지 하는 특별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요즘처럼 송홧가루가 흩날리는 때가 되면 ‘역사는 주어와 서술어만으로도 이루어지지만/ 시는 부사어를 사랑한다’는 귀한 가르침을 줬던 스승 목월과 함께 어머니가 시인에게는 늘 생각이 나는 분들임에 틀림없었을 것입니다.

런데 이제는 이 무렵이 되면 생각나는 사람이 한 사람 더 늘어났습니다. 안타깝게도 2013년 마지막 시집이 나오기 하루 전,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시인은 이 시집을 끝내 보지 못한 아내의 관 속에 시집을 넣어주면서 눈물을 참 많이도 흘렸습니다. 그가 아내를 생각하면서 쓴 최근의 시를 읽으면 옛 스승에게 끝내 하지 못하고 남겨 두었던 삶의 질문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힌트가 되는 표현이 있습니다. 가끔 함께 장을 보는 날이면 자신은 꽤 괜찮은 남편으로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던 시인, 그러나 막상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후 ‘이제야 알았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시인의 목소리에서 스승에게 질문하고 듣지 못했던 그 답을 대신 아내가 알려주어 알게 되었다고 말하는 듯 들리기 때문입니다.

마트에서 길을 잃다

                                        - 박상천

당신과 함께 장을 보러 가던 마트에
이젠 혼자 가게 되었습니다
딸아이가 따라오는 때도 있지만
혼자 가는 때가 더 많습니다
혼자 장을 보노라면
예전과 달리 당신 눈치 안 보고
사고픈 것을 사는 재미가 없는 건 아니지만
당신 뒤를 따라 카트를 밀고 다닐 때완 다르네요

당신과 함께 장을 보러 갈 때면
난 스스로 꽤 괜찮은 남편이라 생각했지요
대단한 일이라도 해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이젠 그렇지 않다는 걸 압니다
장을 보기 위해서는
일주일 메뉴도 미리 생각해야 하고
집안 곳곳을 살펴보며
무엇이 떨어졌는지 무엇이 더 필요한지
일일이 메모를 해야 한다는 걸
이제야 알았습니다
찬찬히 메모를 하고 장을 봤지만
돌아오면 또 원가 빠진 것이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이젠 나 혼자 메모지를 손에 쥐고
거대한 마트 안을 돌아다닙니다
그러다가 문득 앞서 가던
당신이 보이지 않으면
난 갑자기 멍해지고 불안해집니다
오른쪽으로 돌면 당신이 있을까
물건을 고르고 있는
당신을 지나쳐 온 건 아닐까
자꾸만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지만
유기농 야채 코너에도 정육 코너에도
당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앞서 가던 당신을 잃어버린 나는
길조차 잃어버려 자꾸만
마트 안을 헤매고 있습니다

- <동리목월> 계간지 2015년 봄호

늘은 본의 아니게 박상천 시인의 시를 세 편이나 감상하고 말았지만 그의 시를 읽으면 힐링이 되는 듯합니다. 생활 속에서 건져올리는 애틋한 그리움의 서정이 자연스럽게 전달되어져 오도록 평범한 시어들을 사용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한 줌의 가루가 되어 먼 길 떠나는 사촌 형님을 보내드리기 위해 벽제 승화원에 와 있습니다. 해마다 송홧가루 날리는 이 맘 때가 되면 자꾸 형님이 생각이 날 것 같습니다. 부디 평안하게 영면하소서. - 석전(碩田)